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로 지킨 가정도방(성남태평도장 서준민, 이영미 도생)

[가가도장]

우리의 신앙은 현재의 삶 속에 있다. 이는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모든 진리의 속성에 해당하는 상식이다. 아무리 진리가 훌륭하고 거룩해도 세상 속에서 펼쳐 보이고 손잡아 건져 낼 대상이 없다면 그 진리는 의미가 없다. 역으로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와 장벽을 신앙의 범주와 권능으로 풀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되고 유용한 진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 생활도 개인적인 영역이 있는가 하면 결혼으로 형성된 가정의 영역이 병존하고, 생계유지를 위한 직업 활동의 범주도 기 언급한 양자와 관계를 맺고 움직여 간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우여곡절과 가족 구성원 간에 벌어지는 갈등과 애증의 문제는 결국 현실적 존재인 도생들도 똑같이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 자체가 천층만층이므로 여기서 파생되는 인간관계 및 물질과 정신의 소통 또한 그 층차가 생기고 다양한 변화를 보이기 마련이다. 이 변화의 양상과 가치 충돌의 현실 문제들에 대해 얼마나 신앙의 틀로 소화하고 순화하며 해결할 수 있는가, 이것이 상제님 신앙인들이 직면한 당면 과제요 도력의 시험대라 말할 수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성남태평도장 서준민(남, 46, 종감), 이영미(여, 41, 교무녹사장) 부부 도생의 이야기다. 이 도생들은 원숙기에 접어든 40대의 부부로서 소년기에 생사의 위기를 체험했거나 함께하는 가족의 소중함을 절감하면서 진리의 근본에 눈을 떴고, 직간접적인 탐구의 여정을 거쳐 상제님의 무극대도에 진입을 했다. 입도 이후에는 증산도의 진리 이념을 자신과 가정에 투영시켜 생활화하고자 노력하는 한편으로, 직장에서의 여러 고충과 가족 관계에서 벌어진 원망과 미움의 문제를 진리의 틀 속에서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는 힘을 보여 주었다. 이들이 영위해 가는 평범하지만 색다른 생활 속 신앙 이야기를 차분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어 주시기 바란다.

지난 6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취재진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소재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1층에 있는 가정도장에 들어서니 서준민, 이영미 도생 부부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여덟 살 된 딸 지오와 다섯 살배기 아들 지민이와도 쑥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주방과 통하는 거실 한쪽 벽면에 모셔져 있는 천신단은 상단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 태상종도사님 존영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바로 밑 중앙에는 조상선령신위가 배치되어 있다. 아래쪽 단에는 순백색의 청수그릇이 가족 수대로 놓여 있는데, 청수그릇에는 아빠, 엄마 등 소유자의 이름이 깜찍하게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색깔이 다른 굵은 양초들이 몇 개 놓여 있는데 그 표면에는 ‘약은 곧 태을주니라’, ‘사랑하는 우리 가족’ 등의 글귀가 아이의 손글씨체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애정 어린 도방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소품인 셈이다. 취재진은 두 부부 도생과 거실에 마주 앉아 신앙의 배경과 출발 및 현실 문제의 해소 사례 등 생활 속의 신앙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보았다.


