한국의 성씨 | 이씨李氏

[한국의 성씨]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사자성어가 말해 주듯 이씨는 흔한 성씨이다. 2015년 중국에서는 이씨가 왕씨를 누르고 인구수 1위가 되었다. 중국과 한국의 이씨를 합하면 1억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김·이·박’이라고 하여 세 성을 한 세트로 묶어 일컫는다. 2015년 우리나라 통계청 조사에서 7,306,828명으로 조사됐다.


이씨의 기원


이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자두나무(오얏나무), 그리고 노자老子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씨는 오얏 리李를 쓰는데, 그것은 노자가 오얏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만들어진 성씨라는 것이다. 즉,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현묘내편玄妙內篇」에는 “노자의 어머니가 노자를 81년 동안 임신하였다가 자두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왼쪽 겨드랑이를 갈라서 노자를 낳았다.”고 한다. 어쨌든 노자는 태어날 때부터 귀가 커서 이이李耳라고 불렸는데, 그로 인해 이李씨라는 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설로 관직 유래설이 있다. 즉 요堯 임금 때 고요가 ‘대리大理’라는 관직을 지냈는데, 자손들도 대대로 대리라는 관직을 역임해서 성씨를 이理씨로 하였다. 그런데 이理씨를 이李씨로 바꾼 사람은 이이정李利貞이라는 설과 노자라는 설이 있다. 이이정이라는 설에 의하면 은나라 말기 이징李懲(이이정의 부친)이 가족과 함께 왕의 폭정을 피해 달아나다 자두로 허기를 채웠는데, 은나라가 망하고 다시 돌아와 고현苦縣에 정착한 뒤 자두나무의 은혜를 기억하여 성씨의 한자를 바꿨다는 것이다. 반면 노자라는 설의 주장은 노자 이전에는 이씨가 보이지 않는데, 노자 이후에는 이씨가 보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이정의 후예(11세 또는 13세, 17세손)인데 조상들이 대대로 이관理官을 지냈기 때문에 이씨로 득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이씨의 기원에는 자두나무와 노자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제로 당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백의 집에도 ‘도리원桃李園’이 있었고, 이씨가 세운 당나라 황궁 뜰에도 자두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노자가 성을 이씨로 바꾼 이야기는 『환단고기』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그 외 소수 민족이 성씨를 바꾸면서 이씨를 사용하게 된 경우가 있다. 즉, 제갈량이 서남 지방의 소수 민족을 평정한 후 그들에게 조趙, 장張, 양楊, 이李씨 등을 하사했다. 또한 선비족 중에서 한족이 된 후 이씨로 성을 바꾼 경우가 있는데, 이들이 낙양洛陽 이씨이다. 그 외에도 북위시대 고호高護씨가 효문제를 따라 중원에 들어온 후 이씨 성을 쓰게 되었다.

대체로 앞에서 말한 설을 종합하면, 이李의 득성 시조는 이징의 아들인 이이정으로 여겨지며, 중시조는 그의 후손인 노자로 여겨진다. 노자 이후 이씨는 당나라 황실을 비롯하여 12개 정권과 60여 제왕을 배출한 성씨가 되었다. 이씨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를 자랑한다. 중국인과 화교, 기타 우리나라의 성씨까지 합하면 1억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이씨 현황


이씨는 신라 6부족 중의 하나인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하는 경주慶州 이씨 계통과 이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전주全州 이씨 계통 외에 중국 계통(연안延安, 고성固城, 상산商山, 안성安城, 태안泰安, 평산平山 이씨 등), 만주계통(청해靑海 이씨), 월남 계통(정선旌善, 화산花山 이씨) 등이 있다. 심지어 김알지의 후손으로 경주 김씨에서 분적한 광산光山 이씨, 가야 수로왕 계통의 김해 허씨로부터 갈라져 나온 인천仁川 이씨도 있다. 이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 약 450본 또는 550본에 가까운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시조가 밝혀진 것은 120본이며, 현존하는 이씨 본관은 100본 정도로 파악된다. 주요한 본관으로는 앞에서 거론한 전주 이씨, 경주 이씨 외에도 연안延安 이씨, 전의全義 이씨, 광주廣州 이씨, 한산韓山 이씨, 덕수德水 이씨, 용인龍仁 이씨, 여주驪州 이씨, 성주星州 이씨 등이다.

이씨는 김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데, 전 국민의 14.8%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전주 이씨가 263만 명, 경주 이씨가 139만 명, 성주 이씨가 20만 3000명, 광주 이씨가 18만 1000명, 연안 이씨가 16만 4000명, 전의 이씨가 16만 4000명, 한산 이씨가 15만 6000명, 함평 이씨가 13만 8000명 등이다.

