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5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가가도장]

    가족의 이름으로 도방을 말하다(진주도장 김진수, 전춘화 도생)


    ‘가족家族’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 중 하나이다. 단지 부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친족 집단쯤으로 뜻풀이나 해 대며 이해했다고 치부하기에는 가족이라는 언어의 함의가 너무도 깊고 심오하다. 우리 모두의 발원처가 가족이라는 기틀 속에서 유래되었고, 그래서 측량할 수 없는 깊이와 광대한 외연을 가진 울타리를 가족이라 표현하는 것에 특별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도 그만큼 우리의 삶 속에 가족이 스며들어 체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은 우리의 신앙 정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장 친밀하고 가까워서 반드시 구하고 살려 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 신앙의 성스러움을 재단하고 속화된 의식과 기준으로 쉽게 판단하고 제약하려는 속성도 가까운 가족이기에 가능하다는 역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차고 넘치는 용기와 힘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절실하게 구하는 바를 과감히 무력화시키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닌 가족은 애증이 뒤섞인 양날의 검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 긍정적 순기능이 최적화된 가족의 이야기이다. 진주도장에서 신앙하는 김진수(47, 교무녹사장), 전춘화(43, 종감) 부부 도생은 어려서부터 가족을 통해 영적인 감성을 키우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생활 환경 속에서 성장을 했고 일정한 계기를 만나 상제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인으로 자립을 했다. 부부로서 만난 이후 두 사람은 낯선 영역 속에서 둘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일들을 가족의 지원과 사랑이라는 든든한 보호막 속에서 이루어 내고 승화시켰다.

    “지금 이 시간대에 천지일월 부모님을 모시고 태을주 읽는 증산도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핌의 손길을 한시도 놓지 않고 계시는 조상 선령신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고 표현한 전춘화 도생의 말대로 가족, 나아가 조상과 자손이 하나로 결속한 틀 속에서 영적인 공동 운명체로 교감할 수 있는 토대 또한 현실 속의 ‘가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가족의 신앙이 어떤 틀 속에서 보호되었고 교감을 이루며 성장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란다. 특별히 이번 도방 이야기는 부부의 신앙 거처인 경남 진주의 도방과 남해에 있는 김진수 도생의 어머니 곽순엽(67, 도감) 도생의 도방을 이원 취재하여 구성되었다. 김진수, 전춘화 도생 부부가 신앙의 터전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 영적 교감을 통한 절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4월의 첫 목요일 이른 오후, 취재진은 경남 진주시 일반성면에 소재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6층에 있는 가정도장에 들어서니 김진수, 전춘화 도생 부부와 함께 8세의 영특한 초등학생 딸 가은이, 그리고 똘똘한 기운이 넘쳐나는 5세 된 아들 태민이가 취재진을 맞아 주었다. 아이들의 활달함으로 부산한 가운데 거실 오른쪽 방에 마련된 도방에서 예를 올리고 중앙의 거실에 앉아 그간의 신앙 얘기를 정리했다. 도방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깔끔한 느낌의 벽면을 배경으로 중앙에 우주일년 도표와 천부경 족자가 걸려 있고, 그 위쪽으로 태상종도사님 존영, 상제님 어진, 태모님 진영, 그리고 조상선령 신위가 나란히 모셔져 있으며, 아래쪽에는 순백색의 청수그릇이 단정히 위치해 있다. 이 부부는 각기 성직자로 봉직을 하다가 간곡한 부모의 권유와 여타 사정들로 인해 결혼을 하고 생활 속에서 진정한 가정도장을 구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배경에는 영적인 차원에서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준 부모님의 존재가 있었다. 흥미와 감동이 어우러진 그 숨은 이야기를 들어 보기 위해 우리는 김진수 도생의 가족과 함께 경남 남해의 친가로 다시 이동하여 어머니 곽순엽 도생의 이야기를 듣고 취재를 마무리하는 당일 일정을 소화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구도 과정과 가정의 형성 이야기


    어머니의 신앙심으로 열린 구도의 삶
    김진수 도생은 경남 남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성격이 남들과 어울리기 너무 힘들어할 정도로 내성적이어서 부모님이 항상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네 아이들이 언제든지 집으로 놀러올 수 있도록 자전거를 비롯해 많은 놀이 도구를 준비해서 아들과 친구들이 어울리게 해 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린 아들은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김 도생이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채 혼자만 지내곤 했던 이유는 현실 삶의 표면에 가리워진 근원적인 세상, 그 너머의 무엇인가에 대해 늘 궁금해 했기 때문이었다.

