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의 긴 여정 도방으로 안착하다 (권내욱, 심미숙)

[가가도장]
권내욱, 심미숙 도생
인천송림도장에서 신앙을 하고 있는 심미숙 도생은 한때 승문에 출가하였다가 선령의 인도로 다시 돌아와 가정을 이루고 상제님 신앙을 만난 사연을 갖고 있다. 남편인 권내욱 도생과는 같은 직종에 종사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신앙의 힘을 바탕으로 가정을 튼실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부부와 두 자녀, 그리고 심 도생의 친정 부모님까지 6명의 가족이 도방 중심으로 뭉쳐 감화와 화합의 도방문화를 운영해 가고 있는 현장에 찾아가 보았다.

하나가 되는 가정에 담긴 심성


무더위가 위세를 부리던 7월의 마지막 날 오후, 취재진은 인천시 동구 송림동에 위치한 권내욱, 심미숙 도생의 가정도방을 방문했다. 인천송림도장에서 신앙하고 있는 두 도생은 도배사라는 동일 직종에 종사하면서 상제님 진리의 참된 가르침을 신앙으로 체화시킴으로써 가족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말하는 부부 신앙인이다. 항상 진리와 신앙 속에서 기쁨을 찾고 가족 간의 굳건한 유대감을 소중한 선물로 여기는 이들의 심법은 가정도장을 완전체로 만들어 가고 있는 근원이자 자산 역할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인근 주택가 골목에 자리 잡은 이 도방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아하고 평범해 보이는 단독주택이다. 하지만 실내로 들어서서 왼편에 위치한 천신단 전용 도방에 들어가 보면 이것이 가정도방인지 지역도장 신단인지 혼동할 정도의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벽의 두 면을 가득히 채운 신단은 한쪽 벽 중앙에 큼지막하게 모셔진 상제님 어진 및 태모님 진영과 함께 좌우로 태상종도사님 존영과 단군성조 존영, 태을주 액자 등이 모셔져 있고, 그 우측 벽쪽에는 천부경과 우주일년도표, 염표문이 걸린 벽면 아래쪽 신단에 기지신위와 부부 도생의 조상신위 및 영정들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어진, 진영, 존영 등은 가정 신단에 모시는 성물로는 최대 크기이다. 일반적인 지역도장 신단에는 못 미치지만 작은 도장의 신단이라고 주장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천신단을 규모있게 마련해 놓았다.

그 뿐인가. 세 단으로 나뉘어져 있는 신단 아래쪽 공간은 중앙에 미니 자개장이 고풍스럽게 놓여 있고 단주와 봉청수 도구들이 위치해 있다. 그 양 옆에는 도전과 환단고기 및 진리책 등 도서들과 홍보자료들이 단정히 진열되어 있다. 이 천신단에는 수시로 제물이 헌성되고 가족들의 기도와 주송이 이어진다. 정성스럽게 천신단을 조성하고 생활신앙으로 도방 문화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가정도장 주인의 심성이 곳곳에서 드러나 보인다.

두 도생 이외에도 방학을 맞은 중등생 아들 재원이와 초등생 딸 예원이, 그리고 자택 2층에서 함께 거주하고 계신 심미숙 도생의 친정 부모님까지 모두 6명의 가족과 함께 거실에 모여 앉아 평범하지 않은 많은 사연과 신앙 얘기들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진리를 찾은 첫 여정, 출가出家