전주全州 이씨


전주 이씨는 우리나라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에서 김해 김씨(445만 6000명), 밀양 박씨(310만 3000명)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전주 이씨는 263만 100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5.7%를 차지하는 것이다. 전주 이씨의 파派는 총 122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효령대군파, 광평군파, 덕천군파, 밀성군파, 양녕대군파 등이 번창했다.
전주 이씨는 조선 왕실 가문으로 유명한데, 그 시조는 신라 말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이한의 22세손이 바로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조선은 총 27대 왕을 배출했으며 500여 년을 통치했다. 여기서 알아 둬야 할 것은 각 본관의 시조 또는 파조는 왕(임금)이 아니라 그 아들 또는 형제를 시조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왕(임금)이 모든 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특정 성씨의 시조나 파조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를 시조로 하는 파가 없는 것이며, 경순왕을 시조로 하는 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성씨의 기원
전주 이씨에 대해선 외래 성씨라는 주장과 토착 성씨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즉,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에 대해 ‘당나라 도래설’과 ‘경주 이씨 분적설’이 공존한다. 먼저 경주 이씨에서 분적했다는 ‘경주이씨 분적설’을 살펴보자. 경주 이씨는 이알평 이후 소판공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에서 중시조인 이거명까지의 세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陜川 이씨 족보에서 이알평에서 이거명까지의 36대 명단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중 34세 이희두李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의 손자가 전주 이씨의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이라는 것이다.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그러나 경주 이씨에서 전주 이씨가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이 아직 애매하고,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선계를 단언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후일을 기약한다는 분위기이다.

반면 이한의 중국 전래설이 있다. 이는 작자와 연대가 밝혀지지 않는 「완산실록完山實錄」에서 주장된 것이다.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 사공공司空公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입학하였다.…(중략) 배가裵哥의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오니 그때 나이 18세였다.…(중략) 문장이 뛰어나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 문성왕이 사공司空의 벼슬을 주었다. 그 후 태종(태종무열왕)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사위가 되었다.”고 씌어 있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란 글에서는 ‘전주 이씨가 본래 중국 당나라 황실의 후예라고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諱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完山人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중국 전래설은 사대주의적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약하다. 중국 전래설을 주장하는 성씨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한림원 학사, 또는 황실 성씨 등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의 두 가지 주장 모두 씨족의 세계도, 또는 족보 만들기가 유행한 조선 시대에 주장된 것들이어서 그 신빙성을 부여하기 어렵다.

따라서 전주 이씨는 시조 이한李翰 이후로 전주에서 살아온 토성土姓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조 이한의 선대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밝혀지고 있진 않으나, 각 성씨와 본관들이 신라 말이나 고려조에 들어와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과정을 볼 때 이한에서부터 이씨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분파와 주요 인물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사적 기록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전주 이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의 상계에서 분파된 파와 이안사 이후에서 태조 이성계 이전에 갈라진 파, 그리고 이성계 이후 갈라진 왕자, 대군파로 구분된다. 태조 이성계 후손의 분파로는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등록된 파종회(종친회)를 기준으로 할 때 총 86개 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주 이씨의 인물로는 조선 왕조의 가문이니만큼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많다. 고려 때 이의방李義方은 1170년(의종 24) 견룡행수牽龍行首로서 정중부鄭仲夫·이고李高와 함께 무신란武臣亂을 일으켰으며, 대장군·전중감殿中監 겸 집주執奏에 임명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고려 이후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씨의 인물 가운데 셋 중 하나는 전주 이씨 가문에서 배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현대사에 들어와서 대표적인 전주 이씨 인물로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이 있으며, 이범석 전 국무총리,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이현재 전 총리, 이선근 전 문교부장관, 이종림 전 교통부장관 등이 있으며, 전·현직 국회의원도 70여 명이나 존재한다.

경주慶州(월성月城) 이씨


경주 이씨는 신라 6성의 하나이며 우리나라 이씨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으로, 현재 이알평李謁平 시조로부터 오늘날 75세까지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졌다. 경주 이씨 족보에 따르면 이알평은 기원전 117년에 하늘에서 진한 땅 표암봉瓢巖峰(박바위, 밝은 바위)으로 내려온 것으로 수록되어 있다.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으로서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아찬阿粲을 역임하며 군사 업무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자字는 천서天瑞, 호는 표암瓢巖이다. 시호諡號는 문선공文宣公 또는 은열왕恩烈王이라 전한다.