    김 도생은 유년 시절의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스스로가 신앙에 관심을 갖고 몰입을 하게 된 근원은 어머니의 신앙 생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의하면 어머니는 항상 아침이 되면 천수경 등 불경을 소리 내어 틀어 놓고 하루 일과를 시작할 정도로 불심이 깊으신 분이었고, 김 도생의 집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지나가던 종교인부터 동네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자 상담소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집에 오시는 분들 중에 특히 이웃집에 사는 ‘창선할머니’라 불리던 분은 영성이 밝아 굿도 하고 침도 놓아 주고 하시는 분이었는데, 이분이 오시는 날에는 사람들이 밤 늦게까지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분들이 나누는 이야기 중에는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한 내용들이 많았다. 옆에서 들은 그런 얘기들은 어린 김 도생에게 모두 경이롭고 새로운 체험들로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귀신 이야기는 물론이고 신명을 해원시키는 굿을 하고서 문제가 풀어졌다며 기뻐하는 모습 등을 자주 보고 들으면서 보이지 않는 세상, 이 세상의 일들을 근원적으로 풀어 나가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긍금증이 크게 일어났다.

    이와 같이 영적 세계와 관련된 간접 체험과 의문들이 늘어갈수록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마치 껍데기요 허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살아가는 데 허망함조차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귀신 등 영적 문제에 관련되거나 명리학을 다룬 책 등을 찾아 읽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대 역사에 관한 서적도 읽게 되면서 장차 동방 땅 한국이 새 문명의 주역이 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새로운 역사를 여는 곳이 어디인지 꼭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과는 다른 분야에 관심과 의욕을 보였던 그런 김 도생을 주변의 친구들은 이상하고 엉뚱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려 할 때는 이제 그만 찾는 것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대학 시절에 결정적인 전기가 찾아왔다. 상제님 진리를 만난 것이다. 이제까지 삶과 생명의 근원 문제와 그것을 풀어 줄 열쇠를 찾고 있던 김 도생에게 증산상제님의 진리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요 근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경상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저녁 무렵, 김 도생은 영어 학원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인도자인 대학 선배 정부현 도생(현 진주도장, 부포감)을 만났고, 자취방에서 『다이제스트 개벽』 책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때 김 도생은 순간적으로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강렬한 충격과 희열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 다음 날 바로 대학 동아리방에서 7일 정성수행을 시작하였는데 신기하게도 그동안 가슴에 체한 듯 막혀 있던 것이 뻥 하고 시원하게 뚫리는 체험과 함께 수행의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정부현 도생의 인도로 1995년 1월에 진주도장에서 무사히 입도식을 올리게 되었다.

    김 도생은 인도자인 정부현 도생에 대해 감사한 점이 많다고 했다. 그토록 찾던 진리를 알게 해 준 은혜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 치성 준비부터 도장 살림살이까지 함께하며 김 도생이 도장 중심 신앙으로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었고, 무엇 하나라도 제값을 주고 제 정성으로 하게끔 이끌어 주었던 점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단순 수행자가 아니라 살림살이하는 주부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참여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해 주었으며, 그것은 훗날 김 도생이 봉직자의 길로 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김 도생은 입도 후 처음으로 본부 대치성에 참석했을 때의 생생한 영적 체험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치성 중 태상종도사님께서 독축을 하는 시간에 부복을 하고 있던 김 도생은 그 자세 그대로 공간 이동을 하듯이 다른 곳에 옮겨진 듯한 체험을 했다. 그곳에는 하얀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지어 부복하여 있었는데, 그 사람들 중에 김 도생 자신도 들어 있었고 언덕 위에 계시는 태상종도사님과 비슷한 분께 무엇인가를 맹세하고 명을 받드는 모습이 보였다. 김 도생은 그 순간 ‘이미 태어나기 전에 전생부터 맹세를 하고 내려왔구나!, 내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이제 그 명을 받들어 보자!’ 하는 강력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순수한 감성으로 진리에 다가서다
    아내인 전춘화 도생은 1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할머니, 형제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큰 걱정 없이 성장했는데,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서 부엌에 신주독을 모시면서 칠성 신앙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막내인 전 도생은 또래에 비해 부모님과 할머니께서 연세가 많았으므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깊은 산골이라는 생활 환경 때문에 언니들은 일찌감치 중학교를 마치면 다른 지역으로 유학을 가야 했다. 그것은 어린 전 도생이 매번 겪는 슬픔이었다. 가족은 많았지만 조금만 같이 살다 헤어져 살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고 가슴이 아팠다. 가족들이 좋은 시절에 함께 온전히 행복을 누려 보지도 못한 채 공부하고 먹고 살아야 하는 것 때문에 떨어져 산다는 것도 싫었고, 그렇게 살다가 그냥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허무함마저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유년 시절의 전 도생은 적극적이고 활달하면서도 한편으로 순수한 감성을 지닌 소녀였다.

