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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산책]

    서양철학사상 | 실재reality를 찾아 나선 사람들(3)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3-2. 인문개벽의 근본은 형이상학적 실재론


    1) 최초로 인문개벽을 주도한 사람들


    전쟁의 승리로 도입된 최초의 민주제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다레이오스Dareios(BCE 550~486) 1세는 식민지 개척에 나선다. 그리스의 식민시였던 이오니아 지방이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지배를 받게 되자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는 페르시아 식민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한마디로 독립운동이다. 이에 아테네는 밀레토스에 지원군을 파견하여 도왔다. 그러자 다레이우스 왕은 494년 밀레토스를 쓸어버렸다. 또한 자신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아테네에 화가 난 다레이오스 왕은 아테네를 정복하기 위한 페르시아 전쟁을 감행한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대군은 에게Aegean 해를 건너 그리스의 중심도시 아테네로 향했다. 그리스의 마라톤만에 상륙한 페르시아의 대군이 마라톤 평야에 진을 치자, 얼마 되지 않은 그리스 군은 전쟁에 패하여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더라도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결심으로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싸워 기적적으로 이겼다. 그리스 군이 승리하자 어린 병사 필리피데스Philippides는 이 승리의 소식을 아테네 시민에게 빨리 알리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가 소식을 전하고 죽었다. 오늘날 세계 올림픽 게임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마라톤 경주가 여기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패한 다레이오스 왕은 그리스를 다시 완전히 정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을 못하고 죽는다. 그러자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BCE 519~465)는 그 과업을 받들어 기원전 480년에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2차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여 파죽지세로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남은 지역이라고는 코린토스에 집결한 그리스 연합 지상군과 구국의 일념으로 결성된 살라미스Salamis 해협의 연합군 함대뿐이었다. 이러한 위급상황은 우리의 조상들이 치룬 임진왜란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그리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군을 격파했듯이, 그리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가 이끄는 해군은 페르시아 함대들을 아테네의 앞바다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한 후 급습하여 격파한다.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는 이후 해상권을 독점하게 됐고, 델로스Delos 동맹의 맹주로 떠올라 다른 도시국가를 속국처럼 다루게 된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그리스 본토에 여러 방면에 걸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구국의 일념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가난한 평민도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시민권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아테네는 인류 역사상 기념비적인 최초의 직접민주제가 도입된다. 물론 민주제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은, 오늘날 평등민주주의 체제에서 성인이 되면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노예와 여자가 아닌 성년의 남자로 제한되었다. 그래서 아테네의 시민 중 성인 남자들은 민주적인 방식의 추첨을 통해 관리가 되거나 재판관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인문학의 문을 연 소피스테스Sophistes
    민주제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아테네에는 각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했고, 또한 여러 지방에서 이름을 날리던 식자들이 몰려들어 자유롭게 떠들어 대기 시작한다. 속설에 사람은 한양으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이, 식자들은 아테네로 가서 돈을 많이 벌든가 높은 관직에 오르든가 하여 출세를 해 보겠다는 풍운의 뜻을 품고 몰려든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바로 아테네 시대에 인문개벽의 동기를 부여한 소피스테스Sophistes(영어: Sophist, ‘지혜로운 자’를 의미)이다.

    소피스테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아테네에는 이른바 인문학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의 눈에는 탈레스에서 출발하여 원자론자들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탐구한 자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의 사회제도와 관습, 종교와 법률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주요 탐구대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진리탐구 대상은 자연(physis)이 아닌 노모스(nomos: 관습, 법률, 도덕, 제도)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소피스테스에 의해 자연중심의 사고가 인간중심의 사고로 전환된 셈이다.

    소피스테스는 왜 그리스의 노모스에 그리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그들의 어느 누구도 아테네 출신이 아니다. 지방이나 외국에서 아테네로 들어온 이방인들이어서 대부분 시민권이 없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우선 아테네의 생활문화, 관습, 법률, 종교 등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노모스를 적용하여 돈을 벌고, 아테네에서 성공적인 삶을 구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었으리라!

    노모스 사회에서 민주제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자유롭게 토론하고 주장하며 설득하는 말의 문화를 중시한다. 이것이 민주제가 참주제나 군주제, 귀족제와 다른 점이다. 민주제에서 말재주가 좋은 사람은,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민회(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것)에서나, 죄의 유무를 가리는 법정의 변론에서나, 심지어 대중들을 감동시켜 인기를 얻을 때에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뜻을 이룰 수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하고 설득하는 기술은 곧 말을 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하는 웅변술, 아름다운 문장과 언어를 체계적으로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수사학, 토론이 벌어질 때 상대방의 주장을 꺾고 자신의 견해를 관철할 수 있도록 하는 쟁론술, 법정에서 죄의 유무를 따질 때나 진위를 가리는 토론에서 그럴듯하게 피력할 수 있도록 하는 변론술 등을 익혀야 한다. 아테네 시대에 이러한 기술을 가르치는 지식인들이 바로 소피스테스였던 것이다.