서기 32년에 유리왕이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라 불렀는데 이때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은 이알평의 36세손으로 경주 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라 할 수 있는 신라 진골 출신의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받들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경주 이씨는 본관별 성씨 순위에서 경주 김씨 다음으로 많은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 이씨에서 수많은 이씨들이 분관되어 나감으로써 우리나라 이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분파와 갈래
경주 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이거명이다. 이렇게 이거명이 중시조가 된 것은 목은 이색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 벼슬을 지낸 이거명 이후의 세계를 적었기 때문이다. 경주 이씨에서 외래 본관 성씨를 제외한 수많은 본관들이 갈라져 나갔다. 이거명 이전에 분관된 성씨로 성주 이씨 등이 있으며, 이거명 이후에 이구李球를 시조로 하는 우계羽溪 이씨,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車城 이씨,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陜川 이씨, 이거명의 6세손인 이주좌李周佐를 시조로 하는 아산牙山 이씨, 이주복의 아들 이우칭을 시조로 하는 재령載寧 이씨, 이거명의 15세손인 편翩의 아들 이임간李林幹을 시조로 하는 장수長水 이씨, 이거명의 18세손 이영재李永梓와 이군재李君梓를 시조로 하는 진주晉州 이씨, 이거명의 19세손 반계攀桂를 시조로 하는 원주原州 이씨 등이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 토종 이씨의 대종인 경주 이씨는 소판공 이거명 이후 고려 말기에 들어와 크게 번성한다. 분파도 고려 시대에 8개 분파로 나뉘고, 이후에 다시 70여 개 파로 나뉘게 된다. 그중 8대파는 성암공파誠菴公派, 이암공파怡庵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지손支孫 계통으로 판전공파判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등이 있다.

경주 이씨는 고려 말과 조선조에 들어와 크게 세력을 떨쳤다, 문과 급제자만 178명이나 나왔으며,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을 배출하였다. 특히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안에서 4명의 영의정과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와 조선의 대표적 명문 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주요 인물
고려에서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유명하고, 조선에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있다.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제현은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인 이금서李金書의 후예이다. 아버지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이 신흥 관료로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15세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면서 원나라의 요수姚遂,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 등과 교우하였다. 공민왕 때에는 정승이 되어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총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지식과 견문, 그리고 문장으로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하고 국사國史 편찬을 맡았으며, 저술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 있다.

이항복은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 장군의 사위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 있었다.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으며, 한음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조판서를 맡았으나,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맡아 전란을 지휘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에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근대 독립운동가로는 이준 열사와 함께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이상설李相卨과 7형제가 함께 50여 명의 가솔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가 유명하다. 현대 인물로 삼성이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을 일군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과 이건희李健熙 부자가 있다. 신산, 돌부처 등으로 불린 바둑계의 황제 이창호李昌鎬도 경주 이씨 가문이다.

성주星州 이씨


성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 때 이부상서를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그는 우리나라 토착 이씨의 시조인 이알평의 32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주 이씨의 중시조 이거명李居明보다 4대가 앞선다(소판공 이거명은 이알평의 36세손). 그는 신라가 망한 후 이름을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 살았다고 한다. 비록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려 태조가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나의 신하는 아니나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 하며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대대로 호족을 이루고 살았다. 호장이란 지방 통치의 수장으로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이다. 그러다가 고려 고종 때, 시조 이순유의 12세손인 이장경李長庚이 중시조가 되면서 가문이 번창하게 되었다.

성주 이씨는 바로 성주星州 지역에서 오랫동안 토착해 온 성씨이다. 그것은 성주 이씨의 시조 이순유가 신라 멸망 이후 성주에 옮겨서 숨어 살았다는 것과 성주 이씨가 고려에서 대대로 성주 지역의 호장 벼슬을 하는 호족이었기 때문이다.

분파와 갈래
이장경 대에 가문이 번창하게 된 것은 그의 대에 와서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교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장경은 강양군江陽君 이약李若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중앙 정치의 인맥을 확보한다. 그리하여 그의 슬하에 다섯 아들(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장경부터 8세대 안에 문형文衡(대제학) 18명, 상신相臣(정승) 15명, 문과 급제자 75명을 배출하여 여말선초麗末鮮初 최고의 가문 중 하나로 부상했다. 고려 말의 신진 유신이자 대문장가 이숭인도 그 일원이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웠으므로 원 황제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다. 따라서 중흥 시조 이장경이 농서군이 되었기에 성주 이씨를 농서隴西 이씨라고도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 성주목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 성주 이씨의 주요 파는 밀직공파, 참지공파,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 초은공파, 광평군파, 판서공파, 도은공파, 경무공파, 평간공파, 문경공파, 총제공파, 판운공파, 동지공파, 참판공파, 간성공파, 고은공파, 장절공파, 도정공파, 문과공파, 봉례공파, 첨추공파 등이 있다. 조선 시대 성주 이씨에서 배출된 과거 급제자를 보면 문과 102명, 무과 32명, 사마시 352명, 역과 2명, 의과 12명, 음양과 1명, 율과 2명, 주학 3명 등이다.

주요 인물
성주 이씨의 주요 인물로 고려 때 이인임李仁任은 이조년의 손자이며, 이포의 아들이다. 이인임은 공민왕에서 우왕 대까지 거의 24년간 고려 정치의 최정상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친원親元 정책을 견지하며 고려의 구舊체제를 지키려 했기 때문에 신진 사대부였던 정몽주, 정도전 등과는 대립 관계였다.