진리로 다가서는 삶의 단편들


생사의 위기에서 근본을 고민하고
서준민 도생은 서울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량아로 출생한 서 도생은 집안 살림이 그리 넉넉치 않아 외가에서 생활하기도 했으나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하는 활달한 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장 파열로 수술을 하게 되면서 생명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 환영을 보는 등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서 도생은 이걸 이겨 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강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건강 문제는 이전에 무탈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고민을 안겨 주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불안을 떨치고 무언가 의식을 하나로 모을 대상이 필요했던 그는 공부에 집중하는 것으로 활로를 찾았다. 모범생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고 보다 근원적인 삶의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수행과 진리 추구로 만난 인연
서 도생은 1991년도 대학 입학과 동시에 단을 포함한 상고사 서적 그리고 정신 수양 관련 서적을 여러 가지 읽다가 우연한 계기에 『한민족과 증산도』 책도 접하게 되었다. 건국대학교 증산도 동아리방이 당시 학교 운동장 아래 스탠드에 있어서 자주 볼 수 있었고, 학생회관 앞에서도 당시 포교 활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대순진리회도 상당한 세를 확장하던 시절이라 결국 서 도생은 1993년부터 2년 동안 대순진리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전혀 해소할 수 없는 단체라는 것과 학생에게 무리한 천도식을 계속 강요하고 불고가사 문화를 강조하는 행태를 보며 거부감이 들었다고 했다. 이후 1997년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수행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관련 서적도 틈틈이 읽으면서 호흡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시점에 또다시 대순에서 연락이 왔고, 그들이 천도식 이야기를 꺼내자 완전히 정리를 하고 관계를 끊었다. 이후에는 아버지 병원비와 자신의 학비로 인한 빚을 갚기 위해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진리 추구에 대한 열망은 점점 식어 갔다고 한다. 서 도생은 2002년 4월 분당에 있는 엔지니어링 회사로 이직을 하였고, 2003년 겨울 무렵에 당시 취미로 하고 있던 산악자전거와 관련하여 직거래로 관련 물품을 거래하기로 하고 서울 강남에 있는 교보문고 앞으로 나갔다. 약속보다 이르게 도착한 그는 잠시 남는 시간을 이용해 서점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이것이 개벽이다(상)』 책이 눈에 들어와 바로 구입을 하였고, 집에 돌아와 단숨에 반을 읽고서 서적 뒤에 나와 있는 도장 연락처를 확인하여 전화 상담을 했다. 결국 약속을 하고 도장에 방문하게 되었고, 도장에 들어선 순간 성전에 모셔진 국조3신을 보고 “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느낌이 확신으로 굳어지면서 서 도생은 입문을 거쳐 134년 2월에 드디어 입도를 하였다.

혼자만의 세계가 있는 아이
한편 충북 음성에서 1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난 이영미 도생은 어린 시절에 대해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고 했다. 다만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 도생은 아주 어릴 때 혼자만의 세계가 있는 아이였다고 한다. 가족들 모두 여동생을 잃어버려 찾고 있는데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흙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도생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대범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학창 시절 내내 지속되었던 성향이기도 했다. 이 도생은 집안의 크고 작은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늘 마음속에서 음악이 울려 나왔다고 했다. 처음엔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왜 마음속에서 노래가 나올까 이상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그게 걱정할 일이 아니며 결국 해결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임을 스스로 깨달았다고 했다.

이 도생은 유년 시절 부모님의 다툼과 별거로 인해 수원에서 친할머니와의 생활을 거쳤고 이후 초등학교부터는 다시 어머니랑 같이 성남에서 살게 되었다. 이 도생은 어렸을 그 시절엔 그저 조용한 아이였고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고 했다.

하지만 3학년부터인가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고 일요일이면 도서관엘 다녔으며,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열렸을 때는 욕심 많은 아이로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감이 없고 다소 민감한 정서를 지닌 아이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과 그 과정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한 마디 원망의 말들이 학창 시절을 넘어 사회생활을 할 때까지도 귀에서 울렸을 정도였다.

어머니께선 아버지와 시댁에 강한 불만이 있었지만, 이 도생에게는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학원도 보내 주셨고, 고등학교 시험 기간에 시험이 일찍 끝나고 만화방에 간다고 하면 그냥 믿고서 아무 말 없이 돈을 주셨다.

함께하는 기도에 감동해 세례를 받다
고2 때는 고1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따라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다. 친구네는 그 어머니의 신앙심이 커서 큰언니가 수녀였던 집안이었다. 그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저녁 9시가 되면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아 세례를 받기로 했는데, 이 도생의 세례명은 하필이면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표이자 신학의 대가로 불리는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이름이 너무 장대해서 수녀님이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고 나중에는 신부님이 바꾸라고도 했지만 결국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후로 미사에 참석할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이 넘쳐 났고 그로 인해 자꾸만 마음이 멀어지다가 대학교 때 증산도를 만난 이후로는 가지 않게 되었다. 천주교 세례를 받을 당시 친구가 자기 어머니께 대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영이 밝으셨던 친구 어머니께선 그때 “얘는 천주교 신앙을 할 애가 아니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기도 했다.

