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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 김씨金氏


    김씨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김씨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992만 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수로왕계의 김해 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의 신라 김씨 계통이다. 그 외에 우리나라에 귀화한 김씨도 있다. 김씨의 본관 별 인구 수를 보면 김해 김씨가 445만 6천 명으로 가장 많고, 경주 김씨가 180만 명, 광산 김씨가 92만 6천 명, 김녕 김씨가 57만 7천 명, 안동 김씨가 51만 9천 명이다. 그 외에도 의성 김씨(28만 7천 명), 강릉 김씨(17만 9천 명), 선산 김씨(13만 8천 명) 등이 있다(2015년 인구센서스, 통계청). 사실 김씨라는 한자 성을 사용하는 인구는 중국과 만주 등 동아시아 지역에 매우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금金나라의 金이라든지, 중국 성씨 중에 金씨는 우리나라의 김씨와 깊은 연관이 있다. 김씨는 고려 때까지 금金씨로 불렸는데, 음양오행에 따라 이씨 조선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을 염두에 둔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쇠 금이 아닌, 성 김으로 바꿔 불렀다는 설이 있다.

    설화로 보는 김씨의 유래
    김씨의 탄생 설화는 잘 알려진 대로 『삼국사기』의 김알지 설화(AD 65년)와 『삼국유사』의 김수로 설화(AD 42년)가 있다. 그중 김수로왕 탄생 설화는 다음과 같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상사일에 구지봉龜旨峰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九干 등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중략) 구간 등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춤을 추자, 하늘에서 자색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 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김알지 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65년(탈해왕 9년) 8월 4일 왕이 밤에 금성金城(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호공이 시림 속에서 큰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 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어 왕께 아뢰었다. 왕이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이는 박혁거세의 옛 일과 같으므로, 박혁거세를 알지閼智(지혜가 뛰어나 이름을 ‘알지’라고도 함)라 한 선례에 따라 이름 지었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 아기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하였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태자로 책봉하니 그가 곧 김알지이다. 그리고 시림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이렇듯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김씨의 유래를 보면, 그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금석문金石文이 전하는 김씨의 뿌리
    우리는 금석문을 통해 김씨의 유래에 대해 설화보다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의 비문과 추사 김정희가 밝혔다가 200년이 지난 1961년에 우연하게 발견된 문무왕 비문이 그것이다. 먼저 『삼국사기』에 전하는 김유신 비문에는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小昊之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김인문의 비문에도 나와 있다. 또한 중국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궈자탄郭家灘에서 출토된 ‘김씨 비문’에는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少昊金天씨이다.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의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을 하였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투후秺侯)에 봉하시니, 7대에 걸쳐 벼슬하매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중략) 한이 난리가 나서 괴로움에 처하자 멀리 피해 요동遼東에 살게 되었다. (중략)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이하 생략)”라고 적혀 있다. 특히 다시 발견된 문무왕 비문의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 비문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5행),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문무왕의 15대조 성한왕을 신라 김씨의 시조 대보공 김알지로 추정했다. 투후 김일제는 한 무제 때, 흉노(훈족) 휴도왕의 태자였다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이다. 종합하면 신라의 김씨들은 자신들의 내력이 멀리는 소호금천씨(동이족의 성왕, BCE 2598∼BCE 2514)로부터 시작했고 가까이는 흉노의 왕자 김일제에서 김알지로 이어진다고 믿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씨가 많은 이유


    김씨가 많은 이유에 대해 “김씨가 역사에 등장한 지 오래되어서”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김씨보다 먼저 등장한 박朴씨가 김씨보다 훨씬 적은 사실에서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씨 이전에 고구려·백제의 왕족과 귀족들도 성을 사용했다. 고구려의 왕실의 고高씨와 백제의 여덟 성姓은 현대까지 이어져 오지 못했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김씨 성이 유독 많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적잖은 수의 귀화인歸化人이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

    일본에서 귀화한 김씨들
    김해 김씨 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귀순한 일본군 장수 김충선金忠善을 시조로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사성賜姓 김해 김씨 혹은 우록友鹿 김씨라고 한다.  원래 이름이 사야가沙也可인 김충선은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했다. 유교적 소양을 갖고 있던 그는 조선의 문물을 흠모해 휘하 병졸 3000명을 데리고 조선에 투항했다. 이후 그는 경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하) 품계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 귀순한 일본인으로는 김상의金尙義라는 사람도 있다(일본 성명은 전해지지 않음). 김충선이나 김상의에 앞서 귀화한 일본계 김씨들도 있다. 조선 세종 때 귀화한 김호심파金好心波, 성종 때 귀화한 김삼보라사야문金三甫羅沙也文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일본에서 쓰던 이름에 김씨 성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후손도 적지 않겠지만, 일본계 귀화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뿐이다.