이숭인李崇仁의 호는 도은陶隱으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고려 말 충신 오은五隱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문과에 급제한 후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한 뒤 정몽주·김구용·박의중 등과 함께 학관을 겸했다. 이색과 명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와 예문관 제학에 오르고,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당했다. 그 후 정도전이 보낸 황거정에게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복잡한 국제 관계의 외교 문서를 도맡아 썼을 정도로 문장에 조예가 깊었다.

현대 인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순자 여사를 비롯하여 이병희(제1무임소장관, 국회부의장), 이용택(국회의원), 이대순(국회의원, 체신부장관), 이해봉(대통령행정비서관) 등이 있고, 재계에는 이의순(세방기업 회장), 이운일(신영섬유 회장), 이삼열(국도화학공업 대표이사) 등이 성주 이씨 인물들이다.

광주廣州 이씨


광주 이씨는 고려 말에 광주 지역에서 아전을 지낸 이당李唐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들의 족보에 보면 그 조상들이 신라 때 칠원漆原(현재의 경남 함안군에 병합)에서 일종의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여 칠원성에서 성백을 세습하여 오던 그들은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麻衣太子만을 왕王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 하여 끝까지 항거하므로, 크게 노한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친히 칠원성을 함락시킨 뒤 이씨 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淮安(현재의 경기도 광주) 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그렇게 광주 일원에서 노비로 살던 광주 이씨 일족은 고려 말에 들어와 이당이 생원이 되고, 그 아들들이 크게 이름을 떨침으로써 가문이 급속히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을 일으킨 이당
광주의 아전으로 있던 이당이 가문을 일으키게 된 과정은 설화로 전해 내려온다.

“고려 말에 광주 고을의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앉아 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 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고을 원님의 사위가 된 이당은 슬하에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아전의 자식으로 5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그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으로 고려 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하다가 940년(태조 23)에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광주 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주요 인물들
둔촌 이집은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을 논박하였다가 포살령을 받고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이집의 세 아들은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큰아들인 이지직李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고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둘째 이지강李之剛은 좌참찬을, 셋째 이지유李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또 이지직의 아들 이장손李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이인손李仁孫은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이예손李禮孫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중 이인손의 다섯 아들이 조정에 중용되었는데, 큰아들 이극배는 영의정과 광릉부원군에, 둘째 이극감은 형조판서 광성군에, 셋째 이극중은 광천군에, 넷째 이극돈은 이조판서 광원군에, 다섯째 이극균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조선 성종 조에는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가 되었다. 팔극조정이라 함은 극克 자를 쓰고 있는 광주 이씨 문중의 8명이 영의정을 비롯해 각종 판서와 중요 직책을 역임하며 조정의 대소사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그렇게 하여 광주 이씨는 조선 초기 제일가는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광주 이씨의 기운을 왕도 부러워했는데 예종이 이인손의 묘를 이장시키고 세종대왕의 묘로 삼는다던가, 성종이 아들(연산군)을 낳을 때 이극배의 집에서 낳게 한다던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초기 번성했던 광주 이씨는 갑자사화 등 각종 사화에 연루됨으로써 일족 30여 명이 몰살을 당하는 멸문의 화를 당하기도 했다. 이극감의 아들 이세좌와 손자 4명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하지만 훈구파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 등 명문 사림과 유대를 돈독히 하고, 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가문이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조선조 광주 이씨는 명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침을 겪어야 했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역시 선조 때에 광주 이씨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이 된 그는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 수완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 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근대 인물로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종훈이 있고, 이태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유명하다. 이태영의 남편은 정일형 전 외무부 장관, 아들은 정대철 전 의원이다. 이정재(자유당 정권시절 정치깡패), 이종환(전 삼영그룹 회장), 이중재(전 국회의원) 등의 인물과 함께 이순재(배우), 이수성(전 국무총리), 이용훈(전 대법원장), 이주영(전 해양수산부 장관), 이미연(배우), 이윤석(개그맨), 이승엽(야구선수) 등이 있다.

연안延安 이씨


연안延安 이씨의 시조 이무李茂는 중국 5호 16국 시대 서량西凉을 세운 무소왕武昭王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나라 고종 5년에 소정방과 함께 신라 원군의 장수로 참전해 백제 정벌에 나섰다. 백제를 정복한 후 소정방이 승세를 몰아 신라까지 정벌할 욕심을 보이자, 동료 장수들과 논의하여 소정방을 설득하였다. 이에 신라에서는 나당군이 대결을 벌이는 위험한 상황을 타개한 이무의 공을 높이 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백제 땅에 머물러 지키다가 나당연합군이 고구려까지 정복하자 시염성(현 황해도 연안)을 맡아 관리하게 되었고, 당나라에서 권력 투쟁이 격화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신라에 머물렀다. 그러자 신라 왕실에서는 이무의 공을 인정해 연안후延安侯로 봉하고, 식읍 1000호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분파와 갈래
시조 이후의 계보는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繼代를 알지 못한다. 당시 신라 왕족과 6부족을 제외하곤 성씨를 쓰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성이 일반화되면서 그 후손들이 각각의 중시조를 기점으로 10여 파로 나누어졌다.