이번 가가도장 탐방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취재진은 도방의 주인 심미숙 도생이 한때 출가한 승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속세에서 부대끼며 살다가 진리의 인연과 기회를 만나 증산도 신앙을 하게 되는 경우는 적잖게 봐 왔지만, 인생의 의문을 풀고자 출가해 불문에 들었다가 그것을 돌이켜 환속하고 가정을 이루며 상제님 진리에 안착한 사연은 흔히 만나 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우선 그 연유와 과정이 궁금했고, 그것이 상제님 진리와 어떤 연관을 지니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의 틀과 단절하고 구도의 삶을 택하는 경우는 십중팔구 남다른 구도의 열정이 내재해 있거나 특별한 사연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심 도생은 어떤 이유로 출가하게 된 것일까? 그 배경은 성장 과정 및 진리적 감수성과 연관이 되어 있다. 어릴 적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적극성과 어머니의 감화
심 도생은 경기도 고양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출생 전날 밤 심 도생의 부친은 빨갛고 커다란 금붕어가 맑은 물속에서 노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는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놀기 보다는 구슬치기, 숨바꼭질, 말타기 등 주로 남자아이들과 뛰어놀기를 좋아하던 호기심 많고 명랑한 소녀였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무엇이든지 발표하고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여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대답하는 적극적인 학생으로 성장했다. 그러한 적극성은 인생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용기가 필요할 때 주저없이 행동으로 이끈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심 도생의 인생 행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정감이 깊고 독서광이셨던 어머니(전연옥 도생)의 존재였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가계로 항상 바쁘셨지만 간식을 손수 만들어 주기도 하시고 바쁘신 중에도 늘 책을 읽고서 좋은 내용을 이야기해 주시거나 메모로 남겨 다시 읽어주시곤 했다. 독서에 심취한 나머지 아버지로부터 책만 본다고 핀잔을 듣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 유래는 외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되는데, 외할아버지께서는 동네 사람들을 여럿 모아 두고 책도 읽어 주시고 옛날이야기도 재미있게 들려주시던 분이셨는데, 어머니는 그 때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책을 가까이하는 습성을 갖게 되셨다고 한다. 더불어 어머니는 당시 외할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여러 말씀들 중에는 상제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출가를 결행하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심 도생은 여러 종류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많은 독서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종교 서적도 접하게 되었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태어나 살다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조물주가 있다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낼 때 그저 평범하게 자식 낳아 키우는 종족 보존의 목적 이외에 무언가 특별한 목적을 주고 이 세상에 보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십대 후반에 인생의 목표를 ‘조물주가 인간을 내신 목적을 찾는 것’으로 정하고 성경 불경 등 여러 종류의 경전과 관련 서적들을 읽기 위해 대형 서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 도생은 여자 상업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대학 진학에 뜻을 두고 불교학과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무산되었고, 결국 신용보증기금 회사에 입사하였다가 몇 년 후 IMF 금융위기 때 명예퇴직 대상에 지원하여 퇴직하고 난 이후,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1997년 가을 부모님께 허락 아닌 허락을 받고 경남 양산의 작은 암자로 입산을 하던 날, 심 도생의 아버지는 딸을 안아 주며 잘 가라고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가서 너 하고 싶은 것 맘껏 잘 해라.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장하다 내 딸아.” 하시며 등을 토닥거리던 어머니는 볼 일이 있어 먼저 가신다며 웃으며 길을 나섰다. 딸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말없이 큰 힘을 주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은 꼭 안아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심 도생의 가슴에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을 새겨 놓았고, 지금까지도 힘들 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보낸 딸이 보고 싶을 때면 아버지는 심 도생이 거처하고 있는 절 뒷산에 올라 혹시나 딸이 눈에 띌까 절 안마당을 바라보며 쓸쓸함을 달래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어떤 이유나 구실로도 쉽게 저버리거나 끊어낼 수 없는 것이 가족 간의 혈연관계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륜의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구도에의 실망, 그리고 환속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삭발을 하고 먹물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좋았던 것도 잠깐, 심 도생은 책에서만 보던 순수한 구도자들의 삶이 아닌 세속의 보통사람들과 겉모습 외엔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들의 삶을 직접 보고서 너무도 큰 충격과 허탈감에 빠졌다. 하지만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스스로를 등불 삼아 스스로를 의지하고 진리를 등불삼아 진리를 의지하라)이라 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절집 생활을 하나하나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인사에서 사미니계沙彌尼戒를 수계하고 계룡산 동학사강원에서 공부하던 2001년 어느 날, 조금씩 몸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온몸에 마비가 오면서 고개 한 번 돌리고 앉고 서는 데도 힘들 정도가 되었고, 치료를 받으면 그때뿐이고 나을까 싶으면 또 다시 아프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스님들이 공부하는 강원의 간병실에 홀로 누워 있던 심 도생은 “나로 인하여 스님네들이 공부도 못하고 번갈아가며 간병하고 돌봐주는 것도 죄송하고, 나는 절집 곳간이나 축내고 있는 존재로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밖에 나가서 몸을 완전히 고쳐서 돌아와야겠다 결심하고 그해 가을 잠시라 생각하며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입산하기 전 어머니와 함께 다니던 뒷산 절 주지스님께 입산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그 스님은 “팔자에 자식이 있는데 무슨 중노릇한다고 그래~ 시집이나 가지~”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 스님의 말대로 심 도생은 때가 되어 인연이 닿는 것을 거스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곧바로 아기도 갖게 되었다. 심 도생은 임신 중에도 배 속의 아기를 위해 엄마가 제대로 가지 못한 길, 구도자의 길을 바르게 갈 수 있는 참 수행자가 되게 해달라고 열 달 내내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2년 뒤에 둘째 아이를 낳을 때도 똑같은 기도를 드려 아들과 딸 그렇게 남매를 낳아 키우고 있다. 심 도생은 그런 기도를 드리며 낳은 아이들이라 그런지 어릴 때부터 참선하며 기도하고 주문읽기를 잘도 따라서 하는 기특한 아이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고 했다.

