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오늘날의 철학_1. 다양하게 전개된 19세기의 철학적 사유

[철학산책]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道典』 2:30:8~10)


이성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전개된 인식론은 대륙의 합리론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진리인식이 감각적 경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경험론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진영에서 주장된 내용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이 그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선험적 관념론에서 꽃을 피운다.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에서 태동하여 헤겔의 절대관념론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룬다.

헤겔 이후 19세기 중반은 자연과학의 진보에 따른 기술혁명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시대의 사조 또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풍조로 바뀌어 갔고, 지성사에서는 관념론이 밀려나고 유물론(Materialism)이 철학의 권좌를 차지하여 득세하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귀한 정신의 관념이 아니라 신체적인 생명을 보존하는 물질이었고, 물질적 가치의 창조와 변형은 기술의 진보에 따른 산업과 경제가 중심이 됐던 것이다.

유물론의 득세는 시대와 역사를 바꿔 놓았다. 국가체제는 강대국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바뀌었고, 물질문명에 따른 국부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결국 헤겔의 관념적 정신사精神史는 유물론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어 버리고, 이로부터 또 다른 새롭고 다양한 사상이 출범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조를 거론해 보면, 헤겔 좌파의 유물론, 인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실존철학의 태동, 진리의 기준이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는 실증, 공리, 실용성을 내세우는 현상주의, 감각적 경험에 바탕을 둔 귀납적 형이상학을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다.

1) 헤겔 좌파의 유물론


감각주의와 유물론을 철학의 권좌로 끌어올린 포이에르바흐
19세기 중반은 헤겔 좌파의 유물론이 출범하는 시기였다. 헤겔 좌파의 사상적인 혁명은 슈트라우스D.F Strauß가 1835년에 『예수의 생애(Leben Jesu)』를 출판하면서 비롯된다. 이 책에서 그는 초자연적인 것, 즉 영혼이나 초월적인 신 등이 모두 사라지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들과 그 변화의 법칙들만이 남는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해서 신의 계시가 해석되고 인간이 종교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자연종교가 말해 주듯이, 19세기에는 유물론이 득세하게 되는데, 여기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일등공신은 바로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1804~1872)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포이에르바흐의 사고는 어떠했을까? 그는 1839년에 “절대자”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을 담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헤겔철학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당시 헤겔의 철학은 독일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중심이념은 절대정신이었다. 역사와 사회의 발전과정이란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국가란 절대정신의 대변이자 실현도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즉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이 현실적인 모든 것을 전적으로 규정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극적으로 반기를 든 철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헤겔을 극단적인 관념론자라고 비판한 포이에르바흐이다. 그는 헤겔이 말하는 절대자란 자신의 철학적 사고 안에서 말라 죽어 버린 채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빈껍데기의 신학적 성령聖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절대관념론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향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흐는 모든 존재란 원초적으로 개념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알려지는 물질이고, 물질적인 토대에서 철학적 사유가 비롯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전개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신체를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의 권리를 부활시키게 될 수밖에 없었고, 로마시대에 스토아학파 창궐 이후 오랫동안 경멸을 당해 왔던 유물론을 철학적 사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정신(영혼)과 물질(신체)의 관계에 대해서도 포이에르바흐는 ‘신체가 영혼에 우선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헤겔의 근본철학에 대립한다. 헤겔의 관념론에서 보면, 현실적인 인간의 모든 것은 영혼과 정신으로부터 나온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이 육체적인 것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헤겔은 인간의 정신적인 사고가 인간 삶의 전반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란 그저 먹는 바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핵심내용은, 정신이 육체를 의식적으로 규정하지만, 정신 자체가 이미 육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정신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포이에르바흐는 또한 헤겔의 관념론을 “위장된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즉 절대이념의 외적 전개[외화外化]로 인해 현실적인 존재가 형성된다고 하는 헤겔의 주장이란 단지 절대자인 ‘신에 의해 자연적인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고 하는 전통적인 신학적 학설을 합리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토대로 해서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이 말한 “무한자(das Unendliche)” 또한 현실적으로 유한한 것, 감각적인 것, 정해진 것이 추상화되고 신비화되어서 그리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헤겔의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조차 포이에르바흐에 의해 감각적인 요인들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실재하는 현실적인 것이란 신도 아니고, 추상적인 존재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며, 오직 감각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흐는 감각주의와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전통적인 유신론(theism)을 버리고, 무신론(Atheism)을 바탕으로 인간주의를 내세우게 된다. 그는 최고의 존재를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요, 인간에게는 곧 “인간이 신이다(homo homini deus)”라는 얘기다. 만일 신이 인간의 주主라면 인간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고 신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러한 주장은 포이에르바흐가 인간의 존재를 신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기초 또한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국가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흐의 감각주의와 유물론은 19세기의 새로운 질서가 개벽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칼 마르크스Karl Heinlich Marx(1818~1883)는 유물론을 전개하였고, 이로 인해 세계의 정치와 문명사가 결정적으로 바뀌어 버리게 된다.