이들 10여 파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파는 이습홍의 태사첨사공파, 이현려의 판소부감사공파, 이지의 통례문부사공파 등 4개 파이다. 그런데 이들 계파는 중시조가 이무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각 파조 간의 세대 관계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족보도 합보하지 못하고, 각 파의 세대 간 항렬자도 다르게 쓰고 있다.
연안 이씨가 명문가로 발돋움한 것은 조선조 판소부감사공파에서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이 나온 이후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문과 급제자만 250명, 정승 반열의 상신 8명, 대제학 7명, 청백리 6명을 배출하였다.

주요 인물
연안 이씨의 주축인 3대 파 중에서도 판소부감공파가 단연 뛰어난데, 이 파에서만 상신 8명과 대제학 6명, 청백리 1명, 그리고 공신 10여 명이 배출되었다. 파를 중흥시킨 사람은 문강공 이석형이다. 그는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 왕을 섬긴 명신으로, 당시 유학계의 4대 학파 중 훈구파로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와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했다. 한문학의 대가로 유명한 이정구李廷龜가 그의 현손이며, 이귀李貴는 그의 5세손이다.

문충공文忠公 이정구는 한문학의 대가로서 선조 때 대제학, 인조 때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학자와 문장가로서 명성을 멀리 명나라까지 떨쳤다. 그의 자손에서만 3대 대제학과 부자 대제학이 나왔다. 충정공忠定公 이귀는 인조반정을 주동하여 정사공신 1등으로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근현대 인물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이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는데, 그의 집안은 경주 이씨의 이회영 일가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문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동녕 외에 우리나라 시조문학에 대가를 이룬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도 연안 이씨 가문이다. 이외에도 이숭녕李崇寧(국문학자), 이항녕李恒寧(법학자) 등이 학자로 이름이 높으며, 경제인으로는 홍익대 설립자인 이도영李道榮, 이연李然(동원탄좌 회장), 이봉녕李奉寧(쌍방울 회장) 등이 있다. 정관계 인사로는 이중재李重宰(전 재무부 장관), 이웅희李雄熙(전 문화공보부 장관), 이치호李致浩(전 국회의원), 이돈희李敦熙(전 교육부장관)가 있다. 또한 탤런트 이덕화李德華도 연안 이씨 인물이다.

한산韓山 이씨


한산 이씨에는 한 뿌리에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가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하지만 이와 다른 권지공계權知公系에서는 시조를 이윤우李允佑로 내세우고 있다. 이윤우는 고려 시대에 문과에 올라 권지문하사사權知門下司事 혹은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 이윤경과 이윤우에 대해 두 사람이 형제였다는 주장이 있고(권지공계),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호장공계).

호장공계의 시조 이윤경은 한산 지방에 토착하여 세거해온 호족豪族의 후예이다. 이윤경이 한산 지방(현재 충남 서천의 옛 지명)의 호장을 역임했다는 것은 한산 지방의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집안은 이때부터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해 오면서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한산 이씨의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그는 1320년(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다. 원의 벼슬은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에 오르고, 고려에서의 벼슬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정했다. 이색 이후 호장공계의 한산 이씨는 조선조에서 유력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 가문이 되었다.

한편 이와는 다른 권지공계(시조 이윤우)는 4세손 이무李茂가 충렬왕 때 사설직장司設直長이 되고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으로 공을 세워 대호군大護軍에 오르고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에 이르러 한주군韓州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한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주요 인물
한산 이씨는 이곡, 이색 부자에 이르러서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이곡의 아들 이색은 고려 말 길재, 정몽주 등과 함께 삼은三隱 중의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征堂文學을 거쳐 58세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원의 국자감에 유학하면서 중국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특히 주자朱子와 정자程子의 새 유학 이론에 심취하여 성리학性理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선의 개국 세력에게 이색이 밀려나자, 그의 아들들은 비명에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이성계가 민심 수습을 위해 그를 한산백韓山白에 봉하고, 그의 아들들도 복관되었다. 이색의 후손은 태종 조에서 복권된 후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또한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진 토정 이지함도 한산 이씨 인물이다.

이지함의 조카는 북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이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윤현尹晛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 때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하지만 명문 가문으로 이름을 떨친 한산 이씨에서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가문이 위태로웠던 때가 없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참형을 당한 이개李塏이다. 그는 목은牧隱의 증손으로 일찍부터 시문에 뛰어나 세종 18년 문과에 급제했고, 뒤에 중시重試를 거쳐 호당湖堂에 뽑히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 복위를 꿈꾸다 사형을 당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몰살당하는 화를 입었다. 그 후 정조 때 사육신이 복위, 복관되기 전까지 역적으로 취급되어야 했다. 한산 이씨는 조선조에서 재상만 4명, 대제학 3명, 청백리 6명, 공신 12명을 냈고, 과거(문과) 급제자만도 198명으로 이씨 중에서는 전주 이씨와 연안 이씨 다음이다.