“아이들을 낳아 키워 보니 부모님께서 저희 삼남매를 낳아 얼마나 큰 사랑으로 키우셨는지, 얼마나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또 잊었던 옛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제가 참 많이도 불효했구나 뉘우치게 되었고 그동안 못해드린 것을 두 배 세 배 더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딸은 엄마가 되어 보면 철이 든다고 한다. 엄마가 되어 부모님에 대해 회고하는 심 도생의 몇 마디 말은 출가 및 환속의 기억과 오버랩되면서 더욱 깊은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구도의 미련 속에 만난 대순진리회


정성기도를 재촉하는 사람들
결혼하고 아이를 둘씩이나 낳고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잘도 따르는 예쁜 아이들을 보고 있을 땐 행복했지만, 다들 잠든 후 혼자 있을 때 심 도생은 구도자의 삶에 미련이 남은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얼른 키워 놓고 다시 산사로 돌아가서 공양주라도 하고 살면서 남은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쓸쓸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여기에 가정문제로 힘든 시간들이 이어지면서 답답한 현실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던 2009년 3월 2일, 그날은 아들 재원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자 심 도생의 생일이기도 했다. 몸살이 너무도 심해 걷는 것조차 힘에 부쳤지만 크레파스 등 학교 준비물을 사기 위해 집 앞을 나섰는데, 얼마 걷지 않아 여자 두 사람이 다가와서 차를 한잔 사 달라는 말과 함께 조상님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며 삼칠일 기도를 들여 보라고 했다. 오늘은 너무 힘이 들고 돈도 없으니 다음에 하자고 했더니 오늘이 아니면 안된다고 재촉을 했다. 할 수 없이 힘든 몸을 이끌고 수중에 있던 7만원을 지닌 채 생일이라고 찾아오신 부모님께는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고 그들을 따라갔다. 한복을 갈아입고 간단한 주과포를 차려 놓고 시키는 예법에 맞추어 30~40분간 정성을 들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이왕 들인 정성이니 삼칠일은 맞추어야겠다는 생각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21일 동안 정성기도를 다녔다.