미륵부처님과 입도 그리고 결혼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이 도생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이가 갑자기 흔들리고 결벽증처럼 손도 자주 씻게 되는 등 몸은 느끼지만 의식은 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마침내 이런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이 도생은 어머니께 여름 방학 때 조용한 데 가서 쉬고 싶다고 했고, 요청이 받아들여져 월악산에 있는 작은 절에서 한 달을 지내게 되었다. 그곳은 미륵부처님이 높이 서 계신 곳이었는데, 새벽 3시부터 수행하는 수행스님이 계셨고 야외에 있는 미륵부처상 앞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와서 절을 하곤 했다. 이 도생은 그곳의 스님에게서 호흡법을 배웠고, 미륵부처님 앞에서 일천 배에 도전하기도 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서도 배운 호흡법을 계속했고 하단전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체계적이고 꾸준한 영적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은 호흡법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꿈속에서 만난 삿된 신명에게 기운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고, 다시 호흡을 했을 때는 쉽게 기운이 채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 도생은 1995년 대학교에 입학했고, 입학과 동시에 동아리를 찾다가 교내 소강연회를 통해 증산도를 만났다. 음양과 오행을 주제로 한 강연을 듣고, 그날 바로 동아리에 가입했고, 이후 도방에서 꾸준히 태을주 수행을 했는데 절에서의 체험 때문인지 수행을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 도생은 1995년 3월에 무사히 입도를 하게 되었다.

서 도생과 이 도생은 도장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 도생은 대학 졸업 후 거주지인 성남으로 돌아와 성남태평도장에서 신앙하고 있었고, 134년 입도한 서 도생과는 몇 년을 같은 도장에서 신앙을 하면서 친밀해졌다. 두 사람은 2009년 1월 정식으로 만나기 시작해 그해 6월 결혼을 했다. 당시 도장에서 상주하던 한 도생은 1년 전에 이미 두 도생이 맺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현재 두 도생의 슬하에는 입도를 한 8세의 딸 서지오와 입문 상태의 5세 된 아들 서지민이 함께 가족신앙을 하고 있다.

마음을 열고 바라본 신앙, 그리고 도장


신앙 초기의 난관과 소망
입도 이후 신앙이 안정 궤도에 정착되기까지 두 도생은 각기 나름대로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쳤다. 서 도생은 입도 직후 소위 초발심의 힘으로 직장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하는 데 무리가 전혀 없었고, 새벽 수행도 꾸준히 했다. 특히 직장을 마치고 도장에서 저녁 수행을 하는 시간은 정말 편안한 느낌이었고, 가끔 기지신 쪽에서 주문을 합송하는 소리를 들었던 체험도 있었다고 한다. 서 도생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천주교 신앙을 하시는 어머니의 신앙 반대였고, 당시 가장 부러웠던 점은 진리 서적을 책장에 당당히 보여 주고 청수를 모시는 선배 신앙인 집에서 가정 치성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선배 신앙인의 가정신앙 모습이 촉매가 되어 서 도생은 막연하지만 가정신앙의 소망을 품고서 신앙을 했다고 한다.

젊은 열정으로 쌓은 신앙의 추억
신앙이 더 오래된 이 도생은 신앙하면서 겪은 어려운 일들이 선뜻 생각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만 신앙을 시작한 처음 몇 년간 가족들, 특히 부모님의 반응에 이런 저런 상처를 받은 기억은 있다고 했다. 수행을 좋아했던 이 도생은 입도 전후 학교에 가는 날이면 늘 수행을 했다. 그리고 가까이서 늘 챙겨 주던 선배 언니들에 대한 좋은 애정과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다. 막내 노릇을 하며 이런저런 진리에 관한 질문을 생각 없이 뱉어 내도 별다른 타박 없이 받아 주던 언니들의 다정함과 애정이 지금도 그립다며 미소를 지었다.

