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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성구]

    이달의 성도 | 태모님의 수석성도, 성포聖圃 고민환高旻煥



    수석 성도 고민환의 입도


    무오(戊午: 도기 48, 1918)년 8월에 옥구 근처에 괴질이 크게 유행하여 사람이 많이 죽으매 태모님을 찾아와 의지하는 신도가 점차 많아지니라.

    이 때 옥구에 사는 고민환(高旻煥)과 이근우(李根宇)가 조종리를 찾아와 태모님을 뵙거늘 민환은 일찍이 승려 생활을 하면서 불교는 물론이고 유교와 신학문까지 두루 공부하였더라. (道典 11:51:1~3)

    수석 성도 고민환과 칠성용정 공사


    하루는 태모님께서 고민환을 수석 성도로 세우시어 칠성용정 공사(七星用政公事)를 보시니라. 태모님께서 강응칠(姜應七)에게 명하여 “네가 입는 갓과 도포를 가지고 오라.” 하시어 남장(男裝)을 하시더니 다시 민환에게 “네가 입는 의관을 가져오라.” 하시어 그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민환에게는 태모님의 의복을 입히시어 여장(女裝)을 시키신 뒤에 내실(內室)에 있게 하시니라.

    이윽고 태모님께서 밖으로 나오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증산(甑山)이니라.” 하시고 “민환의 나이 마흔에 일곱을 더하면 내 나이 마흔일곱이 되고, 내 나이 마흔일곱에서 일곱을 빼면 민환의 나이 마흔이 되니 민환이 곧 나의 대리(代理)요, 증산의 대리도 되느니라.” 하시니라. 또 청년 일곱 사람을 선출하시어 칠성 도수를 정하시니, 의복을 새로 지어 입히시고 공사에 수종 들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야 모든 조화의 기틀을 정한다.” 하시니라. 이어 민환을 바둑판 위에 앉히시고 저울을 걸어 놓으신 뒤에 이르시기를 “너는 저울만 맡아 보라.” 하시며 성도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모든 일을 민환에게 맡긴다.” 하시니라.

    공사를 마치시고 태모님께서 남장을 하신 채 사랑에 가시어 사흘 동안 술만 드시고 진지를 드시지 않으시니라. 그 후로 태모님께서 모든 도정을 민환과 상의하여 처리하시매 성도들은 민환을 태모님의 정통 후계자로 인식하거늘 조종리 강씨 신도들은 태모님께서 응칠의 옷을 입지 않으신 것과 민환에게 도수를 붙이신 것에 불만을 품고 공사를 보신 날 저녁부터 술렁이기 시작하니라. (11:98)

    난법자들의 도전(道戰)을 경계하심


    태모님께서 민환을 대리로 정하여 칠성용정 공사를 행하신 것은 태모님의 수(壽)가 민환과 일곱 살 차이라 칠 도수(七度數)를 취하심이요 또 민환이 심지(心志)가 바르고 사욕이 없으며 성품이 온순하여 남과 시비하는 것을 싫어하니 그 심법을 보시고 도수를 정하심이거늘 조종리 강씨 신도들은 이 도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환을 시기하더니 얼마 후 강사성을 비롯한 신도 여러 명이 친목단을 조직하여 “민환이 그놈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분란을 일으키니라. 이에 민환이 일찍이 상제님께서 “집안 분란이 세계 전쟁이 된다.” 하시고 “장차 앞길에 도전(道戰)이 있다.” 하신 말씀을 생각하여 앞으로 벌어질 대내외적인 큰 분란을 염려하니라. (11:101)

    민환을 대장기에 올라가게 하심


    태모님께서 치성 때가 되면 종종 긴 장대에 붉은색 대장기(大將旗)를 달아 마당에 세우게 하시고 고민환을 비롯한 주요 성도들에게 “올라가라.”고 명하시니 성도들이 장대를 붙잡고 신들린 듯 폴짝폴짝 뛰어서 끝까지 올라가니라. 한번은 민환이 장대에 올라가다 떨어져 기절을 하매 태모님께서 고함을 쳐서 소생시키시니라. (11:158)