상제님 진리를 찾고자 했지만
그것으로 끝맺고 그만두려 하였는데 기도를 다 마치고 나니 실존인물이라는 상제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상제님이 이 땅에 강세하셨으며, 바로 이분이 석가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륵이시라는 말에 너무도 놀라고 궁금증이 생겨서 책을 빌려 보려 했지만 반출이 안 된다고 하여 그 이후로 시간이 될 때마다 들러서 책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며 자연스레 그곳에 다니게 되었다. 단체 이름은 물어봐도 밝히지 않고 그냥 미륵부처님 모시는 절이라고만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대순진리회였다.

하지만 바쁜 가정사에 자주 다니지는 못하고 매월 성금만 내기를 2년쯤 하던 어느 날부터 심 도생은 삼신상제님과 의통 도통 등 진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행사란 행사엔 열 일을 제쳐 두고 다 참석했고 일반신도인데도 불구하고 갖은 부탁 끝에 간부수련회 등에도 참석했다. 높은 간부들에게 식사 대접도 해가며 만날 기회를 만들어 진리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모든 사람들의 진리가 제각각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았고 말이 막히면 그냥 위에서 그렇다 하면 그런 거지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으냐며 말을 끊는 바람에 답답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심 도생은 또한 그곳에서 배례하고 주문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문제에 대해 털어놓았다. 배례하고 주문을 읽는 것이 너무 빠르고 급해서 전혀 예의가 없어 보인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고 했다.

드디어 이어진 도문과의 인연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그러던 2012년 8월경 심 도생이 도배사로 일하고 있는 곳에 얼마 전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분이 방문을 했다. 심 도생은 그분이 외출 중인 사장님과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민족종교와 제사, 조상님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는 것을 듣게 된 심 도생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그분에게 무슨 종교인지, 혹 대순진리회가 아닌지를 물었더니 그분은 대순진리회가 아니고 증산상제님을 신앙하는 증산도라고 답변을 했다. 심 도생은 대순진리회도 증산상제님을 신앙하는 곳인데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이냐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분은 본인보다 더 설명을 잘 하시는 분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고, 심 도생은 일을 마치고 그날 저녁에 바로 인천송림도장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이끈 그분이 바로 인도자인 김재복 도생이다.

도장을 방문해 소개받은 교정님과 약 3시간 정도의 대화를 통해 삼신에 대한 의문이 확연히 풀리게 된 심 도생은 <천지성공>과 <생존의 비밀>이라는 두 권의 책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우주1년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상제님께서 이 세상에 강세하신 이유와 개벽이 오는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게 된 심 도생은 어머니께도 증산도에 다녀온 이야기와 함께 이 책들을 전해 드렸다. 그 당시 대순에서 8년 정도 신앙하고 있던 어머니는 책을 단숨에 다 읽으시곤 진리가 상세히 서술된 것에 크게 감동하셨다며 두세 번을 연달아 읽으셨다. 이삼일 후에 다시 도장에 방문한 심 도생은 포정님과의 면담을 통해 본격적인 진리 공부에 앞서 입문식을 치르기로 하고 며칠 후인 8월 말경 어머니와 아들, 딸까지 가족 4명이 함께 입문식을 하게 되었다.

진정한 구도의 문에 들어서다
진리 공부의 과정에서 심 도생은 정성을 다해 참여하고 집중했다. 당시 파주시 운정 지구에 살고 있던 심 도생은 주로 도배 일을 다니던 곳이 인천이어서 낮에는 일을 하고 일을 마치고 나면 도장에 저녁 7~8시쯤 도착하여 2~3시간을 진리 공부를 하고 귀가하면 밤11시에서 12시 가까이 되곤 했다. 살고 있던 집 가까이에 증산도 도장이 세 군데나 있었지만, 송림도장 포정님의 교육이 너무나 재미있고 편안하며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멀지만 거의 매일 그렇게 출퇴근을 하며 두 달간의 공부 과정을 마쳤다.