칼 마르크스라는 인물
칼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의 유서 깊은 로마가톨릭 도시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교 랍비의 후예였고, 개신교로 개종한 변호사였다. 아버지는 마르크스가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한 나머지 그를 본Bonn 대학의 법학과로 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법학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인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결국 그는 진로를 바꾸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베를린 훔볼트Humboldt 대학교로 전학하여 역사와 철학의 배움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 베를린에는 헤겔의 기본 사상의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해석하여 인간성의 해방을 주도하려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청년헤겔학파가 그것이다. 베를린에 온 마르크스는 이 학파에 속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에 물들면서 헤겔 좌파의 길로 발을 옮기게 된다. 1841년 마르크스는 예나대학교(Universität Jena)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란 제목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843년에는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헤겔의 법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서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생존에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뜬구름 잡는 관념론을 비판하게 된다.

독일에서 급진적인 좌파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론자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는 비밀 결사 단체인 “정의의 동맹(Bund der Gerechten)”에 가입한다. 1844년 말경에 파리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만나 함께 노동운동의 세계관을 완성하게 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급진적인 인물로 찍혀 추방될 위기에 처하게 됐고, 결국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영국으로 건너간 마르크스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청년헤겔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본주의 자체에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잉태되어 있다고 보고, 이로부터 역사유물론에 대한 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1846년에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하게 됐는데, 여기에서 유물론의 기본적인 원칙을 정해 놓은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확립한다. “소외론疎外論(Entfremdung)” 또한 이 시기에 작성된다.

1947년에는 엥겔스와 함께 혁명적 노동자 정당인 ‘공산주의 동맹(Bund der Kommunisten)’을 결성하고, 1848년에는 프랑스 2월 혁명 직전에 런던에서 공산주의 동맹을 위한 강령으로 삼기 위해 『공산당 선언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출판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과정에서 그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가 도래한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이것이 그의 역사유물론의 시론이다.

1850년에는 계급투쟁이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가를 내용으로 하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을 출간했다. 이후 미국 경제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동맹이 분열되자, 이로 인해 마르크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자 그는 수년에 걸쳐 영국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게 되고, 경제에 관련된 집필을 구상해 나간다. 드디어 1860년에 역사유물론의 핵심을 담은 『자본론(Das Kapital)』이 출간된다.

당시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산과 소비가 급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 간의 빈부의 격차는 점차 한계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인간은 경제적 이윤에 몰두한 나머지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여 가고 있었고, 인간의 고귀한 주체성과 존엄성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심지어 자본의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은 인간 삶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분석 비판했다는 것은 아주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절대관념론을 뒤집어 버린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은 헤겔에서 출발했지만 헤겔의 절대관념론과는 정반대인 유물론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다. 그는 헤겔의 이념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대신에 물질적인 현실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바꾸려면 정신의 관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헤겔이라면, 물질의 경제적인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다. 이념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을 규정한다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조건과 변화가 바로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결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물질적인 존재와 그 현실이야말로 진정으로 참된 존재가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관습, 윤리, 법, 종교나 문화 등의 이념적인 것은 물질에 따라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유물론적 사고”의 핵심이 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유물론(Materialism)”은 어떤 의미일까? 유물론은 현실적인 모든 것이란 관념이나 의식이 아니라 오직 물질적인 것임을 전제한다. 물질은 가장 근원적인 존재요, 감각, 표상, 의식 등은 물질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부차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思考라는 것은 뇌腦라는 물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연, 실재, 물질의 세계가 1차적인 것이고, 의식과 사고는 제2차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과 그 존재가 일차적인 근원이며, 정신적인 삶과 사고는 거기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의식과 사유와 이데올로기(관념)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인간의 실천적인 활동은 바로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의 발전을 요구하는 데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헤겔의 유신론을 무신론으로 전환한 것이 포이에르바흐였다면,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실천적인 유물론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즉 헤겔이 체계화한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를 감각적인 요인들로 해체시킨 것이 포이에르바흐의 공헌이었다면, 마르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감각적인 활동이란 실천적이며, 곧 공동적인 활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그는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개혁을 자신의 과제로 삼은 것이다.

실천적인 유물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인간이 감각으로 보는 것, 정신으로 생각하는 것, 몸으로 행위 하는 것 등은 인간 역사의 전 과정을 규정하는 조건들이다. 이것들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생성의 기초는 생산관계의 총체인데, 이는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Überbau)를 가진 사회의 현실적인 바탕이 된다. 정신적인 상부구조에 따라 역사, 철학, 종교, 예술, 정치 등은 그의 부수 현상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과 “역사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으로 구분된다. 변증법이란 우리가 자연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태도와 그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자연현상에 대한 파악과 해석을 유물론적으로 이론화한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변증법적인 주된 명제들이 사회적인 생활 현상이나 사회적인 역사에 확대된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핵심과제는 “역사적인 유물론”에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란 곧 왕이나 국가의 정복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 조건으로 만들어진다. 역사를 이루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은 사회의 생산양식(사회의 경제)에서 찾아져야 한다. 사회의 생산양식은 도구, 인간, 생산경험을 일컫는 “생산력(Produktivkräfte)”과 인간이 그 안에 모여서 생산하는 집단인 “생산관계(Productionsverhältness)”로 분석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유물론이란 단순히 비인간화된 물질이 아니라 물질적인 생산관계 안에 있는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에 깔고서 역사과정이 전개되는데, 이는 원시공동체 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이상적 공산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진행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인간의 전체적인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곧 물질적인 경제에 관계하는 인간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유물론은 바로 인간의 감각 안에서 물질과 인간이 서로 적응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언제나 실천적인 면이 요청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산업사회에서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적인 경제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단순한 존재론적인 유물론이 아님을 뜻한다. 여기에서 그는 경제적 관계에서 인간의 경험과 정신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게 되는데, 그의 역사적 유물론의 새로운 특징은 바로 계급투쟁론階級鬪爭論(Klassenkampf)으로 집약된다.

