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방은 성숙이요 행복입니다(대구두류 김휴동, 서선교)

[가가도장]


우리는 종종 생활 속에서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현상이나 사람을 마주할 때가 있다. 늘 범속의 테두리 속에서 정해진 인식의 틀을 상식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에 직면하면 무의식적으로 경계를 하거나 다른 것이라며 구분하려 든다. 소위 말하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렇다. 심신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결함이 있는 상태를 두고 장애라는 말을 쉽게 쓰면서도, 정작 자신과 무엇이 다르며 어떻게 수용하여 다가서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를 인정과 정서 부족의 문제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여유와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데서 오는 측면이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발상을 바꾸어 보는 건 어떨까. 장애의 편견을 초극하여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함께 소통하며, 의지와 노력과 열정을 성원하고 서로 감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 도인들의 삶은 더욱 의미 있고 멋지고 빛나는 역정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호 가가도장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대구두류도장에서 신앙하는 김휴동(48, 교무종감), 서선교(48, 교무녹사장) 부부 도생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장애를 지닌 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신앙을 함께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과 배려의 힘을 키워 온 소박하고 진중한 도인들이다. 이들의 도방은 그래서 늘 훈훈하고 정감이 넘친다.

입춘이 닷새 지난 2월 둘째 주 목요일 저녁, 취재진은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 소재한 이 부부의 도방을 찾아갔다. 아파트 5층에 도착해 가정도장 문 앞에서 마주한 남편 김휴동 도생은 다소 멋쩍은 웃음을 띠면서 ‘STB상생방송’ 스티커가 붙어 있는 출입문 앞에서 포즈를 취해 주었다. 가정도장의 내부 모습은 여느 아파트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거실에 조성된 천신단이나 오른쪽 방에 걸어 놓은 서 도생의 서예 작품 등을 보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지막 남은 여력까지 다 쏟아서 만들어 놓은 소중한 물건처럼 진한 정성과 여운을 느끼게 된다. 더불어 “다른 도생과 비교해 별스러울 것은 없지만, 신앙만큼은 절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해 왔어요.”라고 말하는 서 도생의 소회가 단순한 신앙 소감으로만 들리지 않는 것도 취재 과정에서 느낀 그러한 느낌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이날 취재 현장에는 부부 도생 외에도 외아들인 김진현(21, 종감) 도생과 동료 권영희 도생, 그리고 두류도장 책임자인 김두환 포정도 함께 참석하여 도방 이야기를 경청했고 중간중간 양념과도 같은 도움말들을 던져 주기도 했다. 여럿이 거실에 둘러앉아 신앙과 가족에 대한 얘기를 차분히 들어 보았다.

진리가 붙잡아 준 가족과 도방


장애를 안고 진리를 만나다
서선교 도생은 경북 안동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오빠와 동생의 중간에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것이 당연했던 서 도생은 겨우 3살이 되었을 때 거친 병마를 만났다. 명확치도 않은 병증을 앓던 서 도생은 결국 7년간이나 신체 마비 증세를 보이며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10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서 도생의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내 딸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등하교를 시켰다. 자식에 대한 안쓰러움과 책임감에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언제나 커다란 산처럼 버팀목이 되어 준 아버지의 정성으로 서 도생은 청소년기를 다른 큰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고3이 된 서 도생은 1990년 겨울방학 중이던 어느 날, 안동 시내에서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손을 잡아끄는 동갑내기 외사촌을 만났다. 당시 증산도 포교전사단으로 안동에 나와 포교 활동을 하던 외사촌을 만난 서 도생은 친구와 함께 얼떨결에 현재의 안동태화도장을 방문했고, 기본적인 진리 설명에 수긍하며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입도를 했다. 서 도생은 당시 학교 공부나 진리 공부에 특별히 집중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그저 도장에서 가족들처럼 어울려 재미있게 보낸 기억은 많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장애의 굴레는 현실 삶에 있어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 등을 꼬리처럼 달고 다녔지만, 도장에서는 다소라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1980년대부터 외사촌 형제 자매들이 증산도 신앙을 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신앙을 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던 서 도생은 그렇게 도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가족과 신앙의 한 길로
그로부터 6년 정도가 흘러 서 도생은 지금의 남편 김휴동 도생을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기 전에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몇 차례 맞선을 보러 나간 적이 있었던 서 도생은 항상 <다이제스트 개벽> 책을 가져가서 증산도 신앙을 하는 것을 알리곤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남편인 김 도생을 만날 때는 책도 갖고 나가지 않았고, 증산도 신앙을 하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말을 더듬는 언어 장애를 가진 김 도생과 만난 서 도생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보았고 그 성품에 이끌려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서 도생은 결혼하고 몇 달 후에 증산도 신앙을 하는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당시 남편은 증산도가 뭔지 잘 몰랐기에 특별한 반대는 없었다. 울산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한 서 도생은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 걸리는 울산자정도장에서 잠시 신앙을 하게 되었다. 그리 열심히 하지는 못했고 가끔씩 치성에 참석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97년 아들 김진현 도생이 태어나고 10개월쯤 되었을 때 남편은 아들과 함께 도문에 입도를 하게 됨으로써 가족이 신앙의 한 길로 나아가는 기틀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신앙에 대해 일정한 선입관을 갖고 있던 시댁 식구들이 주변에 살고 있었던 탓에 도장에 자주 나가는 것은 부담이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고 당시에 서 도생의 신앙의식이 높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서 도생은 도장에 안 나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하며, 그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서 도생과 두 가족은 쉽게 신앙의 길을 함께 걷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연과 환경을 갖고 있는 이 가족이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건실하게 가꾸어 온 것은 모두 진리가 붙잡고 맺어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장애로 고통을 받으면서 ‘생사生死’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왔다는 서 도생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늘 해 본다고 한다. 이런 그를 가정도방의 틀에서 운신케 하고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상제님의 진리이며 증산도 신앙이었다. 그렇기에 진리와 신앙은 이 가정과 도방을 지키고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를 극복하고 믿음을 지키다