한편으로 입문을 한 4명의 가족 모두가 청수그릇을 준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목욕재계를 하고 청수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어린 아들과 딸도 짜증 내지 않고 기특하게 잘 따라 주었다. 보통 새벽 6시 반쯤 출근하여 밤11시 넘어서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저녁 청수를 모시는 시간은 보통 새벽 1~2시경이었다. 어떤 날에는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읽다가 앉아서 한두 시간이나 졸 때도 있었고, 또 심고를 드리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아침에 깨어 보면 얼굴에 손자국이 생겼는데, 하루는 얼마나 깊이 손자국이 생겼는지 출근을 했는데도 다 지워지지 않았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청수 모시다가 잠들지 않은 날에는 반드시 진리서적을 30분 이상씩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두 달간을 계속하면서도 심 도생은 피곤함을 잊은 채 몰입을 했다.

“증산도 팔관법 공부를 시작하고선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진리에 눈을 뜨는 순간순간의 가슴 벅참에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던 그때가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때였습니다.” 진리공부에 몰입하던 당시의 정서에 대한 심 도생의 회상이다.

드디어 2012년 10월, 심 도생은 도문으로 인도해 준 김재복 도생과 함께 태전 증산도 교육문화회관 태을궁에 입장하여 입도식을 올렸다. 입도식 때는 많은 동기 입도생들을 대표하여 대표 선서를 하는 영광도 누렸다. 심 도생에 이어 다음 해 7월과 12월에는 아들과 어머니, 딸도 모두 입도를 하였다.

헤어진 가족을 되찾아 준 증산도 진리


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입도 이후 육임완수를 위해 포정님과 함께 패널 포교 등 포교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던 2014년 3월 중순경 심 도생은 함께 일하게 된 동료분과 개인 차량으로 날마다 출퇴근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차에 태을주를 항상 틀어놓고 자연스레 증산도 이야기도 나누면서 그분과 하나씩 진리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이것이 진전이 되어 도장에 인도되고, 이후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 돌아오는 하루 일과를 쪼개어 21일 정성수행과 진리공부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2014년 11월에는 입도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동료가 지금 심 도생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있는 권내욱 도생이다.

심 도생은 환속하여 결혼을 한 후 가정문제로 아픔을 겪으면서 혼자서 아이 둘을 양육하며 살게 되는 상황에 놓였고, 그렇게 인생의 변화를 거쳐 증산도 진리를 만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과 힘든 일들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입도 이후에 포교 과정에서 권 도생을 만나 가정이 회복되면서 비로소 안정과 평안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권 도생은 2014년 5월 심 도생의 아들 재원이가 교통사고로 두 달간 입원해 있을 때 아빠 대신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곁에서 병실 수발을 하면서 좋은 사이가 되었고, 생업 현장에서 심 성도와 일을 하면서도 잘 협력하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더불어 진리에 인도되어 신앙생활까지 함께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진리로 회복한 가족의 상처
권 도생에게는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다. 그는 고교 3학년 때 갑작스런 가정불화를 겪으며 가족과 떨어져 거의 연락을 끊고 살아온 지 오래였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동사무소에서 가족관계 서류를 발급받게 된 권 도생은 아버지께서 2010년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홀로 아버지 제사상을 조촐하게 차리고 다시는 뵐 수 없는 아버지를 부르며 많이도 울었다고 한다. 새어머니 밑에 살고 있을 두 동생을 찾아 그간의 일을 알아보려 했지만 무엇 하나 변변한 것이 없는 터라 찾아보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 증산도를 만나 부모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수소문 끝에 동생들을 찾게 되었다. 올해 41살인 막내 동생이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조부모님과 아버지 제사를 꾸준히 모시고 있는 것을 알고 권 도생은 무척이나 감사하고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추운 겨울 어느 날 길가에서 이제는 다시 헤어지지 말자며 여동생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 권 도생은 부유한 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나 고3 때까지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자랐지만, 가정파탄으로 인해 나이 차이가 많은 동생들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며 두 동생들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2015년 3월 도장에서 뒤늦게 올린 부친의 천도식에는 권 도생과 두 동생 가족들이 모두 참석하여 함께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권 도생은 입도식을 하던 날 밤 몸에서 큰 구렁이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잠에서 깨어났는데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또 부친의 천도식 후에는 꿈속에서 육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분을 만났는데, 살면서 그렇게 인자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분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집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심 도생은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한데, 그분은 의자에 앉아 권 도생에게 “나와 함께 일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시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사람을 살려야 된다”고 했다. 권 도생이 지금은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하다고 했더니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웃으면서 같이 다니자고 해서 얼른 알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권 도생에게 증산도는 인생의 큰 은인이자 스승이다. 진리공부를 통해 조상과 가족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고,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마음들을 떨쳐 버리고 생전 못해드린 효도를 천도식으로나마 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동생들을 찾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두 동생 가족들도 반드시 증산도에 입도케 하여 다가오는 대 환란을 극복하고 새 세상에서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한다.