    민주제가 어리석은 대중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타락한 정치(중우정치衆愚政治)라 해서 환영하지 않았던 철학자가 있다. 다름 아닌 고대의 최고의 철학자라 불리는 플라톤이다. 그 까닭은 아마도 중우정치로 인해 가장 훌륭하고 올바른 스승으로 모신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아 부당하게 죽었다고 여겼고, 결국 아테네가 파멸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피스테스는 민주제가 최선의 정치적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아테네 시민들 중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말을 잘하는 기술, 즉 변론술과 수사학을 배우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피스테스는 언술을 배우려고 오는 사람들에게 비싼 보수를 받고 민주제에서 필요한 지식과 말하는 기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민주제가 있었기에 소피스테스의 생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민주제가 실시된 아테네 시대에는 많은 소피스테스가 활동했다. 이들 중에 가장 특징이 있고 유명한 소피스테스를 꼽으라면, 단연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 하여 각자에게 보인 것이 진리라고 주장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BCE 485?~415?)가 있다. 또한 웅변가이면서 진리란 없다고 주장하여 극단적인 회의론(skepticism)을 펼친 고르기아스Gorgias(BCE 485~385),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논쟁의 무기를 제공하여 모든 토론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르친 히피아스Hippias(BCE 460~?), 언어와 문법을 가르친 프로디코스Prodikos(BCE 460~399)가 거론될 것이다.

    딜레마dilemma를 창시한 프로타고라스
    아테네 시대에 소피스테스는 주로 민주제에서 꼭 필요로 하는 변론술, 수사학 및 웅변술 등 말을 그럴듯하게 잘하는 기술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러한 기술은 이름 있는 정치가가 되어 민회에서 대중의 호응을 얻어내거나, 법정 소송에서 그럴듯한 변론을 펼침으로써 승소하는 데에 아주 유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소피스테스는 날카로운 논변이나 심오한 논리를 새롭게 창안하여 사유의 진보에 기여한 바도 더러 있다. 그 하나가 “딜레마”이다.

    논리학을 배운 사람은 잘 알고 있을 터이지만,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즉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해 있을 때 딜레마에 빠졌다고들 말한다. 딜레마란 무엇인가? 이는 그리스어 둘을 뜻하는 ‘dia’와 뿔을 뜻하는 ‘lemma’의 합성어로 ‘뿔이 둘이 되는 논변’이란 뜻이다.

    ‘뿔이 둘이 되는 논변’은 어떻게 구성되는 논리인가? 그것은 논리학의 삼단론(대전제, 소전제, 결론) 추리에서 대전제에 두 개의 가언판단假言判斷과 소전제에 선언지가 둘인 선언판단選言判斷, 그리고 결론의 정언판단定言判斷으로 이루어져 있다. 좀 더 소상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이다.

    대전제 : 만일 A라면 B이다, 만일 C라면 B이다.
    소전제 : 그런데 A이든가 C이든가 이다.
    결론 : 그러므로 B이다.


    이런 형식의 딜레마는 맨 처음 누구에 의해 창안되어 사용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테네 시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프로타고라스에 의해 창안되었고, 그의 제자 에우아틀루스Euathlus 간의 소송 사건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어느 날 에우아틀루스라는 젊은 청년이 프로타고라스한테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프로타고라스는 제자에게 엄청나게 많은 수업료를 선불로 내라고 말했다. 제자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다고 했다. 이에 프로타고라스는 그럼 수업료의 반을 우선 내고, 변론술을 다 배운 뒤에 첫 번째 소송 사건을 맡아 승소하면 그 때 나머지 반을 갚기로 제자와 계약을 맺었다.

    프로타고라스는 제자 에우아틀루스에게 변론술은 물론이고 법정에서 승소하는 방법 등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자신이 소장한 학식을 다 가르쳐줬는데도 제자는 소송사건을 맡아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나머지 수업료 반을 제자에게서 받아낼 길이 없자 프로타고라스는 법정에 수업료 지불 청구소송을 냈다. 법정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무어라고 강변했으며, 에우아틀루스는 어떻게 답변했을까?

    스승 프로타고라스의 주장 :
    “만일 네가 이 재판에서 이기면, 너는 나와 맺은 계약에 따라 나머지 반의 수업료를 갚아야 한다(만일 A라면 B이다). 왜냐하면 너에게 소송에서 승소하는 법까지 모두 다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이 재판에서 지게 되면, 법정의 판결에 따라 나머지 반의 수업료를 갚아야 한다(만일 C라면 B이다). 그런데 너는 이 재판에서 이기든가 지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A이든가 C이든가 이다). 그러므로 너는 어떤 경우이든 나머지 반의 수업료를 갚을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B이다).”