입도하고 늘 선배 언니들을 만나면서 이 도생은 당시 한창 왕성했던 대포 모임에서도 활동을 했다. 입도 후 몇 개월 뒤 남영도장이 개창됐고, 이후 1년간 도장에서 상주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상주 시 신경을 쓴 것도 역시 수행이었다. 밤 10시 전후로 하루 2~3시간씩 수행을 했고, 머리가 열리는 체험도 했다. 걸어 다니면서도 머리에 서늘한 기둥이 서 있는 느낌이 한동안 신기했다. 수행이 진전되자 마음 자세도 달라졌다. 즉흥적으로 말을 내뱉고 행동하던 게 그냥 자연스럽게 조절이 되고, 부모님께도 자연스런 존대가 되었다. 남영도장 개창치성을 할 때는 태상종도사님께서 친히 왕림해서 축하해 주셨는데, 당시 종도사님께서는 함께 오시지 못했다. 그런데 자고 있을 때 갑자기 누가 깨우며 “사부님께서 오셨어”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얼른 일어나 문밖에 서 계신 사부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아침에 일어나서도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혼동이 와서 언니들에게 이야기를 할 정도로 실감나는 체험이었다고 했다.

힘든 사회생활에 위로가 된 도장
대학을 졸업한 후 이 도생은 중국에서 1년 연수를 하고 2001년 성남의 한 중견 기업에 취직했다. 당시는 IMF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취업이 금방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는 몇 달 동안 초조함이 짙어졌을 때 도장에서 수행을 하고 우연히 가게 된 취업박람회에서 그 회사를 만나게 되었다. 회사는 브랜드 가방의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 생산 공장이었는데, 이 도생은 해외 자재 구매와 소싱을 담당했다. 첫 월급으로 조상님들 천도식을 올려 드렸고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많은 일로 늘 야근이 생활화되다 보니 지치고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늘 도장에 가면 포근하고 편안했다고 이 도생은 기억한다. 단 얼마라도 깎아야 하고 업무에 대한 성과가 최우선인 회사와 달리, 도장에선 늘 태상종도사님께서 세상 그 누구도 하지 않는 말씀을 내려 주셨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착하게 살아라.”...

태사부님의 말씀 한마디에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던 이 도생은 그래서 졸려도 도장 치성에 와서 졸았고 너무 피곤하면 누워서라도 도공을 했다. 신앙이 그 자체로 즐겁고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천지부모께 쏟아 낸 넋누리
그렇게 직장 생활이 1년이 넘었을 즈음, 발에서 땀이 계속 나고 얼굴에 검은 여드름 같은 것들이 나기 시작했다. 야근하려고 앉아 있으면 아랫배도 차가워졌다. 일이 재미있고 즐거워서 미처 몸을 돌보지 않았던 결과가 드러난 현상이었다. 이때 이를 지켜보시던 어머니께 도장에서 상주하며 21일을 수행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수행을 하며 아픈 걸 치료하겠다는 딸에게 어머니는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정말로 그 21일 안에 얼굴에 났던 검은 흔적들이 모두 사라졌다. 늦게 퇴근해 잠깐 사배심고만 하고 졸면서 도장 뒤편에 앉아 상제님 태모님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도 일어난 일이었다. 이 도생은 당시 상제님 태모님께 많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들으시는지 안 들으시는지 신경도 안 쓰고 자신이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살아온 게 기억나면 말씀드리다 울기도 했다고 한다. 조금은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상제님 태모님께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토로하고 위로를 받는 모습은 부모와 자식 간의 온정어린 소통과 결코 다르지 않다. 소탈하고 순수한 그 마음을 천지 부모님은 백번이라도 이해하고 따뜻한 위로를 주셨으리라. 상제님 태모님이 계신 도장이 너무 좋았던 이 도생은 약속한 21일이 끝나고도 다시 상주를 시도했으나 여러 여건이 적합하지 않아 뜻을 접어야 했다.