이사와 도방 확장으로 얻은 것들


치성 참석을 위해 집을 옮기고
권 도생과 심 도생 부부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낀 한 가지 고민은 치성 참석의 문제였다. 이 가족들은 일요일과 수요일 정기치성에 참여하기 위해 파주에서 인천까지 왕복 80km를 운전하여 다니곤 했는데, 일요일은 쉬는 날이라 괜찮았지만 수요치성에는 함께 참석하는 것이 어려운 날이 많았고 치성 후에 모임이나 행사에 모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 사는 곳을 옮기는 이사였다. 서둘러 집을 알아본 결과 마침 도장 바로 옆에 넓고 좋은 단독주택을 얻게 되어 새 학기 시작에 맞추어 2월에 이사를 하고 아이들도 전학을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고 나니 일이 바쁘더라도 아이들이나 어머니 혼자 치성에 참석할 수도 있었고 치성 후에 구역모임이나 행사에도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도방의 위상을 정립하다
새로 이사한 집에는 주방 옆에 두 명 정도 앉아 기도하기 딱 좋은 작은 방 하나가 있어서 그곳을 신단을 모실 도방으로 정하고 도배 장판도 가장 먼저 시공하고 깨끗이 정비한 후 도장 성도님들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사 고사치성도 드리고 동네분들과 떡도 나누어 먹었다. 또한 가족들을 참 진리로 인도하여 주신 조상선령님들께 보은하기 위해 어려운 살림이지만 조상 천도식을 두 차례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도방이 좁다는 생각이 들어 올해 3월에는 태상종도사님 어천치성을 기점으로 도방을 출입문 옆에 있는 큰 방(현재의 도방)으로 확장해 옮겼다. 어천치성이 끝난 후 대형 어진과 진영 등을 구입해 와서 새 도방에 모시면서 천신단을 깔끔하고 규모있게 조성했다. 본부에서 어진 등을 구입해 집으로 모셔 온 그 새벽 시간에 집에서 주무시던 심 도생의 아버지는 꿈속에서 상생방송을 통해서 뵙던 종도사님이 집 안으로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새 도방에 모셔질 어진과 진영, 존영 등이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방은 그렇게 신성한 기운을 안고 가정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고, 가족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터전 역할을 하고 있다.

탄력이 붙은 홍보포교활동
도장 가까이 이사를 온 후부터는 홍보포교 활동 참여에도 탄력이 붙었다. 일요치성 이후나 쉬는 날이면 포정님과 함께 패널포교를 다녀오기도 하고 행사 홍보활동 등에도 적극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 민족 9천년 역사의 혼이 담긴 <환단고기>를 전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두꺼운 환단고기 원전과 소책자들을 항상 차에 가지고 다니며 책을 좋아하는 분들을 만나면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전하고 있다. 인천 환단고기 북콘서트 행사 때에는 홍보지 활동을 통해 한 분을 행사에 인도하고 세미나에도 적극 참여시킨 적도 있었다.