    중국에서 귀화한 김씨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귀화한 김씨 중 가장 많은 것은 여진족에 뿌리를 둔 김씨다. 육진六鎭 개척 당시 세종은 귀화한 여진족 수백 명에게 김씨 성을 하사했다. 귀순 여진족들에게 김씨 성을 내린 것은 12세기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와 관련이 있다. 아골타의 조상은 고려에서 건너간 김함보金函普라고 한다. 어쩌면 여진족들이 귀화하기 이전에 김씨 혹은 그에 해당하는 여진 성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하나도 없다. 여진족을 조상으로 하는 김씨가 없는 것은 후대에 자손들이 모화사상慕華思想 때문에 그들의 출신을 감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우리 주변의 김씨들 중에는 그들의 후예가 적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진족이 잡거雜居하다가 점차 조선의 영토로 편입된 함경도와 평안도에 유난히 경주 김씨 집성촌集姓村이 많다는 사실이다. 영양英陽 김씨와 태원太原 김씨는 당나라에서 귀화한 김씨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 귀화해 온 김씨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나오는 김완귀金完貴, 김용金龍, 김춘산金春山, 김남길金南吉, 김길장金吉狀, 김성金聲, 김융金隆, 김준金俊, 김귀金貴 등이 그들이다.  

    북한의 김씨
    1960년대 어느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인의 족보』라는 책에는 일제 시대의 자료를 바탕으로 지역별 집성촌 호수戶數 기록이 나와 있다. 이에 의하면 함경도 지역에 100호가 넘는 경주 김씨 집성촌이 여러 곳 있었다. 집성촌은 대개 일개 면面에 특정 성씨가 수십 호인 것이 보통인데, 함남 영흥군 억기면咸南 永興郡 憶岐面의 경주 김씨 집성촌은 200호가 넘었다.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일원에는 260여 호가 있었다. 평안북도 의주義州와 벽동碧潼에도 경주 김씨가 많이 거주했다. 경주 김씨의 본관이 있는 영남권 못지않은 집성촌이 함경도와 평안도에 많았다. 참고로 북한 김일성金日成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이 “나는 전주 김씨인데, 내 시조 묘소가 전라도에 있다 하니 남조선 방문하면 참배하겠다.”고 해서 알려졌다. 전주 김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재상을 지낸 김태서金台瑞다. 그의 묘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자락에 있다고 한다.

    김해 김씨


    2015년 조사에서 김해 김씨는 445만 6천 명이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의 수로왕 탄생 연대가 서기 42년으로 되어 있으니, 서기 65년 신라계 김씨의 시조인 대보공 알지의 탄생 연도보다 23년이 빠르다. 우리나라에서 한자로 된 성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성씨 중 하나다.

    시조 김수로왕
    왕위에 오른 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왕비로 맞았는데, 수로왕과 왕비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다. 그중 태자를 통해 김씨 성을 잇게 하고, 다른 두 왕자에게 허씨 성을 주어 모후母后의 성을 계승케 했다. 그리고 나머지 7왕자는 출가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가야계 성씨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許氏, 김해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하양河陽 허씨, 양천陽川 허씨가 있다. 그리고 당나라로 갔다가 중국 황제로부터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은 고려 현종 때의 상서좌복야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仁川 이씨, 양산梁山 이씨가 있다. 이들은 성과 본관을 달리하지만 다 같이 수로왕을 시조로 삼고 있고 서로 통혼을 하지 않는다.

    분파와 갈래
    김해 김씨의 인물로는 수로왕을 비롯한 가야의 10왕이 있다. 마지막 양왕讓王(재위: 521년~532년?, 구형왕仇衡王)의 아들은 3명이 있었는데, 첫째가 노종奴宗이고, 둘째가 무덕武德, 셋째가 무력武力이다. 그가 신라에 항복하자 그의 삼남 무력은 신라의 각간을 역임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무력의 아들이 서현舒玄이고, 손자가 유신庾信이다. 김해 김씨는 중시조 김유신 이후 148개 파로 나뉘어졌다. 그중 경파卿派, 사군파四君派, 삼현파三賢派, 그리고 문경공파文敬公派가 가장 많다. 경파는 김유신의 직계손인 김목경金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지면서 생겨났다. 사군파는 목경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고려 말에 예의판서, 대제학에 오른 김진문金振門과 조선시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김완金完이 유명하다. 그리고 삼현파는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파로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 때 참수당한 김일손金馹孫과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가 유명하다.