    통정신 공사, 고민환의 죄를 사하여 주심


    어느 해 여름에 태모님께서 고민환, 전선필, 김수열 등 여러 성도들을 벌여 앉히시고 “오늘은 통정신(通情神) 공사를 보겠노라.” 하시며 민환에게 이르시기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옳고 그른 일과 처신해 온 일을 낱낱이 생각하여 말하라.” 하시니 민환이 아뢰기를 “소자는 별다르게 옳고 그른 일을 행한 적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태모님께서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 선악의 행동이 없으리오. 상제님 같은 지위에 계신 분도 스스로 어릴 적부터 행한 모든 일을 숨기지 않고 말씀하시며 불미스러운 일에는 일일이 용서를 비셨노라. 잘 생각하여 말하라.” 하시니라. 이에 민환이 주저하며 차마 말씀드리지 못하매 태모님께서 갑자기 민환의 상투를 잡고 마룻바닥에 부딪뜨리시며 “야, 이놈아! 네 죄를 내놓아라.” 하시거늘 민환이 부딪친 이마가 아픈데다 태모님의 갑작스런 꾸지람에 매우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니 이번에는 민환의 상투에서 산호(珊瑚) 동곳을 빼 놓으시며 다그쳐 물으시기를 “이 일을 모르느냐?” 하시는지라 민환이 그 동곳을 보니 군산(群山)에서 사귀던 산옥(珊玉)과 선옥(璇玉)이 생각나거늘 대저 두 여인은 군산 여자인데 민환이 유인하여 간통하다가 군산 경찰서에 불려간 일이 있었더라. 또한 남편과 불화하여 별거 중이던 춘자(春子)라는 여자를 유인하여 사통하다가 결국 탈취하여 소실로 입적(入籍)시킨 일이 있었거늘 그 외에도 수차례의 음란했던 일을 낱낱이 들추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모든 과실(過失)을 나에게 고하고 용서를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용서받을 곳이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렇듯 태모님께서 밝은 빛과 같은 성감(聖鑑)과 한량없이 큰 법으로 만상을 통찰하시니 성도들은 놀랍고 두려울 따름이더라. (11:175)

    저울 도수의 민환


    민환은 “내가 일을 공평하게 보니 어머니께서 나에게 저울 도수를 맡기셨다.” 하니라. (11:217:5)

    용화동 도장에서 나온 고민환의 한


    용화동 도장 초기부터 김수열, 고민환, 이용기가 내무(內務)를 맡고 용기의 아내 정아옥이 식모로 일하며 태모님을 모시고 있더니 얼마 후 이상호를 주축으로 한 용화동측 신도들이 사욕과 유교 의식에 빠져 태모님의 가르침을 받들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매 김수열과 전선필은 상호를 불량한 사람이라 여기고 용화동을 떠나 각자 집으로 돌아가니라. 한편 태모님께서 민환을 옆방에 두시고 모든 일을 상의하여 처리하시니 상호의 시기심이 갈수록 더해져 마침내 민환을 해(害)하려 하거늘 태모님께서 그 기미를 아시고 민환에게 명하시어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시니라. 하루는 민환이 도장의 현실을 생각하며 탄식하기를 “슬프도다! 교인들이 어머님의 신도(神道)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허례를 일삼으며 또한 생명을 다루는 도업을 앞에 두고 장난 삼아 망동하니 어찌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천하사 일꾼의 자세라 할 수 있으리오.” 하고 비통히 여기더니 의분(義憤)을 참지 못해 ‘용화동 도장 출범 이후 떨어져 나간 신도들을 모아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다른 방도를 찾으리라.’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상호 측의 위해(危害)가 있을까 두려워 밤중에 도장을 나와 고향 옥구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민환이 이전에 신앙하던 신도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교단 재건립 운동을 추진하니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玉山面 南內里) 지재 마을 문영희(文榮喜)의 집에 임시 연락처를 정하고 도체(道體) 조직을 서두르니라. (11:327)

    고민환 성도의 약력
    고민환 성도는 정해(1887)년 7월 24일, 전북 부안扶安에서 부 고근수高根洙와 모 김해 김씨의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째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1886~?)에게서는 자식이 없고, 둘째 부인 김해 김씨(1890~1973)와의 사이에 2남 2녀, 셋째 부인 박춘자朴春子(1898~?)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아, 슬하에 모두 4남 3녀를 두었다. 부안에서는 500석지기 부농 집안이었으나 그곳에 산적이 들끓고 괴질까지 돌자 가족 모두 옥구군(지금의 군산) 성산면 성덕리로 이사하였다.

    태모님을 만나기 전 한때, 군산 월명산月明山 아래에 있는 은적사隱寂寺에서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태모님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자, 조종리와 용화동 도장 시절에는 그 지역 신도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위협을 받게 되어, 고향 옥구로 쫓겨 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태모님으로부터 ‘성포聖圃’라는 도호를 받았으며, 선화하실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태모님을 모시고 공사에 수종하였다. 한의학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밝아 태모님의 성묘 자리를 비롯하여 유일태, 문명수 성도의 묘 자리를 잡아 주기도 하였다.

    성도들과의 친분이 두터워 서로 왕래가 많았으며, 맏아들 재정在廷과 김수남 성도의 장녀 순자純子를 혼인시켜 전대윤, 김수응, 김수남 성도와 사돈지간이 된다. 태모님 선화 후에는 군산 성덕리 자택을 도장 삼아 교단을 운영하였으며, 경자(1960)년에는 상제님과 태모님의 성언과 성적을 정리하여 『선정원경仙政圓經』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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