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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산책]

    서양철학사상 | 4.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칸트의 인식론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인식론 순서
    1. 인식(認識, Episteme)이란 무엇일까?
    2.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3. 진리인식에 대한 경험주의 접근방식
    4.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칸트의 인식론


    一切(일체)가 惟三神所造(유삼신소조)오
    心氣身(심기신)이 必須相信(필수상신)이나 未必永劫相守(미필영겁상수)하며
    靈智意三識(영지의삼식)이 卽爲靈覺生三魂(즉위영각생삼혼)이나
    亦因其素以能衍(역인기소이능연)하며
    形年魂(형년혼)이 嘗與境(상여경)으로 有所感息觸者(유소감식촉자)오
    而眞妄相引(이진망상인)하야 三途乃歧(삼도내기)하니
    故(고)로 曰有眞而生(왕유진이생)하고 有妄而滅(유망이멸)이라
    於是(어시)에 人物之生(인물지생)이 均是一其眞源(균시일기진원)하니라

    만유는 오직 삼신이 지은 바라.
    마음과 기운과 몸은 반드시 서로 의지해 있으나 영원히 서로 지켜 주는 것은 아니다.
    영식과 지혜와 의식의 세 가지 앎은 영혼과 각혼과 생혼의 삼혼이 되니, 또한 삼식을 바탕으로 해서 뻗어 나간다.
    생명의 집인 육신과 목숨과 혼이 주변의 환경과 부딪히면 그에 따라 느낌과 호흡과 촉감이 일어나고, 삼진(性·命·精)과 삼망(心·氣·身)이 서로 이끌어 삼도(感·息·觸)로 갈라지나니
    그러므로 삼진三眞의 작용으로 생명이 열리고 삼망三妄의 작용으로 소멸이 있느니라.
    그래서 인간과 만물의 생명은 균등하게 하나의 삼진에 근원하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데카르트Descartes에서 시작한 대륙의 합리론과 베이컨Bacon에서 출발한 영국의 경험론은 각기 극단적으로 나아가면서 한쪽만을 고집하는 기형적인 사상으로 변모되어 갔다. 이에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여 인식론적 체계를 새롭게 세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고대 플라톤 이후 근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다.


    1) 생애


    칸트는 누구인가? 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동프로이센으로 건너온 이주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수공업 마구馬具 제작자인 요한 게오르그 칸트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인품과 지성을 갖춘 느 레기나 도로시아 류터이다. 1724년 4월에 칸트는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in Preussen)에서 11명의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에마누엘Emanuel”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후에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 자신의 이름을 “임마누엘Immanuel”로 바꾸었다. 부모가 루터교 경건파의 독실한 신자였기에 그는 어려서부터 검소한 내적인 삶과 겸손함 그리고 도덕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성장한다.

    1740년에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신학생으로 입학했으나, 그의 관심은 수학과 물리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 그는 특히 합리론의 철학을 체계화한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1679∼1754)를 연구했으며, 동시에 과학자 아이작 뉴턴I. Newton의 과학을 맹신하기도 했다. 1744년 ‘운동력’을 주제로 최초의 책을 썼으며, 이때부터 그는 학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됐다. 1746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부속학교에서 조교 직을 얻지 못하자 9년간의 가정교사를 한다. 1755년에 대학에서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그는 무급無給으로 15년간의 대학 강사 생활을 시작한다.

    칸트가 강의와 저술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5년간의 무급 강사 시절이었다. 그가 자연과학 관련 주제들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초기의 강의 주제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해가 지나면서 강의 주제는 점차 논리학, 형이상학, 도덕철학, 자연지리학 등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명성이 자자했음에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에 지원하여 2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다른 대학에서 특권을 부여하면서까지 그를 대학교수로 초빙하려고 무던히도 애썼으나 칸트는 일언지하에 모두 거절한다. 그러던 중 1770년에 15년간 무급으로 해 오던 대학 강사 생활을 마감한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칸트를 논리학, 형이상학 교수로 임용한 것이다.

    1770년 교수 취임 논문을 낸 이후 그는 11년간의 공백기를 거친다. 아무런 글도 발표하지 않고 9년 동안 연구에만 전념한 것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나 할까. 1781년 마침내 독창적인 비판철학의 저술들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에 대한 인식론을 다룬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출간했고, 1788년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에 대한 윤리학을 다룬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이, 1790년에는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의 미학에 대한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이 쏟아져 나왔다. 이로 인해 서구 근대 사상사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철학이 장차 나아갈 방향이 결정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역대 철학자들 중에 칸트만큼 규칙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보낸 이가 몇 명이나 있으랴!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 평화로운 고향에서 조용히 사색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더욱 심화하고 진작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평생 동안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철학적 사유와 강의에만 전념했다. 그는 아마도 선천적으로 왜소한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졌고, 몸이 튼튼하지 못하여 평생 규칙적이고도 엄격한 식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일상의 삶을 얼마나 규칙적으로 살았느냐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철학자의 산책로”라고 이름이 붙여진 거리를 보면 가히 짐작되는 바다. 사람들은 그의 산책 시간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추었다고 한다.