    제자 에우아틀루스의 대답 :
    “만일 내가 이 재판에서 이기게 되면, 법정 판결에 따라 나머지 반의 수업료를 갚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 재판에서 지게 되면, 스승과의 계약에 따라 나머지 반의 수업료를 갚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의 소송에서 승소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재판에서 이기든가 지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경우이든 나머지 반의 수업료를 갚지 않아도 된다.”

    역시 프로타고라스는 당대 최고의 소피스테스답게 딜레마라는 고도의 논리를 창안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했다. 하지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했던가. 제자 에우라틀루스는 딜레마를 깨부수는 법까지 터득했던 것이다. 딜레마를 깨어버리거나 피하는 법을 논리학에서는 ‘역 딜레마’ 혹은 ‘뿔 사이로 피하기’라 부른다.

    진리세계로 인도하는 소크라테스
    민주제의 도입으로 아테네는 논리적인 말의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게 됐다. 그 공헌에 이바지한 중심인물들은 단연코 소피스테스이다. 스승과 제자 간에 벌어진 수업료 소송 사건에서 보듯이, 소피스테스는 민회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변론이나 법정 소송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고도의 논리적 언술을 짜내느라 골몰하다 보니 인문학의 획기적이고 급격한 진보가 있었던 것이다.

    역사상 잘 따지고 말 잘하기로 소문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소크라테스Socrates도 거기에 한몫할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아테네를 수호하기 위한 세 번의 전쟁(포티다이아 전투, 델리온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에 참여하느라 고향을 떠났던 것을 제외하고서는 죽을 때까지 아테네에서 살았고, 아테네 청년들에게 설득술 및 변론술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와 만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설득당하고 말 정도였으니 그는 최고의 말 재주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의 활동무대는 아크로폴리스 광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등이었다. 눈만 뜨면 아테네 청년들과 시민들을 만나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테스와 같은 부류였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의 토론 방식과 말의 전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소피스테스는 상대방의 주장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론술, 설득술을 가르치거나, 현실의 삶 속에서 앎을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지식, 삶의 현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개별적인 감각적 지식을 가르쳤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참되고 영원한 지식, 즉 지혜를 가르쳤다. 그는 토론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상대방이 제기하는 잘못된 지식을 논파하여 상대가 그릇된 앎이었음을 깨닫게 하고(소크라테스의 대화법), 보편적으로 통용이 되는 지혜를 추구하여 진리에 대한 인식을 양산할 수 있도록 했다(소크라테스의 산파법). 한마디로 말해서 소크라테스와의 토론은 불교의 중관론中觀論에서 말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사견邪見과 사도邪道를 깨고 정법正法을 드러내는 일)”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엇 때문에 참된 지혜(탁월함)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에 주력했던 것일까? 윤리적으로 탁월한 것은 선善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惡의 범주에 들어간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누구도 도덕적으로 탁월하지 못한 것, 즉 잘못된 행위라는 사실을 알고서 행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까닭은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탁월함(지혜)은 인식(episteme)이요, 무지는 악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로부터 소크라테스는 ‘많이 알아라(지혜), 그러면 선한 사람이 된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선은 참된 앎(지혜)이고, 곧 사람들과 생생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체득하는 보편자에 대한 인식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요컨대 진리는 현상의 외피로 드러난 훌륭하다는 것, 올바르다는 것(정의), 아름답다는 것, 선하다는 것, 용감하다는 것 등의 개별적인 사례만을 가지고 판단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적용이 되는 훌륭함, 정의, 아름다움, 선함, 용기 등의 보편자를 본질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아는 지혜, 즉 인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생각이나 보편자에 대한 인식을 담은 단 한 줄의 글도 직접 남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이들로 하여금 진리인식에 이르도록 이끌어갔던 것이다. 대화를 통해 전개되는 소크라테스의 탐구방식과 사상은 애제자 플라톤Platon(BCE 427~347)에게 전수되었고, 후에 대화편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드러난다.

    플라톤은 무려 26편이라는 많은 대화형식의 저술을 남겼다. 방대한 저술의 대화편에는 당대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주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 사상의 진면목을 알려면 플라톤의 대화편을 탐독하면 된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대화편은 초기, 중기, 후기, 말기의 작품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초기와 중기 대화편은 주로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배운 사상들을 기록하고 있고, 후기 대화편들부터는 서서히 플라톤의 독자적인 사상을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통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2) 극단적인 실재론자 플라톤


    플라톤은 누구일까
    플라톤은 누구인가? 역대 철학자들 중 스토아Stoa 철학의 거장이자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를 제외하고서는 플라톤만큼 출신 배경이 좋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왕족 혈통과 연계된 귀족 중의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젊은 시절에 체육, 문학, 정치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때는 현실 정치에 뛰어들 생각도 품었었다. 특히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오랜 전쟁에서 패하자 민주제가 폐지되고 잠시 과두정치寡頭政治(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지배하는 정치)가 실시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플라톤은 과두제가 아테네에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과두정치에서 벌어지는 치세는 그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준다. 이에 플라톤은 과두제에 환멸을 느끼게 됐다. 채 1년도 안되어 과두정치가 무너지고 민주제가 다시 들어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플라톤은 정치에 미련을 갖고 있었지만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버렸다.