스스로를 이겨낸 신앙 과정
신혼 시기에 울산에서 신앙을 하던 서 도생 가족은 1997년 IMF 경제 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생활상의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남편인 김 도생이 실직을 했고, 생계를 위해 1년 동안 고군분투를 하다 어렵게 직장을 구해 대구로 이사를 하면서 도장도 집에서 가까운 지금의 대구두류도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27개월쯤 되었던 아들은 그때까지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아 많은 걱정을 안겨 주던 때이기도 했다. 가정과 개인이 직면한 여러 가지의 문제를 해소하고 상황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던 서 도생은 마음을 다잡고 도장 및 신앙 생활을 하나씩 새롭게 정비하며 적응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당시 도장에서 서 도생을 만났던 동료 신앙인들은 그를 지금과는 많이 다른,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도장에 가끔 나간 제가 참여도 적었고 수행이나 진리 공부에 열심인 것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기억되는 건 당연할 겁니다. 더욱이 제가 장애를 안고 있어 조금 위축되었던 모습도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올해로 제가 신앙한지 27년을 향해 가지만 저를 기억하는 도생들은 많지 않습니다. 남들이 기억을 할 만큼 특별한 도생이 아니었어요. 물론 지금도 특별한 도생은 아닙니다.” 당시의 신앙 모습을 담담히 회고하는 서 도생의 이 말에는 얼마간의 겸손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말일 뿐, 그것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재 서 도생의 보직 수행에 대해서는 업무 수행 능력은 물론이고 성실함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긍정적인 평을 내리는 도생들이 많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바쳐 신앙하고 있으며 포교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는 것도 주변 도생들의 한결같은 중평이다. 그간의 우여곡절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서 도생이 스스로를 극복하고 신앙의 내공을 다져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단호한 결단으로 신앙을 지키다
서 도생이 울산에서 신앙을 할 때는 시댁 식구가 자주 집에 왕래하여 도장에 자주 못 나갔던 상황이라 오히려 신앙 문제가 불거질 여지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구에 온 후로 도장에 다니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신앙은 같이 하지만 지금처럼 이해의 폭이 넓지 못했던 남편이 조금씩 내키지 않아 하는 내색을 보였다. 그러다가 시댁에 갔을 때 무심코 신앙 사실을 말한 것이 기화가 되어, 서 도생은 어느 날 시부모님에게 불려 가서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었다. 증산도를 대순진리회와 같은 것으로 오해하신 시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망친다면서 신앙을 그만두던지 이혼을 하던지 선택을 하라고 했다. 이때 서 도생은 단호하게 “신앙은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결혼 전에 신앙한 것이었고 결혼하고 지금까지 가정에 문제가 될 만큼 돈을 낸 것도 없으니, 그래도 허락이 안 된다면 저는 이혼하겠습니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 이후 4개월 동안 냉랭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던 상황은 신기하게도 봄날에 눈 녹듯이 해결이 되었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앙에 대해 반대는 하지 않되 다만 남편과 아들은 가능하면 도장에 나가지 말고 서 도생만 가끔씩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신앙 반대가 없음은 물론이다. 서 도생은 그 일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때 잠시 모면하려고 신앙을 그만둔다고 말했다면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에게 신앙은 그만큼 소중하고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남편도 아들도 말을 조심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가족 모두가 신앙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고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도방과 신앙의 힘을 체험하고