    그러던 중3 시절에 대학에 다니던 다섯째 언니 전영화 도생이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왔는데 오빠와 자신에게 태을주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전 도생은 뭔가 큰 비밀이 들어있는 듯한 신비감과 호기심에 태을주를 따라 읽었는데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 겨울 방학 즈음에 자연스럽게 도장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전 도생이 평소 다른 형제들 중에서 영화 언니를 마음으로 의지했었고 더구나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들의 믿음과 지지를 얻고 있는 언니의 인도였기에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도장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전 도생은 도장에서 신앙하던 도생들에 대한 느낌이 좋았고 도장 분위기도 너무 편안했으며, 무엇보다 태을주를 읽는 게 참 좋았다고 했다. 그 결과 1990년 2월 언니 전영화 도생의 인도로 수월하게 입도를 하게 되었다.

    봉직의 길, 그리고 이룬 가정
    김 도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 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뜻한 바 있어 성직자로 지원을 했다. 이후 인천에서부터 여러 도장을 다니면서 봉직 생활을 했고 본부 성녀포교단에 입단도 하였다. 그는 성직자로 봉직하던 기간 동안 여러 여건들이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도 있었으나 강력한 개척 정신으로 임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고비를 넘어갈수록 신앙의 힘이 강해졌고, 진리를 수호하며 도장의 도생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것이 다소 힘은 들었지만 너무나 보람 있고 행복했다고 돌아보았다. 또한 많은 변화 속에서 함께 신앙하던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이탈하고 난법에 빠지기도 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굳건한 믿음은 진리를 제대로 알고 체득하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더불어 종도사님의 우주 변화의 원리 강독에 직접 참여하여 도훈을 받들 수 있었던 것도 큰 힘이 되었는데, 강독을 다 받들고 우주 변화의 원리 책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이 우주가 살아서 자신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강렬한 기운을 받았으며 마치 자신의 몸이 확장되어 우주와 함께 숨 쉬는 듯했다는 체험도 전했다.

    그로부터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김 도생은 아버지께서 환갑을 지내신 그 다음 해 명절 때 집에 갔는데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평소 자기 관리가 철저하셨던 아버지의 뜻밖의 모습에 당황한 김 도생은 어머니를 통해 이유를 듣게 되었다. 평소 아버지 친구분들이 만나면 너나없이 다들 손주 자랑을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하나 있는 아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있고 손주를 볼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을 하시니 너무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그동안 봉직 생활을 말없이 지원해 주시고 계셨던 터라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봉직하는 아들에게 매월 일정한 경비 지원을 해 주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어머니 또한 궁극적으로 아들이 신앙으로 성공하기를 늘 지심으로 기원하고 계심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무겁고 착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 도생은 그때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부모의 걱정과 근심을 너무 외면하고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이런 부모님의 정서를 알게 된 마당에 봉직자로서 지속적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런 여건이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간곡한 부모님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었던 김 도생은 생활문화라는 진리 가르침대로 생활 속에서 신앙을 뿌리내리자는 결심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배우자인 전 도생과는 성녀포교단 입단 시 동료로 만나 아는 사이였는데, 처음에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어 동료로만 지냈다. 그러다가 전 도생이 5년간의 본부 봉직을 거친 후 지역 도장에서 신앙을 하게 되면서 김 도생과 자연스럽게 만남이 자주 이어진 끝에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김 도생은 지금 어린 시절 생각했던 껍데기 같은 현실, 허상 같은 현실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성과 이법의 산물임을 인식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뒤늦은 결혼과 직장 생활, 늦게 얻은 아기 등등 현실에서 직면하는 모든 일들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인 전 도생도 사회 생활에 익숙하지 못해 좌충우돌 우왕좌왕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점차 적응을 해 나갔다. 그냥 막연히 자연스럽게 잘될 줄 알았던 아기 문제부터 직장 생활, 경제적인 문제, 건강 문제 등으로 초기에는 힘겨워하고 갈등도 겪었지만, 지금은 건강한 두 아이와 더불어 경제적 문제까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모든 것은 정성의 결정체임을 깨닫고 가정도장의 토대도 하나씩 갖추어 가게 되었다. 벌써 결혼 10주년을 맞은 김 도생과 전 도생 부부는 이제 누구나 도방을 방문하면 휴식 같은 집, 치유가 되는 집, 도담을 나누는 집으로 만들어 가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고 있다.