계급투쟁론이란 무슨 의미인가? 계급투쟁론의 기초는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Mehrwert)에 있다. 잉여가치란 상품생산에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이윤을 말한다. 노동의 생산품에 대한 효용가치가 크면 클수록 잉여가치는 많아진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자들에게 최소의 임금만 지불한다. 잉여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손에 들어간다. 즉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윤을 착취하게 마련이고,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점점 더 큰 부富를 축적해 나간다. 자본가는 이윤착취로 인한 부의 축적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지(Bourgeoisie) 유산계급이 되고, 이윤을 빼앗긴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계급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은 서로 대립해 있으면서 결국 모두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疏外(Selbstentfremdung)”에 직면하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상품세계에서의 소외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소외를 문제 삼았다. 여기에서 ‘자기소외’란 인간다운 삶이 노동 이외의 장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소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사적소유私的所有와 사적노동을 버리고 사회적 소유와 공동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실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꿈꿔 온 진정한 인간의 삶이다. 그러한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마르크스는 대립도 없고 계급도 없는 이상적 공산사회라 부른다.

마르크스는 급진적인 경제 개혁론자이다. 세계사의 과정에 있어서 관념의 영원한 생성, 대립의 지양止揚, 새로운 것에로의 전진을 내세운 헤겔의 관념변증법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물질에 바탕을 둔 자본의 사회질서(These),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회질서(Antithese), 계급 없는 이상적 공산사회(Synthese)로의 전진이라는 실천적인 역사유물론을 내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유물론
17세기 영국의 경험주의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고, 이로 인해 19세기에 이르러 유물론적인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1854년에 괴팅겐에서 열린 자연과학자회의는 19세기 유물론의 시대정신을 확증하는 계기가 됐다. 결국 유럽인들의 사고는 감각적인 데이터(datum)라고 하는 부분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치의 증대와 인간성의 내적인 빈곤은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유물론에 입각해서 사고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고, 유물론이 탄생하게 되는 간접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헤겔 좌파의 유물론은 이러한 사회적 풍조의 영향으로부터 출범하게 된 것이다.

유물론적인 사고를 대변하는 자연과학적 저서로는 1845년에 나온 카알 포크트Karl Vogt의 『생리학적인 편지들(Physiologische Briefe)』, 1852년에 출간된 야콥 몰레쇼트Jakob Moleschott의 『생명의 순환(Kreislauf des Lebens)』, 1855년에 나온 루우트비히 뷔히너Ludwig Büchner의 『힘과 물질(Kraft und Stoff)』, 1855년에 나온 하인리히 쏠베Heinlich Czolbe의 『감각론 신설(Neue Darstellung des Sensualismus)』 등이 유명하다.

당시의 자연과학적 저술은 고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볼 수 있는 유물론적 사고가 기본 바탕에 깔려 있다. 세계는 생성의 과정에 있으며, 물질과 운동의 힘만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운동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제시된 아낙사고라스의 “정신(Nous)”,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나 이를 본떠서 세계를 창조한 “데미오우르고스Demiourgos 신神”,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극의 운동인으로 제시한 “부동의 원동자”, 그리스와 로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모든 신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학문을 탐구하는 인간의 의식이나 영혼은 물질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뇌腦의 작용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정신에서 나오는 사상과 물질적인 뇌의 관계를 육체에서 흐르는 땀[汗], 간에 붙어 있는 쓸개, 콩팥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오줌에 비유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유하는 정신은 신체적인 감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뇌 활동의 부수적인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물학의 진보는 유물론적 사고를 더욱더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1858년에 차알스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은 『자연도태에 바탕을 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을 간행하여 모든 종은 하나의 유일한 원세포로부터 발전해 나왔다는 진화론을 도입했다. 1871년에 그는 『인간의 기원과 종에 관한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을 출판하여 인간도 진화해 왔음을 주장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19세기 말의 시대정신은 유물론적인 “일원론(Monismus)”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즉 1906년에 발족된 “일원론자협회(Monistbud)”는 ‘많음이 근원의 하나(das Eine)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부르짖었다. 근원의 ‘하나’를 에른스트 핵켈Ernst Haeckel(1834~1919)은 “실체(Substanz)”라고 했고,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wald(1853~1932)는 “에네르기(Energie)”라 했다. 특히 핵켈은 원자가 기계론적으로 진화하여 오늘날의 인간에 이르렀다고 함으로써 다윈보다 더 급진적인 진화론을 주장했다. 그는 1868년에 펴낸 『자연적인 창조의 역사(Natürliche Schöpfungsgeschichte)』에서 생명의 변종은 저절로 생긴다는 것, 원생동물이 계속적으로 분화함으로써 고등생물이 생겨났다는 것,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은 유인원類人猿이라는 것 등을 주장했다.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범신론汎神論(Pantheismus)으로 흐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즉 전통적으로 분리되어 각자 유지되어 왔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즉 초월적인 신과 현실세계라는 이원성은 하나로 융합되어 기계론적 일원론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일원론은 오직 하나의 실체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일원론에서는 물체와 정신, 신과 세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만이 실재할 뿐이라는 얘기다. 그 하나는 바로 신이요 곧 세계이다. 그런데 만일 초월적인 신과 자연세계가 분리된다면, 인격적 유신론이 설 자리가 있겠지만, 일원론의 입장에서는 무신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근대에 발생한 범신론의 부활은 이런 입장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다.