예비도생인 아버지가 미치는 영향


신앙으로 하나 되는 가족을 위해
가정도장을 가족 화합의 성소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심 도생은 완전한 도방을 만들어 내기 위해 기도와 정성을 아끼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바른 진리를 만난 것이 좋았지만, 지금은 가족이 신앙으로 하나가 되는 게 좋습니다. 신앙하는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수행과 배례를 하면서 아직 입도 전인 친정아버지의 입도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심 도생의 얼굴에는 간절함과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이 가정의 어른이신 심 도생의 친정아버지는 심윤섭 ‘예비도생’으로 불린다. 아직 입도를 안 했을 뿐이지 상생방송을 시청하고 일산, 강화 환단고기 북콘서트에 참석하셨으며, 도장의 큰 치성 때나 태전 본부의 행사에도 여러 번 참석을 하셨기에 진리의 대의에 공감을 하고 있다. 예전의 그릇된 신앙단체에 비해 아주 건전하고 바른 곳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다만 아직 진리에 부합하는 조직 신앙에 동참할 마음을 먹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친정아버지가 보여주신 감화
도방에서는 오히려 친정아버지의 행동에 도생들이 자극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 예비도생은 도방 천신단에 모셔진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 앞에 절을 하고 가족 잘 되기를 부탁드리거나 조석으로 인사를 꼬박꼬박 드리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실 때면 제일 먼저 잘 다녀왔다고 신단에 인사를 드리는 모습에 다른 가족들이 감동을 할 정도라고 한다. 신앙을 하는 도생 가족들은 집에 들어오면 각자 볼일 때문에 청수 모실 시간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가정의 제일 어른이 꼭 살아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듯 제일 먼저 예를 갖추는 모습에 도방 가족들은 긴장과 반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 유무를 떠나 이러한 모습은 가정이 하나의 가치로 결집을 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심 도생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가끔씩 태을주를 따라 읽기도 하시는 아버지를 반드시 입도하시게 해서 6명의 가족 모두 가정도장을 중심으로 태을주로 하나 되어 친척들과 지인들 그리고 나아가 세계인류를 구원하는 태을핵랑으로 거듭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또한 도맥의 뿌리가 되는 김재복 도생과 심 도생의 가족들이 도장에서 새로운 구역을 구성하고 6임을 완수하기 위해 함께 준비를 하고 있으며, 모든 구역원이 가가도장을 이루고 도방을 개창하기 위해 매일 기도하고 수행에 진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권 도생과 심 도생은 상제님과 태모님,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 그리고 항상 자손 잘 되기만을 기도하시는 천상의 조상선령님들께 보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매듭지었다.



도방에서의 수행 체험
가정도방에서 두 아이들은 매일 계수기를 누르며 주문 읽기를 열심히 하는 도생들이다. 보통은 3천독 이상씩 읽고 가끔은 하루에 일만독을 읽었다며 자랑하기도 한다. 아들 재원이가 하루는 시험을 보다가 헷갈리는 문제가 나와 고민하다 태을주 주문을 읽자 사지선다형의 답이 선명하게 입체적으로 보여 문제의 답을 맞추었다고 한다. 또 재미있는 것은 친구들하고 잡기놀이를 하며 뛰어다니다가 거의 잡힐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뛰다가도 주문을 읽으면 안 잡힌다고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하며, 꿈속에서도 만화 캐릭터에 등장하는 나쁜 놈들이 가끔 쫓아다니는데 그 때도 관운장주를 읽으면 사라진다고 한다. 도방에서 주문을 읽고서 좋아하는 도공을 할 때는 맑은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등 여러 체험들도 하고 있다.