    신앙과 도방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잊지 못할 신앙의 은혜들
    이 부부는 신앙을 해 오면서 생활상의 어려움들이 있었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도장 참여도 다소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잊지 못할 신앙의 은혜와 체험들도 많다고 했다. 김 도생은 가족 신앙과 천도식은 해원 판의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울타리이며 삶을 영위하는 힘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봉직 생활 중에 집안의 고질병인 위장병이 도져 고생을 하다가 혼자서 상주하고 있던 도장에서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도장 상주자 방문이 열리면서 어머니 곽 도생이 들어왔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8일간 휴식을 취한 후 수술 없이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어떻게 그 위기의 순간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어머니 곽 도생은 당시 삼천포벌리도장에서 김 도생과 신앙을 함께하고 있었고 남해에 거주하고 있었다. 지금은 삼천포 창선대교가 멋지게 놓여 있어 편리하게 갈 수 있지만, 그때는 곽 도생이 삼천포도장에 가려면 남해에서 버스를 타고 창선까지 와서 다시 배를 타야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곽 도생이 밭을 매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한테 빨리 가야 한다는 기운이 내리면서 마음이 바빠지고 서두르게 되었다고 한다. 급하게 챙겨서 겨우 삼천포로 가는 마지막 배를 타고 도장에 오게 되었고 그 순간에 위험에 처한 아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도 곽 도생은 그때 영적인 기운을 받아 다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렸다면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전 도생의 경우, 소소한 생활 속에서 신앙의 은혜를 여러 번 체험했다고 말한다. 기억에 남는 것은 둘째 언니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근육에 마비가 오면서 결국에는 생명에도 위협을 주는 희귀병의 하나인 급성 릴리리아 증후군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병원에는 같은 병으로 입원한 아이가 1명 있었는데 1년째 투병 중이었다. 전 도생은 언니와 함께 병원에 찾아가 태을주와 운장주를 2시간 정도 읽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조카는 점차 회복되어 한 달도 되지 않아 퇴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번은 시골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아프시다며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는 과거 담석증으로 수술을 하신 적이 있는데 수년이 지나 다시 그 부위에 비슷한 증상으로 심한 통증이 온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언니와 전 도생은 그날 도장에서 어머니가 옆에 계신다는 생각을 하며 철야로 태을주 수행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행히도 어머니가 괜찮아지셨다는 반가운 전화를 받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전 도생 자신과 관련된 체험이었다. 2008년에 결혼을 한 전 도생은 1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되지 않았다. 주변에는 괜찮다고 위로를 했지만 자신은 혼자서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 자연스레 당연히 임신이 될 줄 알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자신에게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 보고 어머니가 잘 아신다는 할머니께 물어보기도 하며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래도 결과가 시원찮아 고심하던 차에 ‘이제는 마지막으로 도장에서 정성을 드려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장에 출근하기 전 아침마다 도장에 가서 21일 동안 105배례를 드리고 수행을 하였다. 정성 기간을 마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전 도생은 정말로 기다리던 첫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어찌나 그 은혜가 감사하고 기쁘던지 첫째 태명을 ‘기쁨이’라 짓고 10달 동안 태을주를 읽어 주면서 건강하게 낳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정도장으로 얻은 나의 삶, 우리의 행복
    이 부부가 가가도장을 마련한 시기는 2015년 말 무렵 종도사님께서 ‘가정신단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을 주신 때였다. 그 말씀을 받들어 도방을 새롭게 단장을 하고 분위기를 일신하였다. 그런데 조금씩 가가도장의 의미가 부여되고 실질적인 운영이 된 계기는 2016년으로 넘어올 무렵 이어진 어려운 상황들 때문이었다. 김 도생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가정의 복록이 끊기게 되고, 전 도생은 갑상선 기능저하증과 더불어 혈압이 불안정해지고 골반과 척추가 틀어지는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둘째 아이가 잘 다니던 어린이집에 너무 심하게 적응을 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친정어머니 또한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기는 사건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러한 일들을 끌러 내기 위해 전 도생은 시댁 직선조 보은치성과 함께 진외가와 외외가 천도해원치성, 그리고 친정 진외가와 외외가 천도해원치성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 도생은 남편 김 도생 및 언니 전영화 도생과 의논하여 차례차례 계획을 세워 거의 1년의 기간에 걸쳐 시간이 나는 대로 도장과 가정도방에서 본격적인 정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김 도생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현재의 직장을 갖게 되었고, 집 또한 공기도 더 좋고, 공간도 더 넓은 자리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지금 다니는 학교와 어린이집에 너무도 즐겁게 잘 다니고 있으며, 전 도생의 건강도 많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친정어머니도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이 되셨다고 한다.