    하지만 김해 김씨에 대한 논란도 없지 않다. 신라에서 김씨 성을 쓰게 된 것은 진흥왕 때부터인데 그 이전 가야 시대에 김씨金氏와 허씨許氏를 나누어 쓴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가이다. 또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의 이름이 한자식으로 허황옥인 것도 잘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김해 김씨 일족이 신라와 고려조를 지나면서 일부가 허씨 성을 얻거나 이씨 성으로 변성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아야 한다.

    주요 인물들
    김유신金庾信은 김해 김씨의 중시조인데, 동생을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에게 시집보내고, 그의 딸(지소부인)을 아내로 맞았다. 성골에서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자, 매부인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에 세웠으며, 태종무열왕·문무왕와 함께 삼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 후 42대 흥덕왕興德王에 이르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통일 신라 후대에 와서 김해 김씨들은 신라계 김씨의 차별에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김해 김씨는 많은 문·무 명신을 배출했다. 고려 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과 명신名臣·공신功臣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김해 김씨 가문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김해 김씨 문중이 조선 시대 쇠락을 면치 못한 것은 ‘무오사화戊午士禍’ 등 많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김일손金馹孫은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사초를 썼다. 하지만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하고, 상소하여 원한을 샀다. 그러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실었다가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의 모함을 받았다. 그로 인해 발생한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김일손은 참수斬首되었다.

    김홍도金弘道는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로 판화를 그렸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으며, 조선의 3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대건金大建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神父이다. 1845년 상하이에 가서 한국인 최초로 신부직을 받았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현대 인물로는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이 있다. 그는 김해 김씨 경파의 한 갈래인 안경공파의 사람이다. 이외에도 김종필金種泌 전 총리(전 자민련 총재)와 김형오金炯旿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김기춘(전 법무부장관), 김성기(전 법무부장관), 김근수(전 국가보훈처장, 전 국회의원), 김상현(전 국회의원), 김성곤(전 국회의원, 쌍용그룹 창업주), 김영배(전 국회의원), 김용갑(전 국회의원), 김무성(국회의원, 전 한나라당 원내총무), 김부겸(국회의원), 김홍신(소설가, 전 국회의원),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 김혁규(전 국회의원, 경남지사), 김중권(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종곤(전 해군참모총장, 전 국회의원), 김정길(전 행자부장관, 전 국회의원)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경주慶州 김씨


    한국의 김씨는 가야계 김씨와 사성 김해 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 신라계 김씨이다. 신라계 김씨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며, 전체 인구는 김씨 인구 1,072만 명(2010년 인구센서스) 중 630만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뿌리이면서 다른 성씨를 쓰는 9개 본관의 인구를 더하면 신라계 김씨는 700만 명이 넘는다. 신라계 김씨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본관은 경주慶州 김씨이다. 2015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경주 김씨는 총 180만 명으로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에 이어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연혁과 갈래
    2010년 ‘신라김씨 총연합대종원’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라계 김씨의 본관은 총 356개이며 다른 성씨를 쓰고 있는 본관은 9개(감천 문씨·강릉 왕씨·곡산 연씨·광주 이씨·수성 최씨·안동 권씨·영양 남씨·철원 궁씨·태안 사씨)이다. 이 9개를 제외한 356개 본관 중에서 경순왕敬順王을 뿌리로 삼는 본관은 총 179개이며, 177개 본관이 대보공 김알지를 뿌리로 삼고 있다. 또 대보공 김알지를 뿌리로 삼고 있는 본관도 각각 내물왕(안성 김씨), 태종무열왕(강릉 김씨 등 4개), 신무왕(광산 김씨 등 9개), 헌안왕(광주 이씨 등 4개), 희강왕(성주 김씨), 문성왕(선산 김씨 등 2개)을 시조로 하는 성관姓貫으로 나뉜다. 하지만 신라계 김씨의 분화는 경순왕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조차도 자신을 신라계 김씨로 인식하였을 뿐, 본관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현재 김부식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신라삼성연원보’에 따르면 경순왕의 후예라고 주장된다). 현재 경주 김씨는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을 시조로 하는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을 시조로 하는 대안군파大安君派, 경순왕의 후예이지만 중간 세계가 실전失傳된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는 대장군파大將軍派, 경순왕의 아들 김은열의 후손인 김인관金仁琯을 시조로 하는 태사공파太師公派, 같은 김은열의 후손인 김장유金將有를 시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등 5개 파가 주종을 이룬다.