재원이가 언젠가 도장에서 도공을 할 때 엄마와 비슷하게 생긴 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을 지신 할머니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분이 말하기를 앞으로 십 년 안팎으로 큰 일이 생기는데 그 때를 대비해서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를 해야 된다고 하시며 목록들을 일러 주었다. 투명한 통에 들어있는 물(생수)과 단물(음료수)을 준비해야 하는데 단물은 너무 많이 먹게 되면 갈증이 나서 못쓰니 조금만 먹으라고 했고, 쇠그릇에 생선이 들어있는 것이 있는데 깜깜한 곳에서 뚜껑을 따다 손을 베어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으니 뚜껑이 종이처럼 생긴 것을 많이 준비해 두라고 했으며, TV에서 긴급뉴스를 발표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되면 빨리 큰 마트로 뛰어가 물건들을 더 사 두라고 했다. 또 동생 예원이는 엄마와 함께 매일 태을주 3천독을 해야 한다고 했고, 외할머니는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으시지만 괜찮아질 거라 했으며, 외할아버지는 우선 큰 행사 때는 도장에 꼭 모시고 다니라고 하면서 재원이 너는 엄마 말씀만 잘 들으면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재원이가 누구시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하지 않고 그냥 멀리 사라졌다고 했다.

심 도생은 태을궁 집중수행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새벽녘에 주문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태을궁 단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앞에 얼마나 크신 분이 서 계신지 하얀 한복 바지와 두루마기 자락만 무릎 아래로 보일 정도였다. 그분이 도첩과 비슷한 것을 내려주셔서 두 손을 올려 받았는데 손 끝에 받는 느낌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깜짝 놀라 깬 적이 있다고 한다.

올해 71세가 되신 심 도생의 어머니 전연옥 도생은 몸이 많이 쇠약해져서 한동안 요양차 병원에 계시다 연초에 퇴원을 했다. 그 후 작정을 하고 2월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서 목욕재계와 105배례 주송 및 도공을 하며 정성수행을 하고 계신데 요즘은 기력을 회복하면서 몰라보게 건강이 좋아졌다. 평소 진리를 잘 이해하고 믿음에 확신을 갖고 있었던 전 도생은 자신의 의지와 정성으로 건강을 회복한 것이다.

이번 가가도장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 출가를 감행하였으나 범속의 본질을 벗지 못하는 기성 진리의 한계, 그리고 상제님의 대도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왜곡의 장막을 감당해야 했던 한 도생의 구도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삶의 질곡에서 상처를 받고 뿌리와 유리된 채 살아오다가 진리를 통해 비로소 본래의 가족 관계를 회복한 도생의 진리적 여정도 확인했다.

이들 도생의 구도 과정 속에는 진정한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필요한 가족의 진리적 이해와 헌신적 지원, 대범한 발상과 구도의 열정 등이 융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참된 진리를 만난 이후 모든 삶의 조건과 흐름을 온전히 진리의 기반 위에 올려놓고 집중하면서 도방을 통해 하나 된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도생 부부의 의지와 노력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심 도생의 부모님은 그 형태와 관점은 다르지만 진리를 바라보고 실행하는 결과적 모습은 인생의 선배요 어른으로서 좋은 귀감이 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생활 속에서 진리를 실천한다는 것, 진리적 원칙과 도의를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에 감동하고 외치기는 쉽지만 그것을 말없이 실천하며 도방의 틀로 체화시키는 것은 가족의 이해와 단합, 그리고 뜨거운 열정과 보은의 정성이 없이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다양하고 많은 사연과 굴곡을 안고 흘러온 구도의 여정들이 증산도의 도문에서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이 가족처럼 도방의 가치와 위상을 스스로 정립하고 원시반본의 진리 정신을 생활신앙으로 실천하는 문화를 만들어 보기를 권한다.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가족을 각성시키고 감화시키는 것이라면 마침내는 가정도방이 강고해지고 도력이 강화되면서 진정한 생명 구원의 성소로 탈바꿈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늘 한결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권내운, 심미숙 도생의 도방이 완전체로 자리를 잡아 살릴 생生 자의 도권으로 충만한 태을랑의 명소가 되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