도방은 극복과 단합의 원동력
서 도생은 가정도장을 지역도장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가정 도장과 소속 도장의 신앙이 별개로 유리될 수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만 생활의 기초 공간인 가정에서 운영되는 가가도장은 신앙의 위기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을 주고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동력원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한 근본과 힘을 바탕으로 지역도장에서의 신앙과 도정이 원활히 움직여지고, 다시 그 신앙 동력이 가정도방에 미쳐 선순환을 이룬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서 도생은 아침 출근 전에 남편 김 도생과 같이 천신단 봉청수와 수행을 하는데, 대학생인 아들이 방학 중 집에 있을 때는 세 가족이 함께 시행한다. 이후 김 도생이 직장에 출근하고 나면 서 도생은 두류도장으로 가서 집정으로서 보직 수행에 임한다. 요즘은 거의 도장에 상근하면서 블로그 활동과 무인거치대 활동 및 입도교육 등을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온 종일 도정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남편인 김 도생과 아들의 지원과 배려 때문이라고 서 도생은 말한다. 항상 묵묵히 아내를 돕는 김 도생에 대해 서 도생은 늘 감사한 마음뿐이라고 밝혔고, 대학생인 아들 김진현 도생은 “신앙을 안 하는 어머니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표현하며 든든한 지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서 도생은 평소 아들에게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언은 신앙뿐이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김진현 도생이 어머니를 자신의 버팀목 중 하나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도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태을주의 조화로 목숨을 건지다
서 도생은 오랫동안 가정도방과 지역도장에서 꾸준히 태을주를 읽어 왔다. 도방 신앙의 체험을 상기해 보면서 서 도생은 10여 년 전쯤의 사건을 떠올렸다. 도방에서의 태을주 수행 공력과 포교 대상자를 살리는 문제가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한 사람을 포교하는 데 목숨까지 걸고 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고 했다.

도방에서의 태을주 수행에 탄력이 붙어 가며 인터넷 포교에 힘을 쓰던 당시에 온라인상에서 한 남성을 만났다. 그 사람은 당장이라도 신앙을 하고 싶다며 제물치성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고, 서 도생은 정성을 쏟아 제물을 준비해서 올렸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제물비는 받았지만 결국 입도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뭔가 영적인 기운이 충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때 사건이 생겼다. 남편,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에 가기 위해 차를 몰고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서 도생은 쉼 없이 태을주를 읽고 있었다. 커브길을 도는 순간 가족이 탄 차량이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해 반대편에서 오고 있는 대형 버스와 부딪힌 것이었다.

그 순간 서 도생은 의식을 잃었고, 깨어 보니 경찰차와 견인차가 도착해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관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하며 1초만 더 갔어도 차가 폭발할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서 도생 자신도 김 도생과 아들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다친 곳도 전혀 없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서 도생은 마치 이끌리듯 일어난 사고와 기적처럼 보호를 받은 가족의 모습 등이 전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고 했다. 당시 입도에 실패한 그 남성이 무당이었다는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어떤 영적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며, 태을주의 조화력과 은혜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도 실감했다고 한다. 그 사건이 있은 직후에는 포교하려고 도전하기가 잠시는 겁이 나기도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사건은 의외의 소득도 안겨 주었다.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친정 오빠가 다음 날 좋은 소식을 전해 준 것이다. 당시 남편 김 도생은 티코 소형 차량을 타고 다녔는데, 차가 폐차가 되었으니 다니는 데 불편할 거라면서 오빠가 현재 타고 다니는 옵티마 차량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덕분에 차 값의 절반 정도만 지불하고 바로 구입을 할 수 있었다.

‘바르게 마음먹은 대로’
서 도생은 기도와 도공 수행을 나름대로 지속해 오면서 요란한 체험을 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다른 도생들의 심오하고 아름다운 수행 체험 사례를 들을 때면 자신은 왜 그런 체험이 없을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체험 콤플렉스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바르게 마음먹은 대로’라고 편하게 생각하며 신앙한다는 고백도 했다. 하지만 종도사님 순방이나 도문의 행사 등이 있으면 미리 꿈을 통해 그 모습을 예지하거나 기도에 대해 응답을 받는 일은 현실 생활 속에서 자주 경험을 한다고 한다. 다리가 불편해서 도장에 왕래할 때면 무척 힘이 드는데, 이를 해결해 준 전동스쿠터가 생긴 사례도 바로 기도의 결과였다. 서 도생은 몸이 불편해서 포교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천일기도를 하라는 종도사님의 말씀을 듣고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전동스쿠터가 생겼고, 그 결과 지금은 도장을 하루에 3~4번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인거치대 활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무척 만족해하고 있다.