    주요 인물들
    신라에서 김씨는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 총 38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그중 첫 김씨 왕이 13대 미추왕이며, 17대 내물왕 이후로 김씨 왕권이 확립되었다. 그 후 52대 효공왕 이후 박씨에서 3명의 왕이 나왔다가, 다시 김씨인 경순왕으로 이어진 후 막을 내렸다. 경주 김씨를 논하면서 신라의 38왕에 대하여 거론해야 하지만, 신라 38왕은 신라계 김씨 중 어느 한 본관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경주 김씨 인물로 거론하기 힘들다.

    고려 때의 인물로는 김부식金富軾이 있다.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에게 귀의하여 경주 지방의 호장이 되었다. 그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집필하였다. 말년엔 관란사를 짓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조선 정조 시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영조의 부마인 김한진이 후손이 없자, 양자로 들어간 김이주의 손자이다. 벼슬길에 오른 후 사절단으로 북경 왕래를 하였고, 그 경험이 학문적 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9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는데, 이때 추사체라고 불리는 글씨는 물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이 완성되었다. 또한 문무왕 비문을 해석하는 등 금석학 연구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김홍집金弘集은 개성 유수를 지낸 김영작金永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주교도이자 개화사상에 식견을 지닌 부친의 영향을 받았으며, 박규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급진 개화파였던 김옥균과 대별되는 온건 개화파의 수장으로 유명한 그는 1차에서 4차에 걸쳐 김홍집 내각의 수장이 되어 갑오개혁 등을 이끌었다.

    현대 인물 중에 경기도지사를 두 번 역임한 김문수金文洙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우승한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역시 경주 김씨이다.

    광산光山 김씨


    광산光山 김씨는 신라 왕자의 하나로 알려진 김흥광金興光이 광주 지역(광주시 서일동과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 잡으면서 ‘광산’이라는 본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는 김해 김씨·전주 이씨·밀양 박씨·경주 김씨·경주 이씨·경주 최씨·진주 강씨 다음으로 8위에 속하며, 인구는 92만 6천 명이다(2015년 인구센서스, 통계청).

    분파와 갈래
    신라 말기에 혼란스러운 경주를 피해 무주武州(지금의 광주시)에 터전을 잡은 김흥광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로 전해진다. 김흥광은 그의 아들 김식金軾이 각간에 오르고, 손자 김길金吉 때에 고려에 귀의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고려 시대에 대대로 8명의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급)를 배출함으로써 ‘평장동’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광산을 본으로 삼은 때는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된 고려 초기 이후로 판단된다.

    광산 김씨는 세계를 내려오면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중 광산 김씨 내에서는 양간공파·낭장공파·문숙공파·문정공파·문원공파·사온직장공파 등 6개 파가 생겨났고, 각 파는 또다시 수많은 지파로 나뉘어졌다. 아예 새로운 성이나 본관을 만들어 나간 파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로 김흥광의 31세손이면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장군을 시조로 하는 용안 김씨龍安金氏가 있다.

    용안 김씨는 김덕령 장군이 무고로 옥사를 하고 부인도 자결을 하자, 홀로 남은 아들 김광옥金光沃이 전북 익산군 용안면에서 은거하다, 외숙인 이인경의 임지인 평안도에 가서 정착한 데서 유래한다. 현재 인구는 50가구 244명(1985년 인구조사)으로 서울과 부산 등에 거주하고 있다.

    그 외 은진恩津 김씨도 있다. 은진 김씨의 시조는 김전개金田槪이다. 그는 광산 김씨 별파인 감찰어공파의 사람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판관이 되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그의 본관이 광산이고, 후손들의 분포지는 관서 지방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후손들이 은진(논산시)에서 관서로 이주한 것 같다. 이들은 평안북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서울 경기 등에 89가구 53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시조 김흥광의 14세손 김경량의 아들인 김수金須를 시조로 하는 초계草溪 김씨가 있다. 문과에 급제한 후 영암부사로 간 그는 삼별초군이 제주에 몰려들자 부하들과 제주를 지키려다 전사했다. 그 후손들이 광산 김씨에서 분파한 후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충남과 서울, 부산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은 총 189명(1985년 인구조사)으로 파악되었다.