2)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의 태동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시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교회와 국가라는 대립적인 것을 조화하여 시민사회의 안정성을 추구한 헤겔의 절대관념론은 19세기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 와해되었다. 심지어 헤겔철학의 절대이념에 반기를 든 쇠렌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1813~1855)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복轉覆을 꾀함으로써 보편적인 개념적 사고를 무너뜨렸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zsche(1844~1900)는 신에 기원하는 도덕적 가치를 뒤집음으로써 신[主]과 인간[客]에 대한 주객을 전도顚倒시켰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체主體의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인간의 실존實存을 드러냈고, “신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라 하여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태동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프로테스탄트의 “변증법적 신학”과 카알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의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반면에 니체는 초인超人의 철학을 내놓음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드러냈고, “신은 죽었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의 실존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했다. 1841년에는 베를린에서 셸링Schelling의 강의를 들었고, 그 후에 문필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의 논쟁에 휘말려 들었고, 교회와의 타협을 보지 못하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그는 고독한 삶을 보내다가 얼마 살지 못하고 42세가 되던 1855년에 젊은 나이로 코펜하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를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이념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진리는 전통적인 학문에서 밝혀져 전수되어 온 것도 아니요, 영원한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짜여진 교리를 깨닫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 앞에 당당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객관적으로 규정된 진리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완전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완전한 인간적인 삶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실존實存”의 가장 깊은 뿌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은 동양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진리는 바로 신적인 것 안으로 성장해 들어가 실존자實存者가 되는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실존”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오직 일회적인 존재인 각자는 내면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야 실존자가 될 수 있다. 보다 깊은 내면에 이른 자신의 존재는, 빛이 모여들고 내어 주는 광원光源과 같으며, 신이 받아들이고 내어 주는 중심체와도 같은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이 모여들고 거기로부터 퍼져 나가는 독자적인 자기활동의 주체적인 개별자는 바로, 어느 누구도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신 앞에 선 “단독자(Das Einzelne)”이다. 단독자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실존자가 되는 셈이다.

실존을 말하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이데아에다 생명을 가진 개별자를 맞세웠듯이, 헤겔의 사고로부터 추상된 보편자에다 개별적인 의미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맞세운다. 개별자는 절대로 보편자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개별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깊숙한 내면內面에 이름으로써 언제나 자립적으로 실존하며, 고유하게 활동하는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한 개별자는 완결되지 않은 채 언제나 고유하게 행동하는 존재이다. 고유하게 행동하는 개별자는 항상 “비약飛躍(Sprung)”을 감행敢行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삶의 과정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 감으로써 전진前進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진에는 하나하나의 결단決斷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에는 ‘가능성’이 언제나 현존해 있다. 거기에는 ‘이리할까 저리할까’하는 선택의 망설임이 있고, 절망과 한계에 부딪힌 좌절 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결단에는 항상 불안不安이 따라다니고, 신앙信仰이 떠오른다. 불안은 결과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앞질러 가 있고, 앞질러 가 있는 불안의 바탕에는 자유自由가 버티고 있다. 자유는 의지의 선택으로 무한한 것이며, 무無에서 생겨난다. 여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이 없이는 비약을 감행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계에 대한 기분, 감행, 불안, 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유 등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범주들이다.

하나하나의 상태에서 순간순간 확고한 결단을 주도하는 것은 내면의 주체이고, 주체적 결단은 곧 비약을 감행함으로써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내면에 이르는 길은 세 방식이 있다. 첫째는 이미 있었던 것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명상하는 “감성적인 길”이다. 둘째는 결단을 내리는 행위와 자유로운 선택, 즉 개별자의 독자적인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윤리적인 길”이다. 여기에는 이미 자신이 혼자(單獨)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마주치게 된다. 불안은 완전히 혼자인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를 홀로 감당해야 하므로 결단이 요구된다. 세 번째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맡겨짐으로써 궁극적인 내면에 이른 “종교적인 길”이다.