    말년에 그는 몸이 쇠약해지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1804년 2월 향년 80세의 나이로 쾨니히스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는 것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실천이성비판』 결론에 나오는 “내가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안의 도덕 법칙이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2) 『순수이성비판』의 과제


    합리주의 사유는, 감각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나오는 ‘후천적’ 관념을 도외시하고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타고난 ‘본유관념’을 토대로 하여 오직 이성의 연역 추리에 의해서만 지식론을 전개하기 때문에, 필연적 진리 인식을 얻어내게 되지만, 경험적 사실에 관한 지식을 확장해 가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반면에 경험주의 사유는,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이성의 탐구 방법론을 도외시하고 오직 실험 관찰에 의한 감각적 경험에서만 찾으려고 한 나머지 자연과학의 사실적인 지식을 얻어냈지만, 필연적이고 확실한 진리 인식을 확보하지 못하고 개연적인 지식에만 머물러 결국 회의론에 빠지게 되었다.

    칸트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접근 방식이 모두 학문적 인식의 성립 조건을 올바로 고찰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면서 인식의 ‘이성 능력 비판’에 착수한다. 여기에서 ‘이성 능력 비판’이라 함은 이성 자체의 그릇된 사고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능력 일반에 대한 비판, 즉 이성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밝혀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칸트는 정당하게 판단하고 주장하는 이성을 보호하고,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이론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부당하게 판단되고 주장되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전반적인 혁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는 사실에 관한 보편타당한 학문적 인식의 가능 근거를 밝힌다. 즉 필연적이고 확실한 인식 능력이라는 이유로 이성의 만능을 독단적으로 믿는 합리론과 인식의 근원이 사실적인 경험 세계에 있다는 이유로 보편타당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경험론을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정립해 간다. 이러한 철학을 칸트는 스스로 비판철학(kritische Philosophie)이라 불렀다. 양자의 인식론을 종합 통일한 칸트의 비판철학은 근대 철학의 분수령이거니와 18세기 계몽주의 철학 사상을 완성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칸트가 어떻게 이 두 인식론에 접근하여 종합을 시도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① 독단獨斷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
    진리 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철학의 “상기설(anamnesis)”에 기원을 둔다. 합리주의 사유방식은 “선험적(a priori)”으로 구비되어 있는 관념으로부터 연역 추리를 수행하는 데에 있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후천적”(a posteriori)으로 주어지는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타고난 “본유관념”임을 뜻한다. 즉 이성 능력이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본유관념’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여기로부터 이성의 규칙에 따라 논리적으로 추리해 내면 모두 확실하고 참된 인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만이 필연적인 인식 능력을 가진 것임을 뜻하고, 또한 감각을 통한 경험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선험적인 진리로 인도함을 의미한다.

    선험적 진리 인식은 이성의 고유한 기능인 순수 사유에서 찾아지는데, 논리적인 연역 추리에 의해서 나온 지식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필연적인 진리요 보편타당하다. 보편타당하다고 일컬어지는 진리는 항상 언제 어디에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타당하다. 만일 순수 사유를 통해서 얻은 이성적 지식이 보편타당하지 않다면 이성의 사유 활동이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감각적 지각이나 또는 감정에 의해 방해를 받아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탓일 게다. 그러므로 이성에 의한 진리는 필연적으로 보편타당함을 그 생명으로 한다.