나에게 신앙은 무엇인가


사람을 살리려는 염원을 담아

서 도생의 신앙은 늘 사람 살리는 포교와 직간접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몸이 불편한 것은 있지만 그럴수록 최선을 다해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해 보자는 생각인 것이다. 서 도생은 지난 해 12월 중순경 서점용 책을 구입하기 위해 도장 포정님과 함께 시내 서점에 갔던 얘기를 들려 주었다. 포정님이 서적 계산을 하는 동안, 서 도생은 사주 관련 코너에 있는 책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서 도생은 고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 환단고기 책을 구입하러 왔다고 말했고 이에 상대방도 역사에는 조금 관심이 있다고 응답하면서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였는데, 며칠 후에 실제로 커피숍에서 만나 역사와 종교 등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분은 기독교 신앙을 하는 집안이라 종교를 쉽게 바꾸기는 힘든 상황인데, 지금까지 매번 스스로 먼저 만나자는 연락을 해 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조상님이 서 도생을 통해 살려 달라는 영적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서 도생은 더욱더 기도와 수행에 집중을 하고 있으며, 어떤 결과를 얻을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보리라는 다짐을 하고 있다.

2012년 대구에서 개최된 환단고기 북콘서트 때에는 아들 김진현 도생의 중학교 학부모 4명과 아들 친구 2명이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중 한 학생의 어머니는 지금까지 연락을 하면서 가끔씩 만나기도 하는데 작년에 드디어 서 도생이 승부수를 던졌다. 그 분은 서 도생이 증산도를 신앙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지금까지 지켜보고 교류하면서 어느 정도 신뢰도 쌓인 상태였다. 그래서 이제는 증산도 신앙을 같이 해 보자고 말을 건넸더니, 생각을 긍정적으로 해 보겠다고 답했다. 서 도생은 이분 또한 결과를 떠나 꼭 살려 주고 싶은 사람 중 하나이기에 끝까지 기도를 놓치지 않았겠다고 말했다. 더불어 작년 초부터 인터넷 블로그 포교 활동을 부지런히 하고 있으며, 현재는 무인거치대 활동도 병행을 하며 포교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서 도생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꼭 참 사람 만나기를 염원한다고 말했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결의를 밝혔다.

신앙은 성숙이요 행복이다
서 도생은 자신의 초기 10년의 신앙이 현재의 신앙 정착을 위한 전초전이었다고 회고했다. 신앙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자 한꺼번에 많은 보직이 주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성숙을 가져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일도 많았으며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도장에서 인정해 주고 고생한다는 말도 많이 해 주고 있어서, 그동안의 일들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집정 보직을 10년 가까이 맡고 있다 보니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은 항상 도장을 생각하며 살고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책임자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겠지만, 재정적인 부분이나 도생들 간의 상담 등등에 임하면서 이제는 즐겁고 신나는 신앙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기운은 그대로 가정도방에도 영향을 미쳐 이제 도방은 성숙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근원처가 되고 있다.

서 도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증산도 신앙을 하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통해 아주 작은 것이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보람도 느끼곤 합니다. 저는 증산도 신앙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확신과 결의에 찬 모습으로 담담히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서 도생의 신앙에 대한 애착과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런 심법으로 신앙을 대한다면 아마도 많은 조화가 저절로 생겨날 것이라는 생각도 스치듯이 함께 다가온다.

신앙의 품격과 성취를 서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보니 서선교 도생과 김휴동, 김진현 도생의 모습이 한눈에 가득 차서 들어온다. 대담을 위해 앞에 마주 앉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 두면서 신앙을 이어 온 여러 신앙인들의 삶을 대변하는 자화상과도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한 공간과 범주 속에서 ‘도반’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인식하지만 삶에 지치고 상념에 짓눌려 ‘조금만 더’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여유가 아쉬울 때가 있다. 평생을 지니고 사는 장애에서 비롯되었을 서 도생의 마음 고생과 부담은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입장에 있는 도반이기에, 이해하고 포용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도 좀 더 개방적이고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태모님께서 “피차 마음을 알아야 인화人和 극락 아닐쏘냐.”라고 말씀하신 심통공부의 초석이며, 태상종도사님께서 다양한 모습을 거두어 융합하는 ‘택국澤國’이 되라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신앙 품격도 보다 높아지고 천하사를 성취하는 데에도 날개 하나를 더 다는 효과를 누릴 것이다.