    또 다른 분파로 보령保寧 김씨가 있다. 보령 김씨는 중종 때 예조판서를 역임한 김극성金克成을 시조로 하는 파와 김극성 후손으로 병조정랑을 지내고 보령에 정착한 김억적金億積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 보령 김씨는 남한에 579가구 24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을 지낸 김태진金泰辰을 시조로 하는 남해南海 김씨가 있다. 김태진은 광산 김씨 문숙공하 판도판서공파인 김극신의 증손인데,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했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이후 어찌된 연유인지 몰라도 남해에 정착하게 되었다. 후손들은 경기 김포와 서울 성동구 일원에서 살고 있다. 남해 김씨의 인구는 총 539명(1985년 인구조사)이며, 주로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청거淸渠 김씨가 있다. 청거 김씨의 시조 김승진은 김흥광의 16세손으로 화평군에 봉해진 충숙공 김심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상호군을 지내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광산 김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청거(진안군 속면)로 정한 것 같다.

    그외에도 김남우金南雨을 시조로 하는 무주茂州 김씨, 김천리金天利를 시조로 하는 무풍茂豊 김씨 등도 광산 김씨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구체적인 분적 기록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광산 김씨에서 아예 성씨를 바꾼 성관姓貫도 존재한다. 사씨舍氏가 그들이다. 사씨는 원래 광산 김씨였는데, 10대조 김극윤金克胤이 사씨로 개성하였다고 전한다.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한 사씨는 2000년 조사 때는 2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요 인물
    광산 김씨는 김흥광의 10세손인 김체의 아들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의 형제 대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김광세의 후손으로는 고려 시대 삼별초의 난 때 순절한 대장군 김경량이 있고, 조선 세조 때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김성원金性源이 있으며, 손자인 김구金絿는 조광조와 함께 혁신 정치를 도모하다 사사된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속한다. 특히 김구는 필법과 문장에 뛰어났다. 그로 인해 그가 살던 인수방 마을 이름을 딴 인수체仁壽體라는 필체가 생길 정도였다.

    김광존의 후손을 보면, 그의 고손자 김진이 대제학에 올랐고, 김정의 아들 김약채金若采 이후 광산 김씨의 화려한 명맥이 이어졌다. 고려 시대의 문신 김정金鼎은 추성보리공신에 책록되고, 벼슬은 중대광重大匡(종1품)에 이르렀고 광성군光城君에 봉군되었으며, 김약채·김약항·김약시 등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특히 김약채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 자리를 잡아 훗날 기호학맥의 본거를 형성하는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 등을 배출하였다. 김장생에서 시작된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와 견주며, 조선 학맥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사계 김장생의 단일 후손에서는 7명의 대제학이 배출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 시대 광산 김씨에서 배출된 인물만 하더라도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인경왕후)이 있고, 조선 시대에 문과 269명, 무과 7명, 사마시(생원 진사를 뽑는 과거) 275명, 역과(번역관) 15명, 의과 4명, 음양과(천문 지리)에 1명, 율과(잡과 중 하나)에 1명, 주학에 19명 등 58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현재도 수많은 인물이 광산 김씨에서 배출되고 있다. 최근 작고한 김수환金壽煥 가톨릭 추기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외에도 꽃을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한 김춘수 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황식 총리 등이 있으며, 김숙희(전 교육부 장관), 김하중(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장수(전 국방부 장관) 등과 김대중(조선일보 전 주필), 김용옥(철학과 교수), 김희수(김안과 병원장, 건양대 초대 총장), 김택수(전 국가대표 탁구선수), 김용건·김아중(영화배우) 등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김녕金寧(금녕) 김씨


    김녕金寧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넷째 아들인 김렴金濂을 시조로 하고, 고려 인종 때 병부시랑으로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광록대부를 거쳐 평장사에 올라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진 김시흥金時興(시호 문열文烈)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2015년 조사에서 김녕 김씨 인구는 57만 7천 명으로 조사됐다.

    분파와 갈래
    김렴의 후손으로는 첫째 품언稟言을 시조로 하는 수원水原 김씨가 있으며, 둘째 심언審言을 시조로 하는 영광靈光 김씨가 있다. 그 중 김품언이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공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수성군水城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 중에서 수원 김씨, 인동仁同 김씨, 용성龍城 김씨, 용담龍潭 김씨, 서흥瑞興 김씨, 한남漢南 김씨, 용궁龍宮 김씨, 풍산豊山 김씨, 김녕 김씨, 김해 김씨(법흥파) 등이 생겨났다.