종교적인 신앙은 현존재(Dasein)와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神]에 매달려 그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역설(Paradox)은 여기에서 나온다. 역설적이면 역설적일수록 신앙은 그만큼 더 커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무조건 순종順從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역설은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때에 인간은 절망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럴 때 신앙을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최고의 확증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실존자는 결국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세계에서 풀려나 하나님에게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진정한 실존자가 되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말
프리드리히 니체는 누구인가? 그는 1844년 프러시아Prussia의 뤼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슈울포르타를 졸업한 후 라이프찌히에서 고전학을 공부했다. 이때에 그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고, 22살쯤부터 바그너R. Wagner와 친하게 지냈으며, 24세에 바아젤Basel 대학의 고전어학 교수가 되었다. 1870~1871년에는 지원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위생병으로 몇 달을 지냈는데, 이 때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호되게 앓게 되자 휴가를 얻어 제대했다. 그는 휴양하러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1889년에 진행성마비증에 걸려 정신착란에 빠지고 말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극진히 간호했지만 그는 결국 1900년 8월에 별세하게 됐다.

니체의 초기 사상은 새로운 교양(Bildungsideal)을 형성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의 이상은 아름답고 영웅적인 인간상에 있었고, 그 원형을 고대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즉 헤라클레이토스, 테오그니스, 아이스킬로스 등의 비극적인 시대성에서 찾았다. 특히 그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의 예술과 비극을 새로이 해석하려고 애썼다. 그러한 비극은 두 요소, 즉 현실적인 삶의 근원적인 의지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요인과 삶의 근원적인 의지를 찢어 버리는 표상을 상징하는 “아폴론Apollon”적인 요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삶에 푹 빠져 있었고, 진정한 삶의 가치 자리에다 디오니소스를 올려놓았다.

그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내놓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세계를 제시하게 된다. “힘에의 의지”란 새로운 가치 창조를 암시하는 신호탄이다. 이는 1883년 이후에 나온 『짜라투스트라는 또한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초인(Übermensch)”을 등장시켜 극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자이고, 초인은 이 가치들을 창조하는 자이고, 디오니소스는 이 가치들을 상징하는 자이다. 이 가치에 대립하는 것은 모두 십자가에 매달린 죽은 자로 상징된다.

니체의 고민은 진정한 철학자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 인간이 나아갈 길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세계를 열어주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외치면서 기존의 모든 가치를 파괴하는 망치를 든 철학자로 변신한다. 그는 기존의 모든 도덕적 규범들을 파괴하고, 인간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가치 창조로 나아가는 삶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이나 그리스도교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그가 부수고자 하는 확립된 기존의 도덕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은 이러저러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도덕적 규범이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적 규범이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풍부한 가치를 마비시켜 왔다고 보았다. 또한 니체는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발명하여 삶의 본능, 삶의 기쁨과 풍부함을 억압하였고, 천국이라는 저세상[피안彼岸]을 발명해내어 이 세상[차안此岸]의 가치를 말살하였으며, 구원받는 영혼을 발명해 내어 신체적인 모든 것을 비방하였고, 죄와 양심을 발명해 내어 삶의 창조의지를 빼앗아 버렸다고 말한다.

삶은 일회적이요 살과 피로 형성된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기존의 도덕은 새로운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은 허구요, 참되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다. 니체는 도덕현상이란 없다고 한다. 즉 열등한 사람들이 삶과 삶의 현상을 잘못 해석한 것이 도덕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얘기다. 니체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적나라한 생존 자체요, 순수한 자연적인 모든 생성이다. 또한 사랑, 동정, 겸손, 자신을 낮춤, 희생정신을 강요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노예의 도덕이요, 삶에 적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자는 삶에 대한 저주’라고까지 말한다.

기존의 도덕적 규범이나 이념이 모두 부서졌으니, 이제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은 죽었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이다. 사실 이 초인 안에 니체의 의욕 전체가 응집해 있다. 초인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인은 유일한 것이며, 인간도 아니고 괴로워하는 자도 아니고, 가장 착한 자도 아니다. 초인은 이상理想으로서 나타나는 일체의 피안의 세계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대지大地를 위하여, 생生 자체를 위하여 스스로를 바치면서 이에 기꺼이 순응하는 자이다.

니체는 그리스도의 자리에다 “디오니소스”를 올려놓는다. 초인은 세계가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영원히 새로 솟아오르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인식과 창조의 가치 확립을 가져오지만 스스로 파탄에 직면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초인은 모든 가치란 삶을 위해서이고, 진정한 삶이란 “힘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초인은 자신이 이 세계의 한 부분인 동시에 “힘에의 의지”를 뜻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초인은 생生 자체의 가장 요원하고 가장 해결하기 힘든 모순을 견디어 낼 줄도 알고 있었다.

끝으로 초인은 “영겁회기永劫回歸(die ewige Wiederkunft)”의 사상도 체득할 수 있는 인간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輪迴를 거듭한다.”(『짜라투스트라는 또한 말하였다』 제3부). 다시 말해서 세계란 일정한 크기를 지닌 힘의 덩어리며, 여기에는 무수하게 많은 존재자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무한히 지속하는가? 아니다. 무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뿐이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무한한 시간 계열에서 수없이 생겨나고 없어진다. 만물은 반복적으로 영원히 회귀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이라는 것이다.