서 도생은 향후의 소망과 계획을 묻는 질문에 몇 가지 생각을 밝혔다. “저희 가정은 지금 협소한 공간에 천신단을 모시고 있지만 머지않아 진짜 가가도장에 맞는 격을 갖추고 신앙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편도 아들도 지금보다 신앙에서 더욱 발전하고 성숙이 되어 우리 가족이 보다 진보한 신앙의 경지를 열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가오는 그날, 함께 손잡고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또한 육태을랑이 반드시 이뤄지도록 무인거치대와 블로그 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해서 성과를 이루는 도생이 되겠습니다.” 이처럼 서 도생의 꿈은 소박하다. 많은 태을랑 도생들의 그것과 견주어 봐도 그리 특별한 것을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단순한 그것에 집중하고 더디지만 이루려고 성심을 다하는 그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서 도생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생각해 보는 한편으로 남편 김휴동 도생과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언어 장애를 겪고 있어 인터뷰가 여의치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대신 서 도생을 통해 김 도생의 마음과 배려 등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었던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김 도생은 도장 치성과 본부 증산도대학교 교육 등에 부지런히 참석하고 있으며, 도장에서도 사소하지만 필요한 곳에는 적극적으로 봉사에 나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들인 김진현 도생은 대전과학기술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 방학 중에만 도장 치성에 참석을 하고, 학기 중에는 태전 본부 행사에 최대한 참석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동료 도생의 멘터가 된 사연
대구두류도장에서 함께 신앙하는 권영희 도생은 서 도생을 신앙의 멘터mentor(길잡이)라고 칭한다. 권 도생은 건강 이상으로 머리 수술을 받고 우울증 등의 후유 장애를 겪으며 고생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권 도생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열등감 없이 자신감 있게 일을 한다’는 평을 듣던 서 도생으로부터 많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듣게 되었다.

서 도생은 몸의 균형이 무너져 장애를 겪는 그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권 도생의 입장을 헤아리고 늘 힘을 주는 말과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권 도생이 수술을 받은 후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병문안을 했고 우울증을 앓을 때에는 상담을 통해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조언하고 1000일 기도를 권유하였으며 실제로 함께 기도에 돌입하면서 어떻게든 이겨내자는 의지를 보여 주기도 했다.

특히 권 도생은 자신이 체하거나 아플 때 서 도생의 신유로 치유되는 체험도 여러 번 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보살핌과 배려가 있었기에 권 도생은 서 도생을 멘터라 칭하며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서 도생은 도반끼리 무슨 멘터냐고 손사래를 쳤지만, 동료 신앙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융화하는 한 사례요 미담임이 분명하기에 여기에 소개를 한다.



이번 가가도장은 신체의 장애를 겪고 있는 가운데도 신앙의 중심을 굳건히 지키면서 도반을 배려하고 봉직의 사명을 기쁨과 보람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도생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장애를 갖게 된 유년 시절부터 생사 문제를 깊이 생각하면서 신앙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자신 스스로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통해 신앙을 행복이요 성숙이라 말할 수 있게 된 배경도 살펴보았다.

삶이란 본래 치열한 것이고 생명의 본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 가치와 의미를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오해와 편견을 앞세우기 보다는 이해와 관용이 자연스러움과 함께하는 태도가 필요하며, 그것이 크게는 도문의 품격과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임을 강조해 보았다. “우주에서 우리가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자신이다”라고 한 유명 비평가의 말을 떠올려 본다면, 선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장애란 결국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융화하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의 장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도방 취재를 통해 장애가 있는 부부가 만나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 스스로의 신앙을 지키려는 단호함, 사람을 살리려고 애쓰는 마음 등을 통해 순수하고도 간절한 신앙 의지와 열정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바르게 마음먹은 대로’라는 일종의 슬로건을 마음에 담고서 욕심부릴 것 없이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최선을 다한다는 도방 주인의 철학을 듣고서는 무한 긍정과 초탈의 면모마저 엿볼 수 있었다.

종도사님께서는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하느냐, 발걸음을 어디다 놓느냐에 따라 우주가 바뀐다고 하셨고, 우리의 삶 자체가 천지조화의 열매라고도 하셨다. 그 조화의 열매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자 태을주를 쉼 없이 읽고, 사람 살리는 일에 부단히 집중하며, 신앙 자체를 감사와 자부심의 대상으로 여기는 서선교 도생과 김휴동 도생, 그리고 김진현 도생 가족의 도방에 천지일월의 크신 은총과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