    금녕 김씨이면서 김인찬金仁贊을 시조로 하는 양근楊根 김씨(또는 김해 김씨 북청파, 경주 김씨 익화군파), 조선 단종 때 계유정난을 피해 황해도 풍천에 숨어 들어가 세거지를 삼은 김해군수 김춘金春를 시조로 하는 김해金海 김씨 법흥파法興派가 있으며, 계유정난으로 멸문의 화를 당했던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사육신의 한 사람, 시호는 충의공忠毅公)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백촌공파白村公派도 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진 김준영金俊榮을 시조로 하는 분성盆城 김씨가 있고, 그 외 결성 김씨도 같은 갈래의 성씨이다. 그중에서 김해 김씨 법흥파와 백촌공파는 인구조사에서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사성 김해 김씨와 구분되지 않아 김해 김씨로 함께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김녕 김씨에 속해 있는 인구는 조사 숫자에 20만 정도를 더해 줘서 65만 정도로 추정하는 것이 근사치라 할 것이다.

    김녕 김씨가 복잡한 이유
    김녕 김씨가 복잡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김녕(김해의 옛 지명)이라는 지명 때문이다. 김해는 신라에 병합되면서는 금관군金官郡으로 되었다가 문무왕 때는 금관소경, 경덕왕 때는 김해소경으로 불렸다. 하지만 고려에 들어오면서 김해부金海府 또는 금주金州라고 불렸고, 다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그 후 1895년이 되어서 김해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렇게 관향의 지명에 따라 김해 김씨(후김後金)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조선 시대에는 가야계의 김해 김씨(선김先金)와 구분이 모호하여 혼란을 주었다. 결국 김녕 김씨는 고종 때 이르러 왕에게 상소한 다음 자신의 성씨를 김녕 김씨로 쓰게 되었다. 하지만 교통과 소식이 원활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일부는 그대로 김해 김씨를 성관으로 쓰고 있다(김해 김씨 법흥파, 북청파).

    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던 세력을 숙청한 계유정난으로 김문기金文起와 그의 아들 현석玄錫이 참수를 당하고 멸문의 화를 입게 되자, 가문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도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김문기(이조판서 김관의 아들)가 역적으로 몰린 뒤 김해 김씨(후김)라는 이유만으로 수난을 당하게 되자, 성관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그 후 200년이 지난 영조와 정조 시대에 들어와 복권되고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지자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갈라진 역사가 오래된 만큼 통합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다른 성관으로 살아왔고(경주 김씨 백촌공파), 일부는 김해 김씨라는 성관 명칭을 고집하고 있기도 하다(김해 김씨 법흥파, 백촌공파, 북청파). 또한 같은 계통의 일부는 다른 성관으로 바꾸어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경주 김씨 익화군파, 양근 김씨, 분성 김씨 등).

    주요 인물들
    중시조 김시흥金時興은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였다.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으로 금주군(지금의 김해)에 봉군되어 김녕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인찬金仁贊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 조선 개국 일등 공신이 되고, 익화군益和君(익화는 지금의 양평)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경주 김씨 익화군파, 김해 김씨 북청파, 양근 김씨 등으로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그의 아들 종남은 예조전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문기金文起는 시조 김시흥의 9세손이며, 이조판서 김관의 아들로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다. 호조참판과 함길도절제사를 지냈고, 둔전법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뒀다. 세조 때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계유정난 때 군대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실패하고,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사육신死六臣). 이때 영월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아들 현석도 함께 순절했으며 부인과 딸, 며느리 등은 세조 공신들의 노비로 넘겨졌다. 정조에 의해 복권되고 시호로 충의공이 하사되었다.