    절대적인 이성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합리주의 인식론은 논리적인 법칙인 모순율矛盾律에 의존하는 분석 판단이다. 분석 판단은 참과 거짓(眞僞)의 근거가 모순율에 위배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요컨대 “삼각형은 둥글다”와 같은 명제는 모순율을 위배하므로 항상 거짓이다. 그러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다”와 같은 판단은 모순율을 위배하지 않으므로 항상 참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삼각형은 내각의 합이 180도(2직각), 즉 원래 주어 개념(삼각형)의 영역 안에 이미 술어로서 진술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황금 산”이나 “날개 달린 말” 등과 같은 개념이다. 이런 개념들은 경험 세계에 현실적으로 대응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자체로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개념들이 타당한 진리 인식이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이 개념들이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없음에도 단지 무모순적이라는 근거에서 진리 인식이라고 한다면, 이는 누구에게나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개념들이 진리 인식이 아니라는 것을 이성은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이는 합리주의 탐구 방식에서 진리 인식의 규준으로 삼고 있는 이성의 논리적인 무모순성이 진리 인식의 필요조건이 될지언정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 탐구에 관한 합리주의 접근 방식에만 의존한다면, 탐구된 진리는 사실에 대한 내용이 없고 공허空虛하여 독단獨斷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칸트로 하여금 합리주의 접근 방식의 결과로 빚어지는 독단의 꿈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영국 경험주의 접근 방식이었다. 경험주의에 따르면, 지식의 원천은 감각적인 경험에 근거한다.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출원하는 지식은 현실적인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들이다. 합리주의 방식을 따르는 지식은 순수 이성의 사유에만 의존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이고 확실성을 지닌 인식일 수 있으나 사실적인 내용이 전혀 없으므로 공허한 것이었다. 반면에 경험주의 방식에 따른 감각적인 지식은 내용이 풍부한 사실적인 지식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오직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면, 이는 필연적일 수 없고 또한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인식일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한 개연적 지식에 귀착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일한 대상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미래’에도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는 필연적인 보편 명제는 따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흄은 감각적 경험을 통한 지식은 기껏해야 주관적이고 개연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삼는다면 감각적인 경험은 실제적인 사실의 내용을 제공해 주지만 보편타당한 필연적인 지식을 제공할 수 없으므로 진리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이 못된다. 진리는 객관성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필연성과 보편타당성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칸트는 진리 인식에는 분석 판단만이 아니라 경험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확장해 주는 판단, 즉 종합 판단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②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밝힌 비판철학의 목표
    칸트는 고전 물리학을 토대로 자연과학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뉴톤의 시대에 살았던 자이다. 그 덕분에 그는 사실 세계를 바탕으로 세워진 자연과학적 지식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는 것과, 그리고 자연과학이 수학적 지식의 필연적이고 확실한 진리성을 그대로 인정하여 통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가령 자연과학에서 발견해 낸 뉴톤의 낙하법칙落下法則이라든가 혹은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와 같은 감각적인 경험을 토대로 해서 얻은 인과 지식은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진리라는 것과, 수학에서 주장하는 “7 + 2 = 9”라는 것은 사물들의 수를 계산해 내는 기준으로서 확실성의 인식이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이다”라는 기하학적인 확실성의 지식은 명백히 자연적인 것들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칸트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이 확실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놓고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양자의 진리성을 합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과학적 지식 및 수학적 지식과 관련하여 칸트는 사실事實의 문제와 권리權利의 문제로 구분한다. 자연 세계에 ‘참된 지식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이고, 곧 과학이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반면에 이와 같은 참된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이 사실이 확실한 진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여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권리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았고, 이 지식이 참된 인식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권리의 문제인데, 이 권리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 비판철학의 과제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그래서 칸트의 비판철학은 참된 인식이 성립하는 과정을 해부하여 진리 구성의 필수 요건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식론에 관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온 주요 저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칸트는 합리주의 방식의 탐구에서 초래한 독단론과 경험주의 방식의 탐구에서 결과한 회의론을 배제하고, 진정한 의미의 형이상학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근거를 제시하려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진정한 철학은 형이상학의 신, 불멸하는 영혼과 같은 초경험적인 것에 대해서도 순수 사유를 통해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독단적인 형이상학에 매달려도 안 되고, 단순히 경험적 관념만을 인식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형이상학을 부정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철학적 탐구는 이성에게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 주면서 동시에 근거 없는 것을 이성의 진리 인식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비판철학의 과제는 순수 이성이 감각적인 경험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식을 얻어 내려는 시도에 대하여 이성 전체에 대한 비판이고, 형이상학적 탐구의 체계가 어떻게 가능한가의 가능 근거를 밝히면서 형이상학적 인식론의 원천과 그 범위 및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모든 진리 인식은 비록 감각적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더라도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형이상학적 인식론의 판단에 내포되어야 한다. 이것은 순수 이성이 요구하는 정당한 권리이며 인식 원천의 선천적 특성이다. 그리고 모든 판단은 선험적 지식으로서의 분석 판단이 아니라 지식을 확장하는 그런 것이어야 하므로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종합 판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본래적인 과제는 어떻게 해서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한가라는 가능 근거를 제시하고 확립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 인식은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판단이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요컨대 “모든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판단은 경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선험적인 것으로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세 선분”이라는 개념이 “삼각형”이라는 주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판단은 경험과는 분리될 수 없는 후천적인 것으로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검다”는 개념은 까마귀에 덧붙여서 까마귀들이 서로 관계되어 있는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를 밝히는 것을 『순수이성비판』의 근본 문제로 보았던 것이다.

    ③ 선천적 종합 판단의 요구
    칸트는 인식에 관한 한 합리주의 접근 방식으로써 순수 이성이 사유를 통해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보편타당한 필연적인 명제를 확보해 준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반면에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경험주의 접근 방식으로써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경험적인 사실들을 받아들인다. 그에 의하면 참된 지식의 성립은 이성이 확실성의 진리를 제공해 주는 보편타당한 법칙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선천적인 판단, 즉 모든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판단이어야 하며, 우리의 지식을 확장해 주는 사실적인 판단이어야 하기 때문에 종합 판단, 즉 분석 판단과는 달리 주어의 개념 속에 사실적인 의미 내용을 포함하는 술어가 덧붙여지는 판단이어야 한다. 학문적인 모든 진리 인식은 양자를 종합한 선천적 종합 판단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합리적인 탐구 방식과 경험적인 탐구 방식을 결합한 선천적 종합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가능성은 칸트에 의하면 순수 수학과 순수 물리학의 영역 안에 이미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순수 수학적 명제란 “7 + 2 = 9 이다” 혹은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의 선이다”라는 기하학적인 명제와 같고, 순수 물리학적 명제는 “물질 세계의 모든 변화에 있어서 물질의 양은 일정불변이다”(질량 불변의 법칙) 혹은 “사물들은 중력重力에 의한 자유 낙하를 한다.” 등의 법칙과 같다. 순수 수학적 명제는 사실적인 경험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순수 자연과학적 명제는 수학의 도움으로 그런 법칙적 명제를 얻어낸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종합 판단이면서 항상 필연성을 가지는 선천적인 판단일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보편타당한 확실성의 인식을 얻어내는 중심 과제는 ‘선천적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순수 수학이나 순수 자연과학이 성립하는 가능 근거를 해명하는 것은 결국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 근거를 해명하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러한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 근거를 해명할 수 있다면, 수학이 항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도 아니고 자연과학이 항상 맹목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근거도 밝혀지고, 또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의 성립 여부가 해명될 수 있음과 동시에 인식의 타당성 또한 확립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④ 사고혁명思考革命으로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kopernikanische Wendung)”
    소위 판단이라고 하는 지식이 성립하려면 먼저 인식의 대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인식의 대상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무엇’을 안다고 함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상이 주어졌을 경우 이를 안다고 함은 인식의 주관이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은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의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인식의 대상과 인식 주관의 관계를 살펴볼 때, 칸트는 종래의 생각과는 달리 사고의 변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래의 사고 방식은 인식 주관이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 즉 “인식은 모두 대상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사설”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모사설적 사고를 뒤집기 위해서 칸트는, 자연과학 분야가 종래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우스가 주장한 천동설로부터 근대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사고의 변혁’이 일어남으로써 자연의 운동 현상을 보다 참되게 설명했던 것처럼, 인식 주관이 대상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보다 나은 결과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하고 시험해 본다.