상제님 신앙이 자랑스러웠던 이유
이 도생은 이후 2년 반 정도 중국과 베트남에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도장은 가지 못했지만, 상제님 태모님과는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휩쓸리듯 도정에 따라가느라 증산도를 크게 바라보지 못했는데, 한국 밖에서는 증산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증산도 진리의 거대함과 그 속에 담긴 새 시대 생활 문화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바라보면서 자신이 상제님 신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귀국 후에는 당시 야탑도장 근처로 회사를 옮겼다. 점심 때가 되면 시간을 내서 도장에 나가 수행도 하고 쉬다 나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이 도생은 그냥 도장이 좋다고 말한다. 도장에 흐르는 그 편안함과 포근함이 늘 위로해 주고 감싸 주는 힘이 있다고 말하는 이 도생은 천생 상제님 진리와 도장의 열성 팬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 도생은 결혼을 하고서는 직장 생활 스트레스로 아이가 생기지 않아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후 큰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걷고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직장 생활을 다시 하고 싶어 일을 찾다가 우울증에 빠졌다. 아이 키우는 엄마가 아이 어린이집 시간에 맞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효능감이 떨어졌을 때, 현재 하고 있는 성남시 공식 블로그 기자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집밖으로 오랜만에 나가 다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작지만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도방은 가정의 존귀함을 담은 보은의 터전


가정도장이 지닌 가치와 애정
두 도생의 보금자리인 가정에 도장을 마련하고 함께 일관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 도생은 가정도장이 지닌 가치를 무척 중시하고 있다. 그는 결혼 전 도장에서 같은 구역이었던 이 도생과 수행 및 전단지 홍보 포교를 함께 하면서 많이 가까워지게 되었고, 결혼을 한 지금도 가정도장에서 언제나 아내와 함께 하는 수행이 좋다고 말한다. 특히 서 도생은 신혼 여행지에서 이 도생과 청수를 함께 모시던 아름다운 기억과 신혼 시절 함께 아침 청수를 모시고 출근 전 집에서 수행을 먼저 하자고 하던 아내 이 도생의 모습에서 역시 신앙 선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내를 향한 훈훈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보은하고 결실하는 건강한 가정을 만들 것
이 도생에게 가가도장을 마련한 시기를 물었다. 천신단과 관련하여 이 도생은 결혼 후에도 부부 신앙인으로 늘 도장에 다녔고 집에서도 청수를 모셨지만, 초기에는 반듯한 신단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재작년 무렵 가정도장 천신단에 대해 강조하신 종도사님의 말씀을 듣고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규모에 맞는 가정 신단을 조성하였다. 또한 여러 여건상 가정도장에서 집중적인 수행을 하기는 어려운 편이라 생활 속에서 또는 늘 마음속으로 주문을 읽고 다니면서 주송의 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잠시 잊고 있다가도 집에서 태을주 소리를 들으면 본능적으로 다시 읽게 되고, 아이들도 매일 틀어 놓는 주문 소리에 저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도생이 고등학교 때 천주교 신앙을 한 것은 가족 신앙을 하는 친구와 그 가족의 모습이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늘 저녁 9시가 되면 형제들이 둘러앉아 기도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이 도생의 가정도장에서는 아직 다 같이 기도하고 수행하는 시간은 드물지만, 반드시 그런 모습의 경건한 도방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 도생은 가가도장의 장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진정한 상생의 세상을 펼칠 수 있는 상제님 진리를 바탕으로, 아이들과 저희 부부가 하나 되어 천지일월 사체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받은 참 생명의 은혜,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받은 수많은 은혜에 보답하는 가족이 되겠습니다. 천지 보은하는 가족, 천지 결실하는 가족이 되겠습니다. 말이 조금 거창하지만, 무엇보다 모든 것의 근본은 가정입니다. 그래서 상제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가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펼쳐진 진리 홍보의 정성