    김홍일金弘壹(김해 김씨 법흥파)은 평북 용천에서 출생했으며,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귀주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거쳐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현대 인물로는 대한민국의 14대 대통령 김영삼金永三(김녕 김씨 충정공파)이 있다. 이외에도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석수(분성 김씨에서 후에 김녕 김씨로 변경),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규, 김법린 전 문교장관 등이 유명하며, 음악가이자 지휘자인 금난새 씨도 김녕 김씨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안동安東 김씨


    현재 안동安東 김씨에는 뿌리가 다른 두 개의 성관이 존재한다. 선先(또는 구舊) 안동 김씨와 후後(또는 신新) 안동 김씨가 그것이다. 선 안동 김씨는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고,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평하여 상락군 개국공신에 봉해진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반면 후 안동 김씨는 안동의 성주로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개국공신 삼광태사에 오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두 안동 김씨는 2015년 통계청 조사에서 519,719명으로 조사되었다

    선(구)·후(신) 안동 김씨로의 분파와 인구
    선(구) 안동 김씨의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의 아들과 손자들이 고려 말에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 전기에는 김영후金永煦의 후손들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현재 15개 파가 존재한다. 그중 김익달金益達의 제학공파, 김사렴金士廉의 안렴사공파, 김사형金士衡의 익원공파가 60∼70%를 차지한다.

    후(신)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가 정승이 되면서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 이후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후 안동김씨의 막강한 세도정치가 펼쳐졌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7,7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동 김씨의 시조 출생 연대나 안동을 본관으로 삼은 시기를 보면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후(신) 안동 김씨가 앞서 있다. 그런데 시기가 앞선 김선평계의 안동 김씨를 후(신) 안동 김씨로 쓰고, 뒤에 안동을 본관을 정한 김숙승계의 안동 김씨를 선(구) 안동 김씨로 쓰고 있다. 이는 선(구) 안동 김씨가 고려 말과 조선 전기·중기에 세력을 떨쳤고, 후(신) 안동 김씨가 조선 중기·후기에 세력을 떨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구) 안동 김씨의 인물
    중시조 김방경 이후 다섯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고려와 조선의 명신록名臣錄에 오를 정도로 이름을 떨쳐 명문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장남 선은 전법판서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고, 차남 흔은 삼중대광 도첨의사사, 셋째 순恂은 삼중대광 상락군, 넷째 논은 천호위 상장군이 되었다.

    그중 순의 아들 중에서는 조적의 난을 평정한 후 좌정승으로 상락부원군이 된 영돈永敦과 우정승인 영후永煦가 유명했다. 영돈의 손자 대에서 직제학지공조사사에 오른 김익달에서 제학공파가, 영후의 손자로 안렴사에 오른 김사렴에서 안렴사공파가,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이 된 김사형에서 익원공파가 생겨났다. 이들을 제·안·익 3파라고 하며, 그 외에도 도평의공파나 문온공파 등 총 15개 파가 있다.

    김사렴과 김사형은 형제지간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김사렴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더불어 고려 말 충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였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좌사간左司諫 제수를 마다하고 청주 근방(청원)에 은거하였다. 반면 동생인 익원공 김사형은 조선 개국에 적극 가담하여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일등 공신이 된 후 좌의정에 오른 김사형이 형의 좌사간 벼슬 제수를 전하려 청주에 도착했으나 만나지 않고, 더 깊은 도산(지금의 안동)에 은거하였다.

    선(구) 안동 김씨에서는 무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9명의 역대 충무공(이순신 등) 중 2명이 나왔으며, 삼도수군통제사만도 10명이나 배출되었다. 2명의 충무공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金時敏 장군이며, 다른 한 명은 광해군 때 훈련대장으로 강홍립과 함께 후금(청)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장군이다. 그 외 원주목사로 원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제갑金悌甲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 성천부사로 있다가 순절한 김언金言도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와 중기에 승승장구하던 선(구) 안동 김씨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인조 때에 김자점金自點 역모죄로 처형되면서부터이다. 이로 인해 선(구) 안동 김씨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근대 이후 선(구) 안동 김씨의 인물로는 백범 김구金九가 있다. 그 외 선(구) 안동 김씨의 인물로는 충남도지사를 역임한 김학응,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 입안에 공을 세운 김재익 경제수석, 서예가 김사달 박사, 동원그룹의 김재철 회장 등이 있다.