3. 현상주의現象主義(Phänomenalismus) 출현


19세기의 철학은 한마디로 “현상주의現象主義”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상주의란 사물의 배후를 드러내는 본질적 탐구도 아니고 근원의 존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도 아닌, 말 그대로 현실적으로 감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진정한 실재라고 여기는 입장이다.

사상적인 틀에서 보자면, 존재란 현상現象일 뿐이라는 19세기 현상주의는 프랑스에 일어난 실증주의(Positivism)와 독일에서 일어난 유물론(Materialism)이고,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포함하며, 그리고 미국에서 붐이 일어난 실용주의(Pragmatism)와 변질된 귀납적 형이상학이 현상주의에 속한다.

프랑스의 실증주의實證主義
오늘날에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분야까지도 실증주의 사상이 파고들어 널리 유포되어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역사관 또한 실증주의에 물들어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어떻게 태동해서 오늘날 인류의 정신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일까?

실증주의 사상을 개념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오구스트 꽁트August Comte(1798~1857)이다. 그는 인류의 정신사를 검토하여 세 시기로 나누는데, 1단계는 신화적인 시기, 2단계는 형이상학적인 시기, 3단계는 실증주의 시기가 그것이다. 마지막 실증주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과학적 탐구의 중요성을 간파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1단계의 시기 :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원시적인 상태에서 맨 먼저 신화적인 혹은 신학적인 단계에 접어든다. 이는 자연의 모든 현상이 보다 높은 인격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시기이다. 먼저 인격적인 힘이 특별한 사물 안에 살아있다고 믿는 페티시즘(Fetischismus), 다음은 그 힘을 가진 인격적인 신이 여러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던 다신교(Polytheismus), 마지막으로 전능한 유일신이 온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는 유일신교(Monotheismus)가 여기에 속하는 시기로 나타난다.

2단계의 시기 : 다음은 인간이 비판적 탐구능력이 발현되면서부터 시작한 형이상학적 시기이다. 대표적으로 아테네 시대의 철학적 탐구 시대가 그것이다. 철학은 신화적인 시대에서 탈피하여 창조변화의 힘을 추상적인 개념, 즉 사물의 본질, 형상, 영혼 등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꽁트의 눈에 여전히 허구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3단계의 시기 : 마지막 단계는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 즉 현실적인 경험적 대상으로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인간이 진리 탐구로 간주하게 되는 시기이다. 실증적인 것들만이 실재이고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학문이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두 가지 업무에 주력하게 되는데, 첫째는 현상들로부터 언제나 반복적이고 동일한 것을 밝혀내어 개념을 창출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상들이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일어나게 되는 법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하여 20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신실증주의新實證主義가 등장한다.

영국의 공리주의公理主義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인 흄D. Hume 이후 경험론은 새롭게 변질되어서 그 명맥이 유지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적 현상주의이다. 공리주의적 현상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J.S. Mill(1806~1873)의 사상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밀은 철학에서 추구하는 객관적인 본질이나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존재란 없고, 또한 지성의 선천적인 내용이나 개념도 없으며, 오직 순간적으로 지각되는 것만이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전적으로 경험론의 입장을 깔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에서 다루는 것이란 경험적인 자료들뿐이고, 이로부터 귀납적인 법칙을 얻어내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귀납추리가 보편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밀은 그 보완책으로 “자연의 과정이란 한결같다”(자연의 제1성질)는 전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이로부터 경험적 명제로부터 귀납추리의 학문적 타당성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것이다.

경험적 진리를 토대로 해서 전개되는 영국의 공리주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인가’의 물음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겠다. 대표적인 인물은 벤담Bentham, J.(1748~1832)과 밀을 꼽을 수 있다. 벤담이나 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행복한 삶에 대한 문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행복幸福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행복이란 궁극적으로 선善(good)한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밝힌다. 즉 선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삶이야말로 즐거움[快樂]이 함께 따라다니고, 곧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는 선한 삶을 살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것이지, 즐겁게 살기 때문에 선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됨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벤담이나 밀은 행복한 삶이란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苦痛이나 악惡을 피하고 즐거움[快樂]을 추구함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이다. 이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쾌락이 유일한 선이고, 고통이 유일한 악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규정으로부터 쾌락만이 유일하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리주의는 쾌락이 선이요 곧 행복이라는 등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쾌락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불쾌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따라야 할 윤리적인 삶의 목적은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이것이 곧 공리公利의 준칙準則이다. 그래야만 인간 모두가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흄이 마련한 행복주의幸福主義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행복주의는 벤담과 밀의 윤리학적 토대에 그대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행복론을 말하지만, 벤담과 밀의 행복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벤담은 모든 쾌락이란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그는 쾌락의 양量만이 다를 뿐이지, 질적으로 고급의 쾌락이나 저급의 쾌락이란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벤담은 행복의 척도를 쾌락의 양으로 계산해 낸다. 쾌락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반복성, 순수성, 빈도성이 그것이다. 쾌락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더 좋은 것이요 더 옳은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쾌락의 양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불쾌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람들을 과연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까? 요컨대 나라를 폭력으로 통치하는 독재자가 가난에 찌들어 굶주린 삶을 살고 있었던 국민에게 먹을 것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여러 면에서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를 요구했다고 해 보자. 독재자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풍부하게 공급해 주자 많은 사람들은 많은 양의 쾌락을 누려 모두 행복해 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를 달라고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먹는 것만으로는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즉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독재자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밀은 벤담이 제시하는, 감각적으로 충당되는 양적 쾌락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충당되는 질적인 쾌락을 내세우게 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훨씬 더 많은 쾌락을 향유할 수 있고, 따라서 그만큼 더 행복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진리에 대한 갈급증에 시달려 온 사람에게는 물질적으로 충당되는 쾌락보다 정신적인 쾌락이 훨씬 더 많은 기쁨을 주고 더 많은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밀은 감성적인 만족을 통해서 계산되는 벤담의 양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통해서 느끼는 질적인 쾌락이 더 강도가 있고, 쾌락의 영원한 지속성과 순수성이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미국의 정신을 세운 실용주의實用主義
실용주의 또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진리관을 거부하고 현상으로 드러난 경험적인 세계에만 관심을 둔다. 왜냐하면 실용주의 진리관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유용성이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행동과 실천을 중요시함을 뜻한다. 그래서 실용주의는 ‘삶의 행동이 인식을 결정짓는 것이지 인식이 삶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바탕에 깔고서 삶의 유용성을 추구하는 철학으로 나아간다.