    민주제는 플라톤에게 왜 그토록 실망과 절망을 안겨주었던 것일까? 그것은 생김새가 좀 못생겼어도 가장 지혜롭고 정의로우며, 좀 괴팍하기는 하지만 항상 진리를 찾아서 의식 있는 시민들과 대화에 열중하는, 가장 존경하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급기야 참과 거짓을 분간 못하는 민주제의 중우정치衆愚政治(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아 죽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만큼 아테네의 안위를 걱정했고, 아테네 시민들이 보다 진취적이고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철학자가 역사상 또 있으랴!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청년들이 전쟁을 피해 해외로 도망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수호하기 위해 자진하여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그는 많은 돈을 받고 가르치는 소피스테스와는 달리, 40세를 전후하여 무상교육에 뛰어들었다. 눈만 뜨면 소피스테스의 말 놀음에 놀아나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아테네 청년들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을 정의로운 길로 인도하려고 안간 힘을 다했던 것이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그렇게 살았던 그가 향년 70세에 이르러 법정에 기소되었다. 죄목은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것과 아테네가 지정한 신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끌어들였다는 두 가지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는 소피스테스의 행위를 억울하게 뒤집어 쓴 누명이었고, 새롭게 끌어들인 신은 도덕적 가치판단을 내려주어 올바르게 행하도록 하는 신성한 신, 즉 소크라테스의 양심을 울리는 그런 신이다. 결국 501명으로 구성된 법정 재판관은 1차 심의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2차 형량 심의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독배를 마시고 죽을 때까지 진리를 위해 생을 불태운 정의로운 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스승의 죽음을 목도한 플라톤은 정치적인 이유로 아테네를 잠시 떠나게 된다. 그는 아테네 민주제의 중우정치에 대한 엄청난 회의감을 품은 채 지중해 연안의 여러 국가들을 여행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결국 그는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된다는 철인정치哲人政治의 꿈을 품게 된 것이다.

    국가의 통치 방식은 크게 세 종류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실시하는 법치주의法治主義, 히틀러의 독재나 진시황제가 실시한 강압적인 힘에 의한 패도정치覇道政治, 지극한 덕德을 가진 자가 다스리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그것이다. 그럼 철인정치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보자면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철학자는 누구인가? 바로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 즉 앞서 밝혔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철인정치는 동양의 정치론에서 말하는 바로 왕도정치에 가깝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정의로운 국가의 건립에 있다. 그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볼 요량으로 40세 이후부터 66세에 이르기까지 시칠리아 섬의 도시국가인 시라쿠사Siracusa를 3번이나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은 기원전 388년쯤이었다. 당시 시라쿠사를 다스린 왕은 철권통치를 휘둘렀던 디오니시오스Dionysios 1세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플라톤은 디오니시오스 1세의 음모에 빠져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 다행이도 옛 동료를 만나 그가 대신 돈을 지불하여 가까스로 아테네로 돌아오게 된다. 두 번째 방문은 기원전 367년에 디오니시오스 2세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는데, 정치적인 농간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원전 361년에 마지막 방문이 있었으나 이도 결국 실패하여 정의로운 국가 건설의 실현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의로운 국가를 세운다면
    지구상에는 많은 국가가 산재해 있다. 정작 국가의 존재 목적은 무엇일까? 흔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잘 보호하고 자국민이 안전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첫째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훌륭한 국가의 표본이라는 얘기다. 훌륭한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올바른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이다. 과거 우리의 정치사에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범국민적 표제도 등장한 바 있었지만, 참다운 정치가는 파당을 지어 진흙탕 싸움으로 일관하는 정치판을 만드는 데에 고심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올바른(정의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는가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이 아닐까?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정의(Justice)”가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어설프게 아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정의의 본질을 확실하게 알아야 올바른 국가도 만들고, 올바른 교육도 하고, 올바른 사람도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의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방안으로 플라톤이 전하는 『국가론(Politeia)』의 핵심 주제, “정의(올바름)”에 대한 대화의 내용을 일부 소개해 보자.