    이와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전 도생은 도방에 대한 자신만의 특별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가가도장은 가정과 개인의 어려움이 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며, 심신의 위안과 평온을 얻을 수 있는 터전임과 동시에 나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열어가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제 김 도생 가족은 천신단을 모신 가정도방을 중심으로 날마다 아침 수행을 통해 하루를 활력 있게 시작하면서 신앙도 생활도 안정감을 찾아 가고 있다.

    특히 전 도생은 결혼과 더불어 창원에서 자리를 잡고 신앙을 하다가 언니 전영화 도생이 살고 있는 진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학원을 하는 언니와 함께 자녀들을 양육하며 가족 신앙이 더 안정이 되고 도장 참여도 좋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진주도장에 어린이 도생들이 많은데 자녀들과 조카들을 대상으로 낮 시간에 필요한 교육 지도를 하고 신앙 훈련을 시키기도 하면서 효율적으로 시간 운용을 하고 있다. 전 도생은 본부 봉직 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도장의 어린이 도생 양육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거주지 인근에 언니 가족과 어머니가 모여 살고 있는 이점도 있어 향후 가족의 신앙력을 바탕으로 지역에 거주하는 이웃과 지인들에게 상제님 진리와 태을주를 전하는 활동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방패
    이번 도방 취재를 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이 가족들 간의 신뢰와 연대감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신앙을 하는 어머니 곽 도생과 아들 김 도생, 며느리 전 도생 사이의 조합은 탄탄하고 애정어린 교감으로 넘쳐 났다.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꿀 케미의 환상적 모습을 보는 듯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장처長處만 취하여 호의를 가질 것이요 혹 단처短處가 보일지라도 잘 용서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신 상제님 말씀에도 있듯이, 이 가족들 사이에서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주고 크게 관용하여 허물이나 약점을 상쇄시켜 버리는 조화의 시너지Synergy가 느껴진다면 다소 과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실망을 안겨 줄 수 있었던 아들의 선택을 이해하고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했던 어머니의 그 마음은 도방 인터뷰 말미에 불쑥 던진 “아들이 증산도 신앙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우문에 “나는 결국 아들을 잃었을 것”이라는 현답으로 화답한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본디 자식에게 한없이 약한 것이 부모라 하지만 보다 넓고 깊은 시각에서 자식의 인생과 신앙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진심을 다해 감싸 안을 수 있는 부모는 드물다. 곽 도생은 며느리 전 도생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결혼에 대한 얘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시점에 본부에서 봉직하던 전 도생을 우연히 보고서 “내 며느리였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곽 도생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아들과 함께 집에 들어서는 전 도생을 보고서 놀라움과 함께 깊은 인연의 섭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경험이 부족하고 능숙치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며느리의 생활 적응에 이해로써 보듬어 주고 힘이 되어 주었던 곽 도생의 배려로 전 도생은 힘든 가운데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바로 설 수 있었다. 전 도생은 곽 도생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만큼 모습을 갖춘 것은 100% 어머니, 아버지 덕분입니다. 저는 한 인간, 한 여자로서도 어머니께 배울 점이 많습니다. 막내로 성장해서 모르고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는데, 어머니를 통해 모든 것이 채워졌습니다. 저는 물려받은 유산이 참 많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이 바로 가족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과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난관들이 많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막아내고 버틸 수 있는 방패는 오직 가족뿐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위대하다. 상제님 신앙의 과정에서 겪는 갖가지 오해와 시련들은 때로는 시리도록 아프고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치유하고 새롭게 헤쳐 나갈 힘은 가족이라는 방패, 가가도장이라는 견고한 철옹성에서 솟아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속 있는 도방 문화의 형성을 소망하며