근현대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를 들 수 있다. 이상재 외에 근·현대 한산 이씨 인물 중에서는 학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이훈구(성균관대 총장), 이헌구(이화여대 교수), 이현복(서울대 언어학과 교수) 등이 한산 이씨 문중이며, 법조계에는 이일규(전 대법원장), 이영복(판사), 이상원(판사) 등이, 재계에는 이우복(전 대우그룹 부회장), 이선규(동성제약 창업주), 이수복(아시아중석 회장), 이관직(대성고무 사장), 이준원(풍림산업 회장), 이영직(동서산업 사장) 등이 있다. 또한 언론계에는 이관구(전 합동통신, 서울신문 사장), 이긍규(기자협회장 역임)가, 관계에는 이훈구(제헌의원), 이진복(전 체신부차관), 이태현(전 농진청장) 등이 있다.

전의全義 이씨


전의全義 이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 공신 이도李棹로 알려져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원래 이름은 치齒였다고 하며, 그의 집안은 금강 어귀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러 5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게 되었다. 왕건의 군대가 금강에 도착했을 때, 홍수로 강물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뱃사공을 하고 있던 치 등이 선박 수백 척을 동원하여 왕건의 군대를 무사히 건네주었다고 한다.

견훤의 군사는 홍수로 왕건의 군사가 건너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비책을 전혀 세우고 있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왕건의 군대가 들이닥쳐 대패하고 말았다. 견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왕건은 이를 도와준 치에게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통합삼한삼중대광대사익찬공신統合三韓三重大匡大師翊贊功臣’으로 벼슬을 내리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했다. 그 후 전의 이씨 일족은 지금의 연기군 전의면 이성산李城山 아래에서 세거하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전의全義로 정한 것이다. 일부 예안 지방으로 세거하게 된 전의 이씨 일족은 예안 이씨로 분관을 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다시 통합하여 전의예안全義禮安 이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파와 가훈
이도 이후 전의 이씨는 그의 7세손인 이천李仟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 천은 고려 고종 때 장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이자원李子源이고, 둘째가 이혼李混이며, 셋째가 이자화李子華이다. 이들 세 아들은 전의 이씨 문중의 3대 인맥을 이루고 있으며, 각 파에서는 이들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직문한서直文翰書를 역임하고 대사성에 증직贈職된 장남 자원子源은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의 파조이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한 3남 자화子華는 선부전서공파選部典書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한편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차남 문장공文莊公 혼混은 문장공파文莊公派의 파조가 되었고, 그 손자로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익翊은 예안군禮安君으로 봉군封君되어 그 군호君號를 따라 전의全義에서 예안禮安으로 이적移籍하여 예안禮安 이씨의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전의 이씨는 이들 3개 파에서 다시 5세손에 이르러 45개 파로 나누어진다. 백파伯派인 대사성공大司成公 자원의 5세손에서는 18개 파가 생겨나고, 중파仲派인 문장공파文莊公派에서는 2개 파가, 계파季派인 전서공파典書公派에서는 25개 파가 생겨났다.

이정간李貞幹은 천仟의 현손이며 언충彦沖의 재종손으로, 세종世宗 때 강원도 관찰사를 재임하였다. 하지만 노모 봉양이 힘들자 관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또 나이 80세였을 때 100세인 노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였다고 한다. 이를 전해 들은 세종이 그의 벼슬을 정2품으로 올리고 사연賜筵과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세종이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이라는 어필御筆을 내렸는데, 전의 이씨 문중에서는 이 문구를 가훈으로 전하고 있다. 전의 이씨는 우리나라의 주요 문벌로 이름을 떨쳤는데, 조선에서만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 공신 6명을 배출하였다.

근현대 인물
전의 이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이한응李漢應을 꼽을 수 있다. 이한응은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되자, 그 치욕과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해 임지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이철승李哲承은 학생 운동가이자 정치인, 시민 사회단체인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반일 학생운동과 학도병 거부 등으로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다. 광복 직후에는 우익학생운동을 전개했으며, 김구·김성수 등을 도와 학생 반탁 집회를 주관하였다. 이 외에도 정관계에는 이윤호(전 지식경제부 장관), 이상희(전 국방부 장관), 이종근(국회의원) 등이 있으며, 학계에는 이극로(한글학자), 이희승(학술원 회원) 등이 있다. 경제인으로는 이기형(인터파크 회장), 연예인으로는 이문세(가수), 이원종(탤런트), 이정웅(탤런트), 이경실(개그우먼), 그리고 이응로(화백), 이현세(화백) 등이 전의 이씨 인물들이다.