    『국가론』의 첫머리는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소크라테스와 몇몇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무기 수입상으로 떼돈을 번 케팔로스Kephalos에게 부자富者가 되면 어떤 점이 좋은지를 물으면서 대화의 포문이 열린다. 결국 대화의 주제는 “올바름(정의)이란 무엇인가?”로 집중된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가다가 정의는 “친구들한테는 잘되게 해 주되, 적들한테는 잘못되게 해 주는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여하간에 잘못되게 해 준다는 것은 올바른 사람이 할 바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러자 소피스테스인 고르기아스의 제자 칼리클레스로부터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 말은 강자만이 이익을 취할 수 있고, 정의를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을 포함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체 하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강자의 의미와 유사하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통치자의 힘은 자본의 축적에서 나오고,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만이 힘을 얻어 강자가 될 수 있고, 이 힘을 발휘하여 정의를 행할 수 있고, 그런 자만이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취지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방송매체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듯이, 바로 우리나라의 법조계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몇몇 법조인들이 강자의 힘을 이용해 온갖 부를 축적하는 작태를 돌아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여지없이 논박한다. 결국 정의란 약자의 손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를 수호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의 공정한 이익을 실천한다. 왜냐하면 정의는 올바르고 선하고 지혜이기 때문이다. 즉 정의로운 사람은 선하고 지혜롭지만,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악하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은 자체로 병든 것이 행복하고 선하다는 것과 같이 터무니없는 모순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현실을 돌아보면 남몰래 부정을 저지르는 악덕업자가 올바르게 사는 사람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산다. 무엇이 잘못돼서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일까?

    정의에 대한 많은 토론이 오간 후 소크라테스는 개별적인 사례들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본질에 대한 탐구로 대화를 이끈다. 그러면서 정의 자체는 너무 미묘하고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덩치가 큰 ‘정의로운 국가’를 그려보고 여기에서 정의를 인식해 보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국가의 성립에 필수조건은 국민, 주권, 영토다. 그 중에서 국민과 국민의 의식주가 중요하다. 의식주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생산 활동에 참여해야 하는데, 필요충족의 요건에 따라 생산 활동의 다양한 분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분업은 사람들이 각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우선 농업, 상업, 공업 등에 종사하여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산자 집단에 속하는 계급이 형성된다. 다음으로 이들의 왕성한 생산 활동을 관리 보호하고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전문적인 계급, 즉 수호자 집단에 속하는 계급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 집단의 계급은 다시 둘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무사 집단의 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자 집단의 계급이다.

    무사 계급에 속하는 집단은 보호해야 할 자국 국민에 대해서 온순하지만 적대자를 만났을 때는 용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을 강인하지만 온순하게 하는 정신교육과 싸움에 임해서는 용감할 수 있는 신체단련에 힘써야 한다. 이들 중에서 통치자 집단에 속하는 자들이 뽑히는데, 이들은 국가 수호(내치와 외치)에 가장 뛰어나게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사려와 능력을 함양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한마디로 모두 지혜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 수호자들(무사 계급과 통치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각자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힘과 지혜를 이용해 부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가는 이들에게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직 국가 전체의 행복을 목적으로 그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국가는 올바르고 완전하게 선한 국가로서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을 갖추고 있다. 통치자 집단의 계급이 갖추어야 하는 지혜, 무사 집단의 계급이 갖추어야 하는 용기, 일종의 질서로서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갖추어야 하는 절제, 그리고 각 계급이 자신의 직분을 완수하되 그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는 정의, 즉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을 성립시키는 정의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의는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유기적인 통일성 속에서 하나로 작동하도록 하는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최고의 통치자는 선(올바름)의 이데아를 인식한 철학자
    “옛적에는 신성神性이 하늘의 뜻을 이어 바탕을 세움(繼天立極)에 성웅이 겸비하여 정치와 교화를 통제관장統制管掌하였으나 중고中古 이래로 성聖과 웅雄이 바탕을 달리하여 정치와 교화가 갈렸으므로 마침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진법眞法을 보지 못하였나니 이제 원시반본이 되어 군사위君師位가 한 갈래로 되리라. 앞세상은 만수일본萬殊一本의 시대니라.”(『道典』2:27:2-5)

    누가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철인왕哲人王이다. 철인왕은 웅패雄覇의 기술이 아니라 성인의 도를 겸비한 최고의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구분하여 부정을 종식시키고 정의로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철인왕은 성웅聖雄을 겸비한 자라는 얘기다. 무릇 통치자란 내적으로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고, 외적으로는 위엄을 갖춘 권도를 세울 수 있는 자라야 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를 갖춘 사람이 철인왕이다. 이는 바로 청치와 철학이 분리되지 않고 합쳐져야 정의로운 국가를 이룩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철인왕이 갖추어야하는 최고의 지혜는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철학자는 개별적인 특정의 지식이 아닌 절대적인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다. 그러한 지혜를 추구하는 궁극 목적은 선(올바름)의 이데아, 즉 절대적인 근원의 진리를 인식하는 것에 있다. 선의 이데아를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동굴의 알레고리allegory를 통해 태양에 비유하여 선의 이데아가 실재하고 이를 인식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영혼의 활동으로 앎을 가지게 되는데, 플라톤이 전하는 앎의 대상을 구분해보자면, 크게 지성知性으로 알 수 있는 것들(ta noeta)과 감각感覺으로 알 수 있는 것들(ta horata)로 나뉜다. 전자는 통상 예지계睿智界, 즉 실재 세계에, 후자는 현상계現象界, 즉 그림자의 세계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재의 세계는 다시 이데아와 수학의 대상으로 구분되는데, 이데아에 대한 앎은 인식(episteme)이고 수학의 대상에 대한 앎은 추론적 사고(dianoia)이다. 그림자의 세계 또한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되는데, 감각을 통해 아는 지식은 확신(pistis)이고 감각으로도 확인되지 않는 허구에 대한 지식은 추측(eikasis)이다.