수행과 정성으로 활동에 임하고
이들 부부는 홍보 포교 활동에도 성심을 다해 임하고 있다. 서 도생은 자녀가 생기면서 아내는 육아에, 자신은 직장 생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여건이 되었지만 일요치성 후 야탑역에서 아장아장 걷는 딸과 함께했던 홍보 포교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 도생은 아이를 키우면서 야탑역이나 남한산성에서 가끔 도장 차원의 홍보 활동을 나갔는데, 이상하게도 사이좋은 부부들이 대상자가 되는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정성이 온전히 미치지 못해 수렴하진 못했지만, 여건이 갖추어지면 꼭 성공으로 이끌 기운이 남아 있다며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수행을 매일 할 때는 6임을 거의 짠 적이 있었고, 그때는 꺼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실려 입도를 시켰던 기억이 있다면서, 지금은 상황이 미치지 못해 뭔가 부족함을 느끼지만 수행과 정성의 힘을 믿고 있다고 했다. 적어도 이 도생 스스로가 좋았던 성공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만큼, 작심하고 나서는 기회가 마련되면 사람을 살려 내는 일에 가속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신앙과 도장 문화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좋아하며, 일꾼으로서 필요한 활동 또한 순수하게 즐길 줄 아는 마음가짐을 이 도생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호주 퍼스Perth에서의 개벽책 홍보
이 부부는 2015년 9월부터 2016년 10월 사이에 회사 업무로 가족과 함께 호주 퍼스Perth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1년 2개월의 체류 기간 동안 이 도생은 퍼스 지역 한인 잡지 PERPLE(Perth People)에 『다이제스트 개벽』 광고를 꾸준히 게재하였다. 해외에 사는 동포들에게도 증산도 진리를 알리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광고를 보고 교민 한 분이 연결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이 도생은 이렇게 해외에서 거리낌 없이 진리 홍보를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든든히 지원하고 받쳐 준 가족 신앙의 힘 덕분이라고 했다.

자연스런 생활 신앙, 세상을 향한 보은 신앙을 해야


도방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신앙 계획에 대해 물었다.

먼저 서 도생이 자신의 신앙 소회와 함께 바라는 바를 전했다.

“신앙이 같은 배우자를 만나 가족 신앙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큰 축복을 내려주시는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 그리고 조상신명님을 매일매일 가정에서 모실 수 있도록 가가도장의 기운을 열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올해는 초립동이 도수 덕분에 첫째 아이가 입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저의 초발심도 일으켜 세워 성남에 가가도장의 뿌리를 내리고 확장되길 소망합니다.”

이 도생은 가가도장의 운영과 안착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저희 가가도장은 아직 정식 도장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진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수행도 충분치 않고요, 포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 컨디션이 괜찮을 때, 아이들과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상제님 이야기도 하고, 책 이야기도 하고, 주문을 읽기도 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천부경도 외우게 했는데요, 신앙이 곧 생활인, 분리되지 않은 일상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밥 먹듯 자연스러운 신앙, 숨 쉬듯 당연한 신앙, 그러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 세상에 보은하는 저희 부부와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비롯해 저희 부모님들까지 가족들이 다 함께 신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망과 미움을 태을주로 치유하다
고부간의 갈등과 원망 이 시점에서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결혼 생활과 신앙의 상관관계로 옮아갔다. 이 도생은 결혼하고 어려웠던 점으로 이렇게 자기효능감이 떨어진 것, 아이들에 오롯이 집중해야 해서 자신만의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점, 부모님께 마음껏 아이들을 맡길 수 없었던 점, 시어머니와의 갈등 등을 들었다. 특히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처음으로 이 도생 자신이 집안에서 남이라는 걸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소위 말하는 고부간의 갈등에 대해 얘기를 듣는 게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솔직하고 담백한 이 도생의 성격상 오히려 자연스럽게 대담을 나누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신앙을 통해 반전을 시켰다는 점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얘깃거리로 바뀌고 말았다.