합천陜川 이씨


합천陜川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된 성씨이다. 합천 이씨의 시조는 이개李開라는 사람으로, 고려 초에 합천호장陜川戶長을 지낸 사람이다. 합천 이씨에서 펴낸 「임술보壬戌譜」의 ‘중시조사적中始祖事蹟’에 따르면, 이개는 경주 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39세손으로 유구국琉球國 20만 대군이 신라를 침입했을 때 단독으로 적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물리쳤다고 하며, 이 공으로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또한 ‘문충공사적기文忠公事蹟記’에는 그가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문인으로 유학의 진흥에 힘써 그 공으로 강양군에 봉해졌으며, 박경엽朴敬燁의 난을 토평하고 다시 문학을 진흥시켜 중국에 버금가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분파와 주요 인물
하지만 유구국에서 20만 대군이 침입했다는 것은 역사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위의 기록은 합천 이씨 세보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첨삭이 가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합천 이씨에서는 시조 표암공 이알평으로부터 경주 이씨의 중시조 소판공 이거명, 그리고 합천 이씨의 시조 문충공 이개까지의 계대를 밝히고 있는데, 이 역시 역사적 실증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러한 일부 기록의 문제로 인해 합천 이씨를 경주 이씨에서 분적된 성씨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논란이 있다.

합천 이씨 측에서는 이알평의 후손 중에서 33세 기와 위로 양분될 때 나뉘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알평의 후손 중에서 33세에 이르러 첫째 기의 후손으로 경주 이씨의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이 있으며, 둘째 위의 후손에서 39세에 이르러 강양군 이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합천 이씨 문중의 주장이나 신라 하대에 존재한 이씨가 표암공 이알평의 후손일 것이라는 추측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합천 이씨를 경주 이씨에서 분적한 성씨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합천 이씨는 세계가 매우 복잡하여 15개 파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전서공파典書公派가 가장 번창하였다. 그밖에 목사공파牧使公派, 참지공파參知公派,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 등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합천陜川 이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불교계의 거장인 성철 스님(이영주)과 정치계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꼽을 수 있다. 이외에 정관계에서 이희성(예비역육군대장, 전 교통부장관), 이상희(전 대구광역시장, 전 내무부장관) 등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이도선(교보문고 대표이사), 이중경(삼양제지공업 대표이사), 이영근(정화건설 대표), 이대봉(동아항공화물 대표이사) 등이 있다. 또한 문화계 인물로는 이대엽(영화배우, 전 국회의원), 이병주(작가), 이만기(씨름선수) 등이 있다.



동방의 아들 노자老子 이이李耳
노자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사마천의『사기』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이다. 노자의 신원에 대해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이, 자는 담이다[姓李氏, 名耳, 字聃]”라고 기록하였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의 여향厲鄕 사람으로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관리였는데,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물었다고 한다. 노자가 함곡관函谷關[중국 허난성(河南省) 북서부에 있어 동쪽의 중원中原으로부터 서쪽의 관중關中(陝西)으로 통하는 관문關門]을 지나면서 써 준 ‘자기동래紫氣東來’ 문구는 동방 천자 문화의 종주가 동방 고조선인임을 천명한 역사적인 명문이다. 노자의 혈통에 대해 『환단고기』와 『신교총화』에서는 노자는 원래 동방의 시원 족속인 풍이족 출신으로 한韓씨인데 나중에 ‘동방의 아들(李=木+子)’이란 뜻으로 이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것은 노자가 본래 동방 신교 문명의 정통을 계승한 자랑스러운 한민족임을 암시한다.

癸未(계미)에 魯人孔丘(노인공구)가 適周(적주)하야
問禮於老子李耳(문례어노자이이)하니
耳父(이부)의 姓(성)은 韓(한)이오 名(명)은 乾(건)이니
其先(기선)은 風人(풍인)이라. 後(후)에 西出關(서출관)하야
內蒙古而轉至阿踰佗(내몸고이전지아유타)하야
以化其民(이화기민)하니라.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계미(단기 1816, BCE 518)년에 노나라 사람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이고 이름이 건乾인데, 선조는 풍이족 사람(風人)이다. 노자는 후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를 경유하여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아유타阿踰佗에 이르러 그곳 백성을 교화하였다.