    사고의 전환은 인식에 있어서 패러다임paradigm 전환이라 볼 수 있다. 칸트는 이것을 인식론에서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자연과학자가 어떤 ‘가설적 이론’을 전제한 후 이를 자연 현상에 적용하여 설명하려는 방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즉 가설적 이론이 자연의 변화에 잘 맞아떨어지면 진리 인식으로 확정하는 원리와 같다는 얘기다.

    자연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적 이론은 자연의 창조 변화에 대해 보다 더 잘 이해할 목적으로 설정하는 전제이다. 이는 자연적인 대상들을 그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대로 응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학적 가설을 설정하여 이를 자연에 투입하여 자연을 보다 더 확실하게 설명하고 인식하려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철학에 있어서도 인식 주관이 주관 밖에 주어진 대상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주관 안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형식을 인식 대상에 투입하여 대상을 구성하여 인식하는 입장을 취한다. 만일 인식 주관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필연적인 형식이 없고, 인식의 대상 또한 주관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해서 우리의 인식 주관이 대상에만 따른다고 가정한다면, 칸트의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인식 주관에 선천적인 어떤 형식이 있고, 대상이 인식 주관의 선천적 형식에 의해서 구성된다면, 대상에 대한 선천적 종합 판단은 가능하다. 이는 인식 주관이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명증적인 형식에 의해 외부의 대상들이 명확한 인식으로 구성될 적에 이 대상들은 선천적이면서 종합적인 인식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 방법은 대상들에 관한 인식인 만큼 단순한 개념의 분석이 아니라 지식을 확장하는 종합 판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인식론은 인식 주관이 자신 속에 구비하고 있는 선천적 형식에 따라 인식되어지는 대상들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고 보는 “구성설構成設”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식론에 관한 칸트의 구성설적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구성설은 로크가 제시한 소박한 실재론實在論적인 접근 방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을 그대로 모사하는 감각적 모사설模寫設의 접근 방식도 아니다. ‘구성설’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자연에게 우리가 질서를 투여하여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인간은 “자연의 입법자”란 주장이 나온다. 요컨대 인식 능력을 갖추지 않은 토끼가 산속에 살면서 소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 진달래꽃, 바위 등 단순히 사물 그대로를 느끼면서 살겠지만, 인간은 이것들에 질서를 매겨서 개념으로 인식하고, 이것들을 다양하게 유용하면서 살아간다.

    3) 경험적 진리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선험적 감성 형식과 선험적 논리학)


    칸트의 구성설적 인식론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 주관은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어떤 형식을 통하여 인식 대상을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대상을 인식으로 구성하려면 인식 주관으로서의 사유 주체가 있어야 한다. 이 사유 주체는 선천적으로 구비한 어떤 형식에 관계하면서 대상에 관계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사유 주체가 구비하고 있는 앎의 사유 능력은 소위 이성理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을 그 작용 능력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감성感性(Sinnlichkeit)”, “지성知性(Verstand)”, “이성理性(Vernunft)”의 세 기능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감성과 지성은 넓은 의미의 이성으로 일컬어지고, ‘이성’은 좁은 의미의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식 주관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감각적인 경험의 소재를 받아들이는 수용收容 능력이다. 만일 감성이 마비되어 있다면 눈을 뜨고 밖을 보아도 대상에 대한 시각視覺이 형성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감성이 작동하더라도 때(시간)와 장소(공간)이라는 선행 조건이 없다면 대상은 감각될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감성에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형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이다.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있기 때문에 감각은 대상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감각이 받아들인 감각적인 직관들은 이미 시간과 공간의 선천적 형식에 의해 일단 통일적인 내용들로 정리되어 우리의 주관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성은 무엇인가? 인식 주관에 들어온 감각적인 다양한 직관 내용들은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아직 확실한 인식이 될 수 없다.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일정한 개념으로 종합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감각적 직관 내용들을 개념으로 통일시키는 능동적인 사유 능력이 바로 지성이다. 그러나 지성 또한 일정한 기준이 없이 제멋대로 사유할 수 없다. 그래서 지성에도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형식이 있어야 한다. 칸트는 그것을 바로 순수 지성 개념 혹은 범주範疇라고 말한다. 이 범주 형식이 인식 주관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감성과 지성의 두 기능이 결합하여 경험적 대상들에 대한 선천적 종합 판단의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감성과 지성이 결합하여 인식이 성립한다는 것은, 감성이란 감각적인 대상들의 실질적인 직관 내용을 얻어 내는 기능이고, 지성은 실질적인 감각적 직관 내용들을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개념적 진리로 산출해 주는 기능임을 의미한다. 감성과 지성의 협력으로부터 자연 세계에 대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지식은 확실하고 객관적이며 보편타당한 인식임을 보증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① 감성적 직관 형식(선험적 감성형식)
    칸트는 경험주의 입장을 받아들여 “모든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만일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면 인식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음을 함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 주관이 감각 기관을 통하여 외부의 어떤 것들을 경험한다면 외부에 어떤 것들이 미리 주어져 있어야 한다. 이 어떤 것들은 장차 인식으로 성립될 감각적 소재素材들이다.