시어머니와의 이해의 폭을 좁히지 못한 채 긴장 관계에 놓여 있던 이 도생은 최근 1년간 설거지할 때도 빨래를 널 때도 길을 가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날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런 시어머니를 이해하라고 하시던 시외할머니도 더 이상 위로를 주지 않으셨기에 원망과 서운함에 몸도 마음도 괴로웠다고 했다.

태을주 덕분에 살았어요 그랬는데, 올해 1월이 되자 남편인 서 도생이 갑자기 카세트cassette를 찾더니 태을주 주문을 틀어 놓기 시작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잘 때도 주문이 흘러나오면서 그렇게 24시간 동안 늘 태을주를 듣게 되었다. 환경이 이렇게 바뀌자 이 도생은 어느 순간 생각이 전환되면서 이제 그만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도생은 깊이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한다. 결혼 후 제대로 수행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소리만 틀어 놓아도 어느 순간 마음이 바뀌다니, 이게 태을주가 지닌 조화의 힘이요 은덕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를 진정으로 위로할 방법을 남편이 찾았고, 그 방법이 지닌 조화와 진리의 힘이 아내의 마음을 치유한 것이다. 이후 몇 달이 되진 않았지만, 이 도생은 시어머니와 다시 왕래하고 있다. 다시 연락드렸을 때 상제님의 이 말씀이 이 도생의 머리를 맴돌았다.

“용서하는 덕이 크니라.”

여기서 어느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하는 선후 전말의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을 인사로 조화시켜 현실 문제를 끌러 낸 그 힘과 은덕이 값지고 존귀할 뿐이다.

이 경험으로 인해 이 도생은 상극의 감정이 얼마나 심한지, 왜 척신들이 원한을 갚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척신들도 불쌍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들도 자신처럼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며, 누군가를 미워하면 자신이 가장 괴로운 걸 알면서도 그 원한이 커서 본인들도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이다. 그 원한을 내려놓기 힘들어서 그보다는 파멸을 선택하고 보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들은 그래서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도생은 자신의 척신들, 그리고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척신들에게 많은 용서를 구했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부모님이나 조상님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이다. 그리고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원망과 미움의 기운이 하늘을 찌르는 경험을 했던 제가 태을주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이번 호 가가도장은 소탈하고 진솔한 신앙의 여정을 걸어 온 40대 부부 신앙인의 도방을 찾아가 그들이 가진 신앙의 심성과 생활 속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이들은 마음속에 줄곧 참된 진리를 찾는 방향타를 움켜쥔 채, 때로는 외로운 길을 걷기도 하고 때로는 당면한 난관을 헤쳐 나가기도 하면서 결국 상제님 진리에 안착을 했다.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심신의 충격과 세세한 고충들을 상제님과 태모님께 있는 그대로 아뢰고, 오직 신앙을 통해 활로를 찾아가는 단순한 정공법으로 신앙력을 유지하였으며, 가정도방에 사랑의 에너지 또한 충만히 채울 수 있었음을 확인했다.

특히 결혼 생활에서 벌어지기 쉬운 고부간의 갈등을 태을주의 조화 권능으로 말끔히 치유한 것은 ‘용서하는 덕이 크다’는 말씀의 경계를 넘어선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도방의 분위기를 바꾼 배려의 한 수가 “태을주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라는 독백을 우러나오게 하는 극적 방책이 되었다는 점은 신앙인으로서 우리 스스로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두 부부 도생은 신앙이 곧 생활인, 분리되지 않은 일상을 만들어 가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밥 먹고 숨 쉬듯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신앙을 기반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 보은의 결실을 맺겠다는 희망의 청사진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부는 무엇보다 소박한 성품과 복잡하지 않은 사고의 틀로 매우 유연하면서도 결정적인 매듭을 지을 줄 아는 도생들이다. 그래서 밝고 부드러우며 평범한 모습 속에 강한 신앙력이 잠재해 있음을 취재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그 잠재력과 저변의 강인한 신앙력을 바탕으로 이 부부의 도방이 생활 신앙과 일체인 가가도장의 모범이 될 수 있기를 기원드리며, 상제님과 태모님, 그리고 조상선령신의 빛나는 은총이 도방에 가득하시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