실용주의적 사고를 처음으로 창시한 자는 차알스 퍼어스Charles Peirce(1839~1914)이고, 이를 발전시킨 자는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라 볼 수 있다. 나아가 실용주의를 계승하여 새로운 철학, 일명 도구주의(Instrumentalism)로 전개해 나간 자는 존 듀이John Dewey(1859~1952)이다.

퍼어스는 사물을 지각하는 관념을 명료화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실천(pragma)”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로부터 실용주의란 말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 속에 개념으로만 있는 관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관념이 실천으로 규정되어 현실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행동으로 실현된 관념만이 의미가 분명해지고 알려질 수 있다. 이는 관념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실천의 차이를 관찰하면 된다는 뜻이다.

퍼어스의 실용주의적 특성은 1877년에 발표한 “신념의 고정화(The Fixation of Brief)”란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의심에서 시작하여 탐구의 과정을 거쳐 신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의심은 모르는 것, 생소한 것을 알기 위해서 탐구로 이끌기 때문이다. 탐구의 결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탐구란 의심에서 시작하여 신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사고과정이며, 그 목적은 신념의 확립에 있는 것이다. 퍼어스에 의하면, 신념의 확립에 기여하는 중요한 방법은 과학적 방법이다. 이와 같이 그는 ‘관념을 명료하게 하고 신념을 고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실용주의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제임스는 퍼어스가 말한 관념이나 신념이 인간의 경험에서 어떤 몫을 하느냐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사고한 철학자다. 제임스는 미국 특유의 또 다른 실용주의적 사고를 내놓게 되는데, 실용주의를 어떤 연구 성과가 아니라 연구방법론으로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학설이나 관념이 참된 것이냐 아니냐는 그것이 가져오는 실제적인 효과에 의해서 보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학설이나 관념은 사람에게 유용하고 만족스런 효과를 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용하고 만족스런 효과를 주는 것이야말로 실제적인 결과로서의 사실로 판명되는 것이다.

제임스는 경험으로 검증 가능하면 그 관념은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검증이란 진리화의 과정이며, 진리는 관념이 경험에 의해 사실과 일치되는 것을 뜻한다. 진리는 항상 결과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관념은 언제나 경험에 의해 부단히 검증되어 새롭게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관념은 개인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 구체적인 활동에 가치가 되는 것, 행위로 옮겼을 때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관념은 개인에게 유용할 때 참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거짓이라는 얘기다. 만일 실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관념이라면, 이는 무의미한 것이거나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듀이의 경험주의 철학은 전통적인 감각경험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확대된다. 경험은 감각적인 활동을 포함하여 생리적, 인류학적, 문화적 활동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경험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뜻에 가깝다. 경험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질서 있는 맥락을 가지고 연속되면서 성장한다. 경험이란 즉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이면서 지속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듀이가 말하는 경험은 상호작용의 원리요 지속성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유기체로 살아간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기도 하고, 환경을 개척해서 바꾸기도 한다. 이 경우에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 혹은 도구가 되는 것은 개념, 지식, 사고, 논리, 학문이다. 듀이에 의하면 지성의 인식작용은 환경에 대한 적응작용의 발전 형태이며, 관념이나 개념은 이러한 적응작용을 돕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생명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개념이나 관념이라면, 이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검증되고 끊임없이 수정돼야 마땅하다.