    도방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향후의 신앙 계획과 소망을 물었다. 어머니 곽 도생은 무엇보다 가족이 건강하게 신앙과 생업을 잘 영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힘닿는 데까지 사람들에게 증산도 신앙을 권유해 전하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거주지 지역에 소재한 암자의 스님에게 도전을 전했고 그분이 태을주를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김 도생은 도장 생활 10년, 사회 생활 10년을 되돌아보면서 지금부터는 사회 생활 속에서 신앙이 자리를 잡고 가정 도방이 신앙 전파의 터전이요 기반이 되기를 소망했다. 자연스런 신앙 문화가 도방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더불어 가족 간의 진리 학습, 특히 아이들의 진리 공부 계획을 만들어 실행하겠다는 계획도 표명했다. 가족 신앙은 서로가 협력해 성과를 도출해 내는 팀플레이Team play라는 생각을 밝히면서, 앞으로 가정도방의 영역을 점차 이웃과 지역으로 확대해서 상제님 진리 신앙의 구심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전 도생도 김 도생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가족부터 신앙을 생활화하고 정성을 쏟아 즐겁게 신앙을 해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방 신앙 문화가 주변으로 확대가 될 것이라 보고 있다. 아이들과 조카들, 아이 친구들은 물론이요 시댁과 친정 가족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하고 있으며, 가까이에서부터 실속 있고 자연스럽게 신앙 문화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가가도장의 힘을 근간으로 가은이와 태민이를 비롯한 시댁과 친정의 자녀들이 먼저 도장 문화로 흡수될 수 있도록 남편 김 도생 및 언니 전영화 도생과 함께 정성을 드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전 도생 자신이 가가도장에서 심신의 위안과 삶의 해결 방안을 찾고 평안을 얻은 것처럼 누구든지 가가도장에 오기만 하면 위안을 얻고 삶의 힘을 얻고 말씀의 깨달음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키워 가고 싶다는 강고한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내가 60년 동안 찾던 것이다.”- 창선할머니와 어머니의 입도 사연
    김 도생의 어머니 곽순엽 도생은 아들의 신앙을 반대하다가 적극적인 지원자로 돌아선 후 입도까지 하신 분이다. 그렇게 변화를 겪은 과정과 사연을 들어 보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무척이나 흥미롭다.

    본래 부모님은 김 도생의 신앙을 심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아들과 딸이 잘 성장해 모두 좋은 직장에 취업해 다니고 있었기에 자식 키운 보람에 남 부러울 것이 없었던 부모님은 아들이 증산도를 신앙한다고 하고 언젠가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봉직을 한다고 하니 결단코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진리를 잘 모른 채 알려지지 않은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당시로서는 아들의 신앙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를 반전시킬 사건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종도사님께서 도훈을 통해 가족 포교를 강조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나름대로 정성을 들이고 있던 김 도생은 어버이날을 맞아 어머니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태을주가 새겨진 ‘생기生氣’라는 성물을 우편으로 보내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어머니로부터 급히 집으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 보니 그날 집에는 이웃집에 살며 인연을 맺은 ‘창선할머니’도 와 계셨는데, 창선할머니는 어머니처럼 김 도생의 신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김 도생의 편이 되어 어머니에게 적극적으로 아들 신앙을 따라가라고 설득을 하고 있었다.

    그 내막은 이러했다. 어머니 곽 도생은 평소 아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신앙을 막아 보려고 창선할머니에게 아들이 보내 준 생기를 보여 주며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신기가 있었던 창선할머니는 생기를 손에 놓는 순간 바로 입에서 태을주가 터지면서 스스로 태을주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곽 도생에게 “내가 60년 동안 찾던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아들을 불러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창선할머니는 “이곳은 천금을 주고도 못 가는 자리이고 못 들어가서 한이 되는 그런 좋은 곳이라”며 곽 도생에게 무조건 아들을 따라 신앙하라고 했다.