    감각적 소재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는 이 소재들을 “질료(material)”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질료는 아직 ‘무엇이라고’ 할 수도 없고,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인식 주관에 의해 장차 어떤 것으로 감각되어질 소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소재를 칸트는 “잡다한 것(das Mannigfaltige)”들로 표현하고 있다. 잡다하다는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도 정돈되어 있지 않아서 질서가 없고 아직 감각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이러한 잡다한 질료들은 우선 일정한 표상에까지 끌어올려져야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일정한 감각적 표상으로 끌어올려지기 위해서는 무질서한 질료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해서 정돈되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감성이 수동적인 수용 능력이라고 해서 잡다한 질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어떤 일정한 “형식”(form)의 기능을 통해서 정돈된 상태여야 질료들을 감각적인 표상으로 반영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감성이 이렇게 감각적인 표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질서를 부여하고 정리하는 형식을 칸트는 감성 형식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감성 형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잡다한 질료들에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질료들을 직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에 앞서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어야 한다. 선천적이라 함은 경험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원리라는 뜻이다. 칸트는 감각적 경험에 앞서서 미리 감성에 구비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감성 형식을 ‘선천적(a priori)’이라고 말했고, 또한 동시에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무질서한 감각적 소재들에 능동적으로 관계해서 질서를 부여하고 정돈해 줌으로써 실질적인 감각적 직관 표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선험적(transcendental)”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감성 형식은 먼저 외부로부터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선천적’이요, 그러면서도 경험적으로 주어진 질료를 정리하여 직관 표상으로 성립시키는 기능이므로 글자 그대로 ‘선험적’이다.

    그러면 선천적으로 감성에 구비되어 있어서 잡다한 질료들에 질서를 매기는 선험적 감성 형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칸트는 이것을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상식의 수준에서 시간과 공간을 말할 때,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사물이 존재하는 장소와 사물의 운동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의 순서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칸트의 인식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적에, 인식의 주관 밖에 완성된 사물의 존재가 인식 주관의 의식에 그대로 사진 찍히듯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형식에 의해 일단 가공되고 정리되어야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질료로서 주어지는 내용이 우리 안에 있는 형식과 결합해야 어떤 감각적 표상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안에 있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형식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의 형식은 인식 주관 밖에 있고 이를 우리가 받아들여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식 주관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감성적 표상을 얻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 인식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선험적 감성 형식은 감성의 주관적 조건으로서 모든 감각적 지각에 관계하는 ‘보편적 제약’이다. 제약을 가한다는 것은 일단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하고 정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 하에서만 감성적 표상이 나오게 되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은 감성적 직관에 필수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성적 직관 형식으로서의 공간은 외적 감각에 제약을 가하는 외감外感 형식이고, 시간은 내적 감각에 제약을 가하는 내감內感 형식이다. 이러한 선험적 외감성 형식인 공간과 선험적 내감 형식인 시간은 직관 형식으로서의 몇 가지 특성을 가진다. :

    ⓐ 감성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은, 인식 주관의 외부에서 추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어떤 사고의 개념이 아니라, 인식 주관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감성의 직관으로 얻어지는 관념觀念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정한 물체를 인식한다고 할 때, 만일 물체의 병렬이나 사건의 전·후를 말해 주는 공간과 시간을 이끌어 내려 한다면, 병렬과 전·후라는 관념은 감성이 직관한 공간과 시간의 관념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공간과 시간은 실재적이 아니라 항상 관념적이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 먼저 밖에 존재하고 인식 주관이 이것을 받아들여서 관념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감성적 표상을 성립시키는 선험적인 관념 형식임을 의미한다. 만일 인식 주관 안에 이러한 선험적인 관념 형식이 없다면, 주관 밖의 대상들을 순서적이고 일정한 모양의 것으로 직관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만일 감각적인 직관 대상들을 인식 주관에서 모두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어떤 관념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은 실재적이 아니라 선험적 관념 형식이다.

    ⓒ 공간과 시간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개별적인 관념들이다. 물론 각각의 사물들에 대하여 말할 때 각각의 부분들을 점유하고 있는 개별적인 공간과 하나하나 병렬로 순서를 가지는 시간을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공간과 시간은 항상 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공간과 하나의 시간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공간과 시간은 단일한 표상의 직관적 관념이다.

    ⓓ 단일 표상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은 무한한 표상이다. 그러나 자체 내에 여러 가지 공간과 시간을 내포한다. 그러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은, 개별적인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공간과 시간이 전체로서의 단일한 직관 공간과 직관 시간 안에 있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은 전全 포괄적 무한 공간이며 무한 시간이다.

    ② 지성의 직관 형식(선험적 지성 형식)
    칸트에 의하면, 경험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은 두 줄기, 즉 감성과 지성의 종합으로 이뤄진다. 감성은 감각적 직관들을 받아들이는 수용 능력이고, 지성은 감성으로부터 받아들여진 감각적 직관 표상들을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사유하여 대상들을 보편적이고 필연적 개념으로 ‘구성’하여 인식하는 능력이다.