듀이는 환경에 적응하는 도구로서의 관념이나 개념이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리로 인식되고 있는 개념이나 관념은 인간이 환경에의 적응과정에서 능동적인 지성이 만들어 낸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환경에 접하여 적응하기 위해 개조된 실험적 행위의 성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이나 관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해결을 위한 도구로서 개조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개념, 관념, 사상 등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듀이가 말하는 탐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관념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검증을 통해 진리화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 변질된 귀납적 형이상학


19세기에는 유물론이 득세하고 자연과학적인 인식론이 유행하면서 관념론이 허물어지고 현상주의와 그 변형들이 유럽철학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이런 학풍 속에서 철학의 꽃이라 불렸던 형이상학은 풍전등하風前燈下였고, 겨우 명맥만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형이상학의 명맥을 유지한 철학자는 소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스콜라철학의 후광으로 새로운 형이상학적 방법을 창안한 독일의 페히너Gustav Theodor Fechner(1801~1887), 여기에 동조한 롯체Rudolpf Hermann Lotze(1817~1881) 등이다. 이 노선에 속하는 학자들을 묶어서 귀납적 형이상학자라 부른다.

귀납적 형이상학자들은 시대정신에 맞추어 자연과학적 인식을 활용하여 전통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온 형이상학의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그들은 당시 경험적인 연구 내용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정신철학이 아닌 실증적인 경험이 언제나 인식의 근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모두 경험론자이지만 고전적 형이상학의 명맥을 이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귀납적 형이상학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경험을 앞질러야 하기 때문에, 결국 경험적 연구를 앞질러서 완성한 가설적인 성격에 머물고 만다.

페히너
페히너는 종교적인 신앙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형이상학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단순히 개념을 꾸며 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전체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파악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세 가지 규칙을 정한다. 첫째의 규칙은 유비추리類比推理(Analogieschluß)를 권장하는 것이다. 유비추리의 결과가 근거가 있고, 확실한 과학적 인식에 모순되지 않을 때에는 개연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의 규칙은 실용성의 원리에 바탕하고 있다. 즉 개념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도 좋다는 것이다. 셋째의 규칙은 하나의 믿음이 오래도록 폭넓게 알려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 믿음의 개연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페히너는 이러한 규칙을 통해서 형이상학적인 가설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페히너는 밝음[光明]과 어둠의 존재를 전제한다. 밝음 자체는 생명을 가진 전체적인 영혼이다. 전체적인 영혼은 하나님(Gottheit)이라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 모든 것은 밝음의 정도에 따라 생명(영혼)이 있는 인간, 동물, 식물, 생명이 전혀 없는 물질적인 것이 구분된다. 따라서 생명을 가진 지구地球나 다른 별들, 즉 우주자연의 세계는 모두 영혼을 갖고 있고, 영혼이 깃들어 있는 개별적인 모든 생명은 전체적인 영혼의 한 부분이 된다.

전체적인 영혼 속에 있는 인간의 영혼은 계속적으로 표상작용을 한다. 페히너는, 여러 표상들이 인간 각자의 영혼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감각적인 지각들에 대해서도 각기 관계를 맺고 있듯이, 신체가 죽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 영혼이 표상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고, 그러는 한에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세상에 머물고 있는 영혼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는 믿음을 떨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롯체
롯체는 형이상학을 부정하던 19세기에 살았던 자연과학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를 응용하여 형이상학적 이론을 펼치게 된다. 특히 그는 자연적인 사건의 기계론적인 인과법칙을 인정하면서도 보다 높은 의미의 목적이 자연의 기계적인 인과론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는 모든 인과적 힘이 궁극의 원인이요 존재의 근원인 신(인격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라이프니쯔의 예정조화설에서 보듯이, 세계의 모든 인과적 작용이란 결국 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근원으로 파고들어 가는 철학적 탐구는 바로 세계의 구성과 과정에서 살아 있는 원리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는 근거 지워진 것으로부터 근거 지우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라이프니쯔와 플라톤의 방법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방법적 토대 위에서 롯체는 하나의 절대자로부터 모든 것들을 이끌어 내려고 한 피히테와 헤겔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즉 그는 우주만물을 창조한 절대정신만이 피조물들에게 부여한 궁극의 목적을 알고 있고, 피조물들이란 절대정신이 부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라이프니쯔가 “활동할 수 있는 존재(être capable d’action)”로 영혼을 내세웠듯이, 롯체는 영혼의 실체성을 제시한다. 그는 영혼의 발생을 정신적인 세계의 근거가 작용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근거는 물질적인 씨앗이 형성되는 것을 통해 영혼을 낳도록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과학은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은 하나의 신념일 뿐이나 충분한 근거를 지닌 신념이다.

영혼과 신체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로체는 데카르트가 말한 심신 상호작용설을 받아들인다. 감각에 있어서는 육체가 영혼에 작용하고, 의지의 행위에 있어서는 영혼이 육체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롯체가 19세기를 지배한 기계론적인 사고에서 나온 결정론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는 라이프니쯔의 영혼론을 따라가고 있었다. 롯체의 영혼론은 후에 브렌타노Franz Brentano(1838~1917)의 행동심리학에 영향을 주었고, 논리적인 면에서는 훗설Edmund Husserl(1859~1938)의 현상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19세기에는 귀납적 형이상학의 출현 외에도 신적인 세계정신을 내다볼 수 있게 하는 두 주류, 즉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스콜라철학이 등장하기도 한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을 실재론적으로 결합한 바탕 위에서 존재에 대한 전체성을 파악하여 일원적인 유기체적 세계관이 구축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 다음 호 2. 20세기에 대두된 서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