    곽 도생은 창선할머니가 별다른 연관성도 없는데 평소에도 자꾸만 좋은 쪽으로 인도를 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련된 얘기를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창선할머니가 신명을 받아서 그런지 영적으로 모든 걸 알게 되는 모양이에요. 그분이 저에게 ‘자식과 남편을 위해 공덕을 쌓아라. 당신 시조부 되시는 분께서 아들을 위해 공덕을 많이 쌓았고 그 연관성이 당신에게 이어지고 있으니 공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후 진주도장에서 우리 조상님 천도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 창선할머니를 모시고 갔어요. 그때 창선할머니가 천도식 하는 현장에서 영으로 우리 조상님들 모습을 본 거예요. 그분이 무릎을 탁 치시더니 ‘당신 조상님들이 손을 흔들고 구름을 타고 올라가니 앞으로 좋을 것이다.’고 했어요.”

    이후 곽 도생은 건강이 안 좋은 때가 있어 한의원을 운영하는 원동희 도생의 도움을 받았고 청수를 모시고 수행을 하면서 영적 체험도 하신 끝에 1999년에 입도까지 하게 되었다. 이후 곽 도생의 인도로 창선할머니도 2001년에 입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곧 박가망 도생이다. 박 도생은 입도 당시 김 도생에게 “내가 너의 어머니와 인연을 맺어 도와주었더니 아들인 너를 통해 내 소원을 이루게 되는구나!”는 말을 하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박 도생은 도를 닦던 아버지의 신명 기운을 받은 분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박 도생의 부친은 고종 황제 시절에 ‘훔치’ 기도를 하던 신앙 단체의 책임자였고 한의원을 운영하던 분이었다. 박 도생은 신명을 볼 수 있었지만 일체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않은 채 도장에서 묵묵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도장에서 자신의 부모님 천도식을 올려드렸을 때 정말로 기뻐하셨다고 한다.

    박 도생과의 인연에 대해 김 도생은 이렇게 술회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시고 상제님 곁에 계시지만 박가망 도생은 어머니와 저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분이십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연을 맺어 30년의 시간에 걸쳐 상제님 진리를 만나게 되는 그 긴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상제님 진리를 만나게 되는 계기와 박가망 도생의 평생 소원을 이루는 만남의 고리를 돌이켜 보면 그냥 우연이라는 건 절대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연과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며 의미 있는가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광인의 한마디 말에도 취할 것이 있느니라’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가가도장은 가족의 헌신적 지원 속에 성직의 길을 걸었고 또한 그 가족의 간곡한 요청으로 한 가정을 이루면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신앙 여정을 걷고 있는 도생 부부의 이야기를 담아 보았다. 이들은 이전과는 양상이 다른 사회 생활에 과감히 적응해 나가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애를 기반으로 견디고 극복해 내는 가운데 신앙의 중심을 굳건히 지키며 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배경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조상과 연계된 영적 감응을 바탕으로 자식의 성직을 묵묵히 지원하고 보살폈던 부모님의 숨은 사연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평범한 인지상정의 경계를 뛰어넘는, 분명 색다르고 특별한 스토리이지만, 궁극에 가서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깊은 마음과 정서를 대신 읽고 느끼는 공감의 장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가족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며 그 본질적 가치를 함께해야 할 공동체다. 하지만 깊은 신뢰와 쏟아 내는 사랑만큼 서로의 차이와 선택을 존중하며 합리적으로 배려하고 지원해야 하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그때 우리가 진정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신앙의 대의에 걸맞는 선택을 어떻게,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은 결국 영적인 감성과 깨달음의 정도에 달려 있음을 이번 사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늘 자식의 앞길을 보살피며 신앙 속에서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어머니 곽순엽 도생과 똑같은 마음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아버지 김동균님의 감동적인 배려와 사랑, 그리고 두 분의 기대와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며 도방을 안정 궤도에 진입시킨 김진수, 전춘화 도생의 마음을 하나로 담아 가정도장의 성공을 서원하는 도생들께 선물로 보낸다. 부모와 자식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아낌없이 주고 바르게 인도하는 정성과 교감이 종국에는 빛을 발해 모두가 성공하는 신앙의 결실로 열매 맺기를 기원하며, 김진수, 전춘화 도생 가족의 도방, 그리고 김동균, 곽순엽님의 도방에 상제님과 태모님, 조상선령신의 가호가 무궁하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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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05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