    예컨대 우리가 테라스에 앉아 화단의 ‘장미꽃을 본다’고 하자. 감각을 통해 우선적으로 ‘화단’에 피어 있는 장미꽃의 ‘그러그러한 모양’, ‘크기’, ‘빨간색’, ‘향기로운 냄새’, ‘줄기에 가시가 나 있는 상태’ 등의 다양한 직관 표상들이 주관 속에 들어온다. 이러한 표상들이 생기게 된 까닭은 우리의 인식 주관이 외부에 존재하는 질료적인 것에서 감성적 직관 형식인 시간과 공간을 통해 정돈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감성적 직관 형식인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인식주관에는 다양한 직관 표상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한 다양한 직관 표상들은 아직 명확한 대상으로 정돈되지 않은, 인식을 위한 무질서한 자료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관 속에 다양하게 있는 감각적 직관 표상들이 일정한 개념으로 정돈되어야만, ‘화단에 수십 송이의 장미꽃들이 피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다양한 감성적 직관 표상들을 일정한 개념으로 구성하는 것은 주관 속에 있는 지성의 사고 규칙을 통해서다. 지성의 사고 규칙 또한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는 선천적인 형식이다. 선천적인 형식은 다양한 감성적 직관들을 종합 정리하여 인식을 산출하는 것에 관계한다는 의미에서 칸트는 이를 지성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했다.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 감성 형식이라면, 선험적 지성 형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12가지의 범주範疇(Kategorie)이다.

    칸트가 제시한 12범주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 그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설정해 놓은 10가지 범주에서 힌트를 얻어 낸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는 실체의 운동 변화를 인식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언어 체계로 정리되었는데, 실체를 드러내어 인식하기 위해 수행된 술어 분석의 결과였다. 그가 술어를 분석함으로써 얻어낸 범주는 실체 범주, 질의 범주, 양의 범주, 시간의 범주, 공간의 범주, 능동의 범주, 수동의 범주, 소유의 범주, 관계의 범주, 상태의 범주로 도합 10개의 범주이다.

    칸트가 제시한 12범주는 기본적으로 말하면 4가지 범주에서 확장된 것이다. 4가지 기본 범주는 질의 범주, 양의 범주, 관계의 범주, 양상의 범주이다. 4가지 범주는 사고의 4가지 판단(양의 판단, 질의 판단, 관계의 판단, 양상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각기 3종류의 판단으로 확대하여 말하면 12판단이 나온다. 칸트는 사고의 12판단으로부터 형이상학적으로 12범주 형식을 도출해 낸다. 이와 같이 12판단에서 12범주를 도출해 내는 것을 칸트는 “선험적 존재론”이라고 했다.

    칸트에 의하면, 선험적 존재론으로부터 도출된 12범주 형식은 사실 우리의 지성이 이미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지성은 12범주 형식에 따라 감성적으로 주어진 다양한 직관 표상들에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관계하여 개념의 인식에로 종합 통일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4가지 범주 형식에서 도출된 12가지 선험적 범주 형식은 무엇인가.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 분량 범주는 대상이 하나인가(단일성의 범주 - 단칭 판단에서 옴), 총체적인가(총체성의 범주 - 전칭 판단에서 옴), 몇 개인가(수다성의 범주 - 특칭 판단에서 옴)에 따라서 셋으로 확대된다. 요컨대 장미꽃이 한 송이라면 단일 판단이기에 단일성의 범주로, 장미꽃 전체라면 전칭 판단이기에 총체성의 범주로, 두개 이상이라면 특칭 판단이기에 수다성의 범주로 분류된다.

    ⓑ 성질 범주는 대상의 성질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실제성의 범주 - 긍정 판단에서 옴), 성질이 실제로 없는가(부정성의 범주 - 부정 판단에서 옴), 성질이 제한적으로 있는가(제한성의 범주 - 제한 판단에서 옴)에 따라서 셋으로 확대된다. 요컨대 장미꽃이 현실적으로 있다면 긍정 판단이기에 실제성의 범주로, 현실적으로 없는 것이라면 부정 판단이기에 부정성의 범주로, 제한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제한 판단이기에 제한성의 범주로 구분된다.

    ⓒ 관계 범주는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속성으로서 존재하는가(실체성의 범주 - 정언 판단에서 옴),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가(인과성의 범주 - 가언 판단에서 옴), 실체들 간에 상호 어떤 관계가 있는가(상호성의 범주 - 선언 판단에서 옴)에 따라서 셋으로 확대된다. 요컨대 장미꽃이 개별적인 존재의 경우라면 정언 판단이기에 실체성의 범주로, 장미꽃에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면 가언 판단이기에 인과성의 범주로, 장미꽃이냐 다른 꽃이냐의 선택에 있어서는 선언 판단이기에 상호성의 범주로 구분된다.

    ⓓ 양상 범주는 어떤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불가능한가(가능, 불가능의 범주 - 개연 판단에서 옴),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실재, 비실재의 범주 - 실연 판단에서 옴), 필연적으로 있는가 우연적으로 있는가(필연성, 우연성의 범주 - 필연 판단에서 옴)에 따라서 셋으로 확대된다. 요컨대 하얀색 까마귀의 존재가 가능한가의 경우는 개연 판단이기에 가능이나 불가능의 범주로, 영혼의 존재가 실재하는가의 경우는 실연 판단이기에 실재나 비실재의 범주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한 경우는 필연 판단이기에 필연성이나 우연성의 범주로 구분된다.