    감각으로 확인되는 현상계는 실재하는 이데아에 대한 그림자요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는 지성을 통해 인간에게 진리 인식(episteme)을 제공하지만, 현상계는 감각을 통해 잡다하고 그럴듯한 지식(doxa)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런데 이데아들 중의 이데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여러 이데아들이 실재이도록 하는 선의 이데아, 즉 이데아의 근원으로 모든 진리(眞)와 옳음(善)과 아름다움(美)의 제1원인이요 원리이다.

    정의로운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이 선의 이데아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 통치에 있어서 전적으로 지혜롭게 행위하고 참다운 도덕(천도天道와 지덕地德)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통치자가 이 선의 이데아를 보기 위해서는 오랜 교육과 지혜에 대한 탐구가 요청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하여 50여 년 동안 피나는 교육기간을 통해서만 가장 지혜롭고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이자가 곧 정의로운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실재의 기준에서 멀어진 감각의 대상
    실재에 대한 인식이 지혜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일까? 이 문제를 탐구하는 기준으로 플라톤은 몇 가지 근거들을 제시한다. 그 기준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안정성 내지는 항구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명확성 내지는 정확성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두 조건을 충족시킨 상태에서만 탐구되어진 것들이 학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두 조건을 실재에 대한 탐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선 감각의 대상들은 실재와 인식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는 것들이 현실적인 세계를 구성한다고 단호하게 강변할 수는 있겠지만, 잠시의 정지도 없이 변화하는 것들이어서 참된 실재에 대한 탐구의 두 기준, 즉 존재의 항구성과 인식의 명확성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을 예로 설명해 보자. 책상 위에 유리컵이 있고, 이 컵은 따뜻한 물로 채워져 있으며, 여기에 곧은 막대기가 꽂혀 있다면, 여기서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유리로 만들어진 컵의 둥근 원통 모양, 컵의 색깔, 컵에 꽂혀 있는 막대기의 휘어진 모습, 물의 따뜻함 등과 같은 감각 내용(quality)들이다.

    그런데 감각 내용들은 감각하는 자의 감각상태나 외부적인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지게 마련이다. 색맹이나 난시인 사람이 컵을 감각하는 경우에는 정상인이 감각한 내용과 다르다. 또한 관찰하는 자의 위치나 외부적인 조건 등에 따라 컵의 모양이나 색깔, 따뜻함 등의 감각 내용이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위치에서는 곧은 막대기가 휘어져 보일 수 있고, 주어진 상황이나 외부적인 조건에 따라서 혹은 빛의 밝기에 따라서 컵의 색깔이 달리 보이게 된다. 이러한 조건이나 상황에 의존하는 한 우리의 감각 내용은 고정된 확실한 앎이 될 수 없다.

    또한 감각의 대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모양, 색깔 등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재한다고는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의 대상은 잠시의 정지도 없는 변화의 연속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리컵의 색깔이 실재로 빨간 색으로 되어 있다면 동시에 하양 색이나 검은 색을 가질 수 없으며, 유리컵이 실재로 둥근 모양을 가진다면 동시에 사각형이나 깨어진 모양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유리컵의 모양이나 색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색이나 다른 모양으로 변화된다. 그렇게 되면 존재의 차원에서 감각되는 유리컵의 모양이나 색깔이 항구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감각의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실재하는 것(아주 없는 無)임을 의미하는가? 만일 감각의 대상이 없는 것(無)이라면, 이것에 대하여서는 생각하거나 말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감각의 대상은 어느 때는 있다가도 없고, 어느 때는 없다가도 생겨나는, 그야말로 “실재와 비실재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생성 변화에 종속하는 감각의 대상은 실재와 비실재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의 것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이런 근거에서 플라톤은 감각의 대상에 대한 앎을 말할 적에 완전한 인식도 아니고 인식의 결여도 아닌 반半 인식 내지는 인식에로의 접근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플라톤은 한마디로 학적 ‘인식’(episteme)에 반대되는 뜻인 “믿음” 또는 “독사(doxa)”라고 기술한다.