육룡이 나르샤, 조선 건국의 토대
「태조실록太祖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의하면, 이한李翰은 자연自延을 낳고, 자연은 천상天祥을 낳았다. 그 뒤 대가 이어져 안사安社(뒤에 목조穆祖로 추존)-행리行里(뒤에 익조翼祖로 추존)-춘椿(뒤에 도조度祖로 추존)-자춘子春(뒤에 환조桓祖로 추존)-성계成桂로 이어졌다. 이성계는 즉위 후 4대조인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부터 목조穆祖로 추존했다. 제후는 4대 조를 추존한다는 원칙 때문만이 아니라 이안사가 건국의 기틀을 놓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 3장은 “우리 시조가 경흥慶興에 살으샤 왕업王業을 여시니”라고 하여 이안사가 왕업을 열었다고 노래했다. ‘용비어천가’ 1장이 “해동 육룡六龍 날으사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인데, 육룡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을 뜻한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안사는 전주에 있을 때 관기官妓를 두고 지주知州(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과 다툼이 생겨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얼마 뒤, 이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다. 이에 해로를 거슬러 올라가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 때 의주 북쪽 100여 리 되는 쌍성(지금의 영흥)에 원의 장수 산길散吉이 주둔하고 있었다. 산길은 점차 세력이 확장되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회유했고 이안사는 백성 천여 호를 이끌고 원나라에 투항했다. 투항한 이안사는 두만강변의 경흥부 알동에서 살았는데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지방관직을 겸하였다. ‘용비어천가’ 4장은 이에 대해 “야인野人 사이에 가사 야인이 가래거늘(해롭게 함) 덕원德源 옮으심도 하늘 뜻이시니…”라고 묘사해 이안사의 잦은 이주가 건국의 천명에 따른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결과적으로 이안사가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것이 조선 개국의 터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안사의 원나라 관직은 원 세조 12년(1275, 충렬왕 1년) 이행리李行里(익조)가 이어받는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협력하기도 하는 이행리는 ‘고려사절요’ 충렬왕 7년(1281)조에 따르면 개경에 와서 충렬왕을 알현했다고 전한다.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李子春(환조)에게는 형 자흥子興이 있었으므로 집안의 종통을 잇기는 어려웠다. 이행리의 아들 이춘李椿(도조)이 원 순제 지정至正 2년(1342) 7월에 죽고 이춘의 장남 자흥도 그해 9월 죽자 원나라는 자흥의 아들 천주天柱가 어리다는 이유로 임시로 숙부 이자춘에게 관직을 이어받게 했다. 이때 이춘의 계처繼妻(아내가 죽은 후 맞은 아내)인 쌍성총관雙城摠管의 딸 조씨趙氏가 이자춘의 관직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려고 하는데 이자춘이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종통의 지위를 굳혔다. 그래서 ‘용비어천가’ 8장에서 “세자(환조)를 하늘이 가리사 제명帝命(원 황제의 명)이 나리시어 성자聖子를 내셨나이다.”며 장자長子가 아닌 이자춘이 종통을 이은 것을 하늘의 간택과 원나라 황제의 명령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천호千戶 자리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이자춘은 곧 원나라의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다. 이 무렵 중원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 원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공민왕은 북강회수운동北疆回收運動을 일으키는데 이자춘이 여기에 가담한다. 공민왕 5년(1356) 고려가 99년 만에 동북면 지역을 회수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면서 이자춘 일가는 부원附元 세력이란 꼬리표를 떼게 된다. 공민왕은 이자춘을 태중대부사복경太中大夫司僕卿으로 올리고 집 한 채를 하사하는데, 이때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인다. 「태조실록」은 이성계가 공민왕 앞에서 격구擊毬(말을 타고 공채로 공을 치던 경기)를 하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활약을 펼쳤다고 전한다. 공민왕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만 21세의 격구 천재가 36년 후 고려를 멸망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중앙일보 2010년 8월 22일자 참조)


묘제를 함께 지내는 광주 이씨와 영천 최씨
광주 이씨와 영천永川 최씨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墓祭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다. 이집과 최원도의 아름다운 우정을 소개한다. 사간 최원도는 이집과 과거 동문으로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낙향하여 고향인 경상도 영천 땅에서 살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이집 또한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걱정이 되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집은 어느 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 경상도 영천 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다. 몇 달 만에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날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데 친구 최원도가 소식을 듣고 문간방으로 뛰어나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 이집을 향해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크게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 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매우 난처해하며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최원도는 더욱 격노하면서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게 하였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방을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불태워 버렸다.

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르게 가만히 숨어들어 길옆 짚 덤불에 몸을 숨기고 하룻밤을 쉬고 있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 사람들 모르게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둡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 보다가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는데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러 달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몸종이 하도 궁금하여 하루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남편에게 어찌된 연고인가를 물었다. 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밀을 엄수할 것을 다짐받았고, 만약에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만에 하나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느끼게 된 노비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했다. 그 몸종의 이름은 ‘제비’라 하였고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연을 알게 된 최원도와 이집의 후손들이 그 몸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 주고 ‘연아燕娥의 묘’라고 묘비를 세워 주었다. 지금도 이집의 아버지 묘 아래 인근에 최원도의 몸종 ‘제비’의 묘소가 있으며 양쪽 집안 조상의 묘제 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 주고 있다.

몸종이 자결한 후 얼마 안 되어 이집의 아버지가 최원도의 다락방에서 돌아가셨는데 이때 최원도는 자기의 수의를 내주어 정성껏 염습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경상도 영천에 지금도 있는 광주 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다락방 생활 4년 만에 중 신돈이 척살을 당하고 세상이 변하게 되어 나라에서 이집과 최원도를 중용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생사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그 후손들 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조선 왕조 선조 때 한음 이덕형 선생이 잠시 경상도 도체찰사를 겸직한 일이 있었고 이때 조상을 구해 준 최씨 가문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위토를 마련해 주고 양가의 후손들이 대대로 두 어른의 제사를 함께 모시도록 일렀는데 이 관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