    ③ 선험적 연역(선험적 관념론)
    칸트는 오직 경험적 대상들에만 한에서만 인식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의 인식론적 체계는, 경험적인 인식의 대상이 인식 주관 밖에 이미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있고, 이들을 인식 주관이 그대로 반영하는 모사설적 입장이 아니라, 인식 주관이 지성의 사유 작용에 의해 대상을 조직하는 ‘구성설’이다. 구성설에 따르면 인식의 대상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인식이 이뤄짐으로써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 주관 외부에 실재하는 객관적 대상은 “물자체”(Ding an sich)로서 전혀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인식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우리의 감각이 촉발되어 얻은 무질서한 감각적 직관 표상들이고, 이것들이 인식 대상이다. 이 무질서한 표상들은 인식 주관이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지성 형식(범주 형식)에 따라 정리되어 인식으로 구성되는 것이다(konstruieren). 대상의 인식을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구성해 가는 작업을 칸트는 “선험적 연역先驗的 演繹(traszendentale Deduction)”이라고 말한다. 선험적 연역의 과정에서는 다양한 감성적 직관 표상들이 선험적 범주 형식에 따라 인식 주관에 의해 정돈되고 통일되는데, 이것은 “선험적 통각先驗的 統覺(traszendental Apperzeption)”의 통일성이라고 말해진다. 선험적 통각의 통일성의 주체는 물론 인식 주관으로서의 “나(Ich)”이다.

    인식 주관으로서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인식의 종합을 수행하는 최고 형식으로서의 순수 자아(순수 지성)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는 순수 자아로서 ‘나’는 현실적으로 감각을 통하여 바라보고 있는 주관적인 나, 즉 이 순간에 경험적으로 체험하는 개인적인 나로서의 주관이 아니다. 인식 주관의 ‘나’는 나의 앎의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묶어 주는 ‘전체적인 나’로서 논리적 구속력과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그런 ‘나’이다. 왜냐하면 감성과 지성은 인식 주관의 두 기능이고, 감성 형식과 지성 형식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공통적이고 객관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인식 주관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주관을 칸트는 “순수 통각純粹 統覺” 혹은 자아의 “의식 일반意識 一般(Bewustsein ȕberhaupt)”이라고 했다. 즉 적극적인 개념의 인식을 산출하는 순수 통각은 논리적인 주관 혹은 인식론적 내지는 선험적 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인식을 객관적으로 구성하고 조직할 논리적 주관 혹은 인식론적 내지는 선험적 주관으로서의 ‘나’가 확립되었다. 그럼 ‘나’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이 아닌, 확실하고 객관성을 가진 타당한 인식을 어떤 방식에서 산출할 수 있게 되는가? 그것은 의식의 종합, 재현의 종합, 인식의 종합이라는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먼저, 의식의 종합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선험적 인식 주관인 내가 다양하게 주어진 감성적 직관 표상들을 하나의 의식 속에 묶어 놓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직관 표상들 자체에 대한 의식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표상들에 대한 의식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종합적인 통일이 가능하다. 의식의 종합적인 통일은 모든 지성이 사용하는 선험 철학이 성립하는 곳이며, 이런 능력은 바로 순수 지성 자체이다. 인식 능력으로서의 순수 지성은 감성적 직관 표상들로부터 개념적 표상을 형성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재현의 종합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지성의 선험적 범주 형식과 선험적 통각으로서의 인식 주관인 ‘나’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나’이다. 재현의 종합이란 이러한 선험적 인식 주관으로서의 내가 한번 주관에 표상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그런 ‘나’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이 물체가 무겁다’고 진술한다면, 이는 지성의 선험적 범주 형식을 통해서건 순수 통각으로서의 자아 의식 일반에 의해서건 선험적인 종합의 산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 일반은 분명히 객관적인 타당성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인식의 종합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식의 대상들은 인식 주관 밖에 객관적으로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 주관의 구성적인 사고 형식을 통해서 지각되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인식의 종합은 지성의 인식 주관이 감각을 통해 형성된 모든 감성적 직관 표상들에 대하여 의식의 종합과 재현의 종합을 통하여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하게 됨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인식의 종합에 이르러서야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진 소재들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선험적 형식을 부여하여 질서를 매기고, 이로부터 개념의 인식에까지 끌어올리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진리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인식 주관이 자연에 법칙성을 부여하여 객관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설명한 것이나 진배없다. 이렇게 선험적 주관의 작용에 의해서만 대상의 인식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인식론은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말해진다.

    4) 선험적 분석론(변증법적인 가상의 세계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감성에서 시작하여 지성에서 개념으로 구성되고 이성에서 매듭지어진다.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사실 세계에 대하여 우리의 인식 주관이 확실하고 참된 진리 인식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었다. 사실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은 인식 주관이 감각적인 다양한 감성적 직관 표상들을 대상으로 삼아 선험적인 지성이 종합적으로 사유하여 구성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성립하는 경험적인 대상들에만 관계된다. 즉 인식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대상들에 관해서만 타당하다는 얘기다.

    칸트가 제시한 인간의 사유 능력은 세 부분, 즉 감성적 사유, 지성적 사유, 이성적 사유다. 앞서 감성과 지성은 넒은 의미의 이성에 포함되고, 이성의 고유한 사유 능력은 좁은 의미의 ‘이성’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경험의 가능성을 넘어선 초감각적인 세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좁은 의미의 ‘이성’, 즉 이론 이성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차례다.