    그럼에도 감각의 대상은 실제로 어떤 목적을 위해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감각의 대상은 대략적으로 참된 것이며 잘못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이는 인식의 제한성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대상의 본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감각의 대상에 대한 지각은 한 관점에서는 참이고 다른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한 목적을 위해서는 참이고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데아에 접근하는 첫걸음
    확실성과 명확성의 기준을 충분히 통과할 수 없는 감각의 대상은 단명하고 일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실재성의 정도가 훨씬 낮은 것들이다. 그럼 실재성의 정도가 더 높은 것이 있을까? 플라톤에 의하면 감각을 넘어서 있는 원물原物이 실재하고, 감각의 대상은 이것에 의존하는 것이거나 이로부터 유래된 것들이다.

    생성변화의 영역에 속하는 감각의 대상은 실재하는 원물이 없이는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원물은 감각의 대상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고 항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의 대상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인식이 그 원물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인식보다 훨씬 더 막연하고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사물과 사물의 그림자에 비유한다. 그림자가 생기는 까닭은 사물이 있기 때문이며, 그림자의 존재 여부는 사물에 의존해서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이제 실재하는 대상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은 당연한 과제가 된다. 독립적이고 항존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명확한 특성을 가진 존재-이것이 실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일 수 있다-를 플라톤은 수학적 대상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수학에 관련된 교과목이 아카데미아Academia에서 매우 중시되었던 것이다.

    아카데미아는 기원전 385년에 플라톤이 세운 인류 최초의 학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원형이 되는 셈이다. 거기에서 그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40여 년 동안 제자들을 양성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학문 연구에 있어서 그의 근본이념은 감각의 대상과 이성적 직관의 대상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감각의 대상을 넘어서 이성적 직관의 대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카데미아 입구에 걸려있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는 현판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럼 수학에 관련된 대상이 어떻게 확실한 인식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일까? 우리가 배워서 익히 알고 있는 수학적 명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1 + 1 = 2”라고 명백히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수학적 명제에 대한 인식은 영구히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참이며, 주어진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서 또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참이거나 틀리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런 명제는 절대적으로 독립해서 참이며, 대략적으로 또는 관점에 따라서 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학적 진리는 불변적이고 무조건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주장에 대해 의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수학적 명제에 대한 인식은 실재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한갓 지성이 만들어 낸 심리적인 사실 내지는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플라톤은 수학적 명제에 대한 인식이 지성의 관념으로만이 아니라 지성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입장이다. 그 까닭은 수학의 진리성이 감각으로 주어지는 대상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1’(하나)은 단지 ‘하나’로만 파악될 경우에만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감각에 주어지는 ‘하나’의 사물은 ‘실재로’ 하나(‘1’)인 것도 아니고, 오직 어떤 관점에서만 하나이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혹은 필요에 의해서 하나로 취급될 뿐이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기하학적인 명제 “삼각형”의 경우를 들어보자. “삼각형이란 무엇인가?” 삼각형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는 자는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뤄진 다각형이다”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라서 우리는 종이 위에 이러저러한 모양의 삼각형을 수없이 그려볼 수 있다. 이렇게 그려진 삼각형들 중에는 아주 정교하게 잘 그려진 것도 있고, 아주 불완전하게 잘못 그려진 것들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우리가 ‘삼각형’을 가장 완전하게 잘 그려냈다고 해도 정의에 꼭 들어맞는 삼각형은 그려낼 수 없다. 어째서일까? 하나는 아무리 정교하게 그어도 면적이나 굴곡이 없는 ‘선분’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삼각형의 정의는 어떤 특정한 모양의 삼각형을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학적 명제는 결코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학적인 명제를 기준삼아 그려진 감각의 대상은 대략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수학적 정의에 접근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실재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감각에 주어진 대상은 수학적 명제와 같이 정의되는 실재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들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던 것이다.

    실재는 형상形相, 즉 이데아Idea다
    플라톤이 주창한 수학적 명제에 대한 인식은 완전한 확실성과 명확성의 기준을 통과한다. 그렇다면 이들 인식의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감각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감각되지 않는 세계, 즉 냉철하게 사유하는 지성의 세계에서 찾아져야 한다. 수학적 인식의 대상과 같은 실재는 감각으로 확인될 수 없는, 하지만 지성으로 인식되는 “형상”eidos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형상은 소위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이데아”다.