    후(신) 안동 김씨의 인물
    후(신)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 대에서 크게 일어났는데, 그중 청음淸陰 김상헌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로 위세를 떨쳤다. 후(신) 안동 김씨를 가리켜 “후(신) 안동 김씨의 곳간엔 금관자金貫子(관자는 갓끈을 고정하는 도구로 금관자라는 것은 높은 벼슬을 가리키는 말)가 서 말”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곳간은 6명의 창昌 자 돌림을 창고에 빗댄 말이다. 첫째 김창집金昌集의 후손에서는 왕비 3명·영의정 4명·좌의정 3명·판서 13명이 배출되었으며, 둘째 김창협金昌協의 집안에서는 부자父子 대제학이 나왔다. 그 후손들이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판서 김수근의 두 아들(김병학·김병국)은 모두 영의정이 되었다. 셋째 김창흡金昌翕의 집안에서는 뛰어난 문장가들이 나왔으며, 벼슬은 우의정(김달순)과 공조판서(김선근)가 나왔다. 넷째 김창업金昌業의 집안에서는 진경산수화가 김윤겸, 형조참판 김양행, 병조판서 김이익 등이 나왔다. 다섯째 김창즙金昌緝의 집안을 보면, 김창즙은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공조판서 김용겸이 나왔다. 여섯째 김창립金昌立의 집안에서는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김학순, 공조참판 김연근, 공주의 부마이며 창녕위로 봉해진 김병주, 형조판서 김석진 등이 나왔다. 조선 시대에 정승이 15명(영의정 8명·좌의정 4명·우의정 3명), 판서가 50명 이상이나 나왔다.

    그 외 후(신) 안동 김씨의 주요 인물을 보면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김삿갓),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있으며, 독립운동가인 김가진金嘉鎭(충청도 관찰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김학규金學奎(광복군 제3지대장), 김복한金福漢(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 옥사) 등이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안경전,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사, 2012
    2013년 6월호 월간조선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통계청 홈페이지
    위키 백과


    김일제金日는 누구?
    4세기 후반경 훈족(흉노)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유럽 대륙에 게르만족 대이동의 물결이 시작됐다. 이때 흉노의 또 다른 이동이 동쪽에도 있었다. 때는 한 무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무제가 흉노를 공략할 때 흉노 좌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왕자는 궁궐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이 흉노 왕자의 이름이 김일제(BCE 134∼BCE 86)이다. 뒤에 무제는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을 막은 공을 치하하여 그를 ‘투후秺侯’로 봉하였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김일제의 후손 중에서 왕후(전한 11세 원제元帝의 비 효원왕후)도 배출되었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왕망은 김일제의 현손玄孫이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후에 이들은 4세기 후반경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북방 유목문화의 금관, 금허리띠 등의 금세공품이 발견되고 있는 점 특히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 말안장, 동복, 요대 등 기마민족의 유물이 대거 발견되고 있는 점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유물 가운데 청동제 솥인 동복銅鍑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제기로, 유럽의 훈족 루트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여진의 김씨는 신라 김씨
    여진이 세운 금金(1115~1234)나라의 정사正史인 『금사金史』「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라고 하였다. 또『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준今俊: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평주의 승려 금준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의 선조라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평주 중 금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당초에 여진으로 들어가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古乙이라 불렀는데, 금나라 시조 아골타가 그 후손이다.’라고 한다.”고 함으로써 금나라 시조가 고려 사람 함보(금준)임을 밝혔다. 참고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김준金俊’이 아니라 ‘금준今俊’으로 되어 있다. 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부족部族」의 편집자 주에는 “신라 왕의 성 김씨가 수십 세 전해졌고 금이 신라로부터 왔으니, 의심할 바 없이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도 마땅히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여진의 김씨들이 신라계 김씨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금사』「세기世紀」에는 시조 함보에서 금 태조 아골타까지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고랑포에 있는 경순왕 무덤
    935년 신라가 망했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한 마지막 왕 경순왕(?~ 978년)은 왕건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고려 수도 개경에서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다가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조상들이 묻힌 망국 수도 경주로 향하던 관棺은 임진강의 고랑포를 건너지 못했다. 신라 유민遺民들 봉기를 우려한 고려 왕실이 ‘왕의 무덤은 수도에서 100리 밖에 두지 못한다.’고 운구를 멈추게 한 것이다. 경순왕은 결국 고랑포를 코앞에 두고 북쪽 언덕에 묻혔다. 오랜 세월 잊혔던 왕릉은 1746년 10월 경주 김씨 후손들이 ‘金傅大王(김부대왕·경순왕의 이름)’이 적힌 묘지석과 ‘敬順王(경순왕)’이 적힌 비석을 발견해 이듬해 왕명을 받들어 정비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와중에 흔적 없이 사라졌던 왕릉은 대한민국 시대인 1973년 1월 민통선 수색중대장 대위 여길도가 총탄 자국 선명한 ‘신라 경순왕지릉’ 비석을 풀 더미 속에서 찾아내 환생했다. 21세기 대한민국 정부는 민간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경순왕릉을 민통선 한계선에서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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