    칸트는 경험의 대상이 아닌, 초감각적인 것들에까지 사유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론 이성의 사유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론 이성의 사유 대상은 감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개념들, 즉 선험적 “이념들(Ideen)”이다. ‘이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관념’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개념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의 가능성을 넘어서 선천적으로 생겨난 ‘개념(Begriff)’을 말한다. 이러한 초감성적인 개념들이 진리 인식에 대립해 있다는 의미에서 칸트는 이를 “이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념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 이성의 고유한 활동은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지 않는 추론推論이다. 추론은 전제前提로부터 결론結論을 이끌어 내는 작업이다. 즉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가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동물은 죽는다’는 대전제로부터 추론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일 ‘모든 동물은 죽는다’는 대전제가 또한 증명될 필요가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대전제’를 깔아야 한다. 더 큰 대전제가 증명되려면 ‘가장 큰 대전제’를 깔아야 할 것이다. 이성의 활동은 결국 가장 큰 전제를 탐구하는 요구, 즉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을 만들어 내는 원리라 할 수 있는 근원적인 ‘이념’에 대한 사유에 이르게 된다.

    이념은 직관을 개념으로 만들어 나가는 구성적인 원리가 아니다. 이념은 감각에 주어지지 않는 초감성적인 것이고, 반면에 진리 인식은 직관과 사고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감각을 넘어선 선험적인 이념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념은 허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론 이성이 사유하는 이념이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대상은 아니다. 이성은 사고하는 지성의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로써 이념은 지성이 사용하는 것을 실현시켜 나가게 하는 규제적인(regulativ) 원리가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념은 오직 총체적인 조건들 속에서 통일성을 추구하나 아직 통일성을 가지지 못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이론 이성은 영혼의 현상을 전제로 삼아 이것들을 통일시켜 묶어서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영혼은 이론 이성이 그저 발견해 낸, 순수 사유 내용으로서 발견해 낸 영혼이지, 대상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합리주의 인식론자들은 순수 이성의 진리성을 확고하게 믿은 나머지 사고의 내용과 대상적인 존재가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독단적인 형이상학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라고 칸트는 비판한다.

    그럼 규제적인 원리로서 어떤 종류의 이념들이 있을까? 칸트는 이념들을 ‘관계 범주의 형식’으로부터 선험적으로 이끌어 낸다. 즉 관계 범주의 여러 형식으로부터 선험적으로 이끌어 낸 것은 사고와 경험적 인식을 최고의 종합으로 높일 수 있는 통일적인 개념으로 영혼, 세계, 신이라는 세 가지 위대한 이념들이다. 이것들이 이론 이성의 사유 대상이 되는 셈이다. 영혼은 합리주의자들이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수립했던 내적인 규제적 제1원인으로서의 심리학적 이념이고, 세계는 자연 학자들이 탐구해 온 모든 외적 경험의 목표로서의 우주론적 이념이며, 신은 존재의 근원적인 실재로서 탐구해 온 모든 경험의 내외적인 목표로서의 신학적 이념이 된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이론 이성의 사유 대상인 이념들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형이상학적인 실체로서 탐구했다. 요컨대 합리주의 선구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하여 사유하는 주체로서 영혼의 실체를 주장했다. 영국의 경험론자 로크는 지성 밖의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객관적인 ‘제1실체’를 내세웠다. 반면에 흄은 영혼이란 실체가 아니라 지각의 묶음이라고 했다. 칸트는 영혼이 실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영혼의 실체성을 증명하는 작업이 곧 그릇된 추리(Fehlshluß)에 빠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론 이성의 대상을 과거의 철학자들이 탐구했던 것과는 달리, 『순수이성비판』에서 변증법辨證法적인 “가상假象의 세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칸트는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二律背反”을 예시하고 있다. 칸트는 세계 전체에 관한 이성의 사유에서 이율배반이 성립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질, 양, 관계, 양상의 범주에 따라 네 가지 점에서 이율배반이다. :

    ① 양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세계는 시간적으로 시초가 있고 공간적으로 한계가 있다(명제) - 세계는 시작도 없고 한계도 없는 무한의 연속이다(반反명제)

    ② 질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세계의 모든 통일적인 실체들은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실재하는 것은 단순한 것이거나 이것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체들이다(명제) - 실재하는 것은 복합체가 아니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반명제)

    ③ 관계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세계에는 자연 법칙에 따르는 인과율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자유에 의한 인과 관계가 있는 것도 인정해야한다(명제) - 자유란 없고 오직 자연 법칙에 따른 인과율의 필연 법칙만이 있을 뿐이다(반명제)

    ④ 양상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세계의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으로서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존재가 실재해야 한다(명제) - 궁극의 원인으로서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것은 세계 안에도 밖에도 없다(반명제)

    이와 같이 칸트는 네 쌍의 명제와 반명제를 증명해 간다. 만일 명제가 참이면 반명제는 거짓이다. 그래서 둘 다 동시에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에 이율배반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왜 존재하게 되는가? 이는 감성의 대상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론 이성은 원래 경험적인 세계를 떠나서 초감성적인 대상에 관계해서 사고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감성에서 받아들인 것만을 사유한다면 모순은 없고 오직 실제적인 진리 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주장을 근거로 삼는다면, 이론 이성의 대상인 이념들은 감성적인 직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지만 참된 인식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러한 이념들에 대해 『실천이성비판』을 내면서 적극적인 탐구를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실천 이성은 목적이 지배하는 이념의 세계를 요청한다(postulat)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천적인 학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념이 승인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론 이성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세계(자유), 영혼, 신의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이념들을 실천 이성이 실천적으로 요청하여 해결하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칸트는 ‘이론 이성’보다 ‘실천 이성’을 우위優位에 두고 있음을 본다.

    ☞ 다음 호 내용: 《오늘날의 철학》1. 다양하게 전개된 철학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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