    여기에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조심해야 할 것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는 관념적인 인식에 대응해서 마음 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삼각형 자체”, “원(둥금) 자체”, “3 자체” 등과 같은 수학적 대상의 경우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언제나 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관념론자가 아니라 극단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론자(realist)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이 실재하는 것을 이데아(형상)에서 찾으려고 한 궁극의 의도는 감각에 주어지는 세계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특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 참된 인식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용기 있는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경건한 것” 등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제대로 알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용기 자체”,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 “경건 자체”가 현상계를 넘어 이데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이들 이데아를 인식한 자가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운 것이고 ‘덜’ 아름다운 것인지, 어떤 것이 ‘더’ 용기 있는 행위이고 ‘덜’ 용기 있는 행위인지를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도덕적인 형상을 현실적인 적용에 있어서 발생하는 어려움에 구애됨이 없이 그 자체만으로 탐구한다면, 이는 마땅히 실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 불려질 수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근거로 삼아 일상의 삶에서 필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감각세계의 사물과 현실적으로 표출되는 행위에 대하여 무엇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가 측정되고 평가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이데아)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존재 근거요, 인식이며, 진리 기준이다. 현실적으로 그려질 수 있는 이러저러하게 생긴 특정의 삼각형의 경우처럼, 이데아는 자연세계에서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사물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행위로 표출되는 용기 있는 행위라든가, 아름다운 것이라든가, 선한 행위에 대한 인식의 근거이다. 왜냐하면 감각으로 관찰되는 것은 결코 확실한 인식의 대상일 수 없고 불확실성, 모순 및 잘못의 요소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현상계 너머에 있는 이데아들은 어떤 방식으로 실재하는 것일까? 이데아들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종류보다 훨씬 더 많다. 감각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이데아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수하게 많은 이데아(형상)들은 불변적이고 독립적으로 실재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단순한 공존 이외에도 어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감각의 대상들이 상이하게 있으면서 이들 사이에 어떤 긴밀한 협조 차원을 갖추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데아들은 자체로 대등한 관계이지만 상이한 차원으로 있으면서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 마치 ‘3’이라는 형상이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일지라도 ‘삼각형’이라는 형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듯이 말이다. 이런 관계는 우리가 삼각형을 말할 때 ‘3’, ‘각’, ‘선분’ 등이 삼각형의 진술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상위와 하위의 형상이 서로 협조적으로 포섭包攝하고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아들은 피라미드식의 전체적인 체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데아의 인식에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이데아의 형상들에 대한 인식을 우리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우선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현상세계에 눈을 돌려보자. 개별적인 감각을 기준으로 해서는 실재하는 이데아의 형상에 우리가 완전히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반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데아의 형상이 감각의 대상 속에 온전히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인식한 삼각형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자. 삼각형을 작도作圖할 줄 아는 자가 그렇게 그리려고 할 적에, “삼각형의 형상처럼 보이는” 도형이 그 자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지만, 삼각형 자체는 결코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대상처럼 ‘그런 모양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적인 생활의 경험으로 보아 감각 대상들을 친숙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형상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은 우리의 탐구를 “선제先堤(hypothesis)”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예비적인 정의로 주어진 선제를 자명한 것으로 여겨 출발점으로 삼아 도형의 여러 속성들을 연역하여 정의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선제로부터 이데아의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을 플라톤은 감각적 경험을 통한 “상기想起(anamnēsis)”에 비유한다. 즉 “상기”한다는 것은 이렇다. 우리의 영혼은 원래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이데아의 세계에 살았었는데, 그때에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날 때, 창조주(Demiourgos)가 각각의 영혼을 수레에 싣고 “망각(lēthēs)”의 강을 건너 개별적인 신체에 주입하였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던 이데아 세계의 형상들을 불행하게도 모두 잊어버렸다.

    인간의 영혼은 신체에 딸려 있는 여러 감각 기관을 동원하여 현실 세계의 다양한 사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유사한 여러 대상들에 대한 반복적인 관찰은 그림이 원물原物을 상기시켜 주는 것과도 같다. 상기되는 원물(이데아의 형상)은, 각자의 영혼이 개별적인 몸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친숙하게 알고 있었지만 몸속에 들어옴과 동시에 다 망각했던 본래적인 형상이다. 감각을 통한 경험은 이데아의 형상을 상기하는 수단이라고 플라톤은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실재에 대하여 탐구하는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선제’를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검토하여, ‘선제’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되 이 과정을 사유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바로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행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통찰은 언제나 보다 광범위한 일반화(보편자)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 요구의 밑바닥에는 우리의 이해를 한 단계 높인다는 사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형상들 간에는 높고 낮은 차원이 있고, 상하의 체계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인식의 발전이란 개별 과학에서 다뤄지는 가장 낮은 차원의 형상을 넘어서 그것의 배후에 놓여 있는 보다 높은 차원에 이르면서 마침내는 모든 것의 제1 원리, 즉 궁극의 사유 대상(최고의 형상)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에서야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던 개별적인 형상들을 더 이상 고립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상하 체계의 구성원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제1 원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고, 이 원리로부터 다른 여타의 것들이 연역의 방식으로 추론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을 제1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후대의 철학적 방법에 실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탁월한 사상의 경지에 도달한 대부분의 철학자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데카르트Descartes, 스피노자Spinoza, 칸트Kant, 헤겔Hegel 등은 이러한 사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점이 바로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관한 한 합리주의 전통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던 소이所以이기도 하다.

    다음호 주제 :
    3) 형이상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4) 중세 철학의 길목에 선 플로티노스(Ploti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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