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고종 광무제高宗(1)

[도전속인물탐구]

제1부 파란과 격동의 시대에서 비상을 꿈꾸다
대한제국 고종 광무제高宗 光武帝
(주1)



※ [편집자주] 이번 호 ‘도전인물열전’은 <대한제국 고종 광무제>에 대한 기사이다. 철저한 사대주의에 빠져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조선 왕조의 폐단을 극복하고 조선 말(1897년)에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선포와 자주 독립국을 선언한 것은 동북아의 중심이었던 옛 조선 삼한의 영광과 천자국의 위상 회복을 선포한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이에 월간개벽에서는 대한제국과 고종 광무제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배경 및 그 함의를 두 차례에 걸쳐 싣고자 한다.

이번 1부에서는 대한제국의 성립과 역사적 배경 및 13년 대한제국의 한계를 중심 내용으로 하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대한 이야기를 박스기사로 다루었다. 이어지는 다음 호 2부에서는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의 퇴위 등 제국의 쇠망 과정과 평가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인 명성황후 이야기를 부가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상제님의 강세
상제님께서 하늘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의 간곡한 기도와 하소연을 들으시고 새 우주를 열어 도탄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건지시기 위해 새 역사의 태양이 떠오르는 동방 땅에 강세하시니라
환기(桓紀) 9070년, 배달국 신시개천(神市開天) 5769년, 단군 기원 4204년, 조선 고종 8년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 음력 9월 19일(양력 11월 1일) 자시(子時)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古阜郡 優德面 客望里)에서 탄강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1편 11장 1절~4절)

태모님의 탄강
동방 배달국의 신시개천(神市開天) 5778년, 단군기원 4213년, 조선 고종 17년 경진(庚辰 : 道紀 10, 1880)년 음력 3월 26일 축시(丑時)에 전라도 담양도호부 무이동면 도리(潭陽都護府 無伊洞面 道里) 고비산(高飛山) 아래에서 탄강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11편 2장 2절)


고종 광무제, 천제를 올리고 황제국을 선포하다


서력기원 1897년 정유丁酉, 음력 10월 12일. 새벽 2시쯤인 축시 무렵, 46세 중년의 조선 26대 임금 이희李㷩(후에 熙로 개명)는 환구단圜丘壇 제단 앞에 섰다. 전날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지금의 덕수궁 대한문)을 나와 환구단까지 좌우로 도열한 대한제국군의 사열을 받으며 황색 의장으로 호위를 받았다.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였고, 어가 앞으로 태극기가 먼저 지나갔다. 임금은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었고, 그 뒤를 따른 황태자 이척李坧은 홍룡포를 입었다.

전날에 이어 이번에는 천제天祭를 봉행하기 위해서였다. 임금은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황지기皇地祇의 신위 앞에서 천제를 올렸다. 황천상제와 황지기는 곧 천지天地 그 자체였다. 하늘과 땅에 직접 제사를 올림으로써 ‘공과 덕이 위대하여 천지에 짝하며 존귀하기가 하늘의 신과 같은 분’ 즉 천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천제가 끝나자, 의정대신들은 망료위望燎位(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태우던 곳)에서 무릎을 꿇고 아뢰어, 황제의 옥좌에 오르기를 요청한다. 이어 신하들은 옥좌에 오른 임금에게 곤룡포와 면류관을 입혀드리고, 황제 권위의 상징인 어보御寶를 올린다. 이제 더 이상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제후가 아니라 상제님께 직접 책봉을 받는 천자가 된 것이다.

고려 이후 명나라 청나라에 사대하였던 제후국의 위격에서 본래 천자국의 자리를 회복한 것이다. 통치강역은 한반도와 북으로는 간도, 동으로는 독도, 남으로는 제주도 인근 도서까지였다.

황제는 이미 8월 14일에는 ‘광무光武’ 연호를 정하였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에 있는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을 지었다. 이를 직접 감독했던 광무제는 준비된 제단, 제기, 희생물, 제사용품 등을 조심조심 세심하게 살폈다. 즉위식 이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황제국을 선포하였다. 마치 단군조선 44세 구물 단군께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고 국운 대전환의 계기로 삼은 것처럼(단기 1909년, BCE 425년).

대한제국 성립의 배경


즉위식을 마친 후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박스기사 참조] 대한제국의 성립 배경을 밝혔다.

대한제국 선포 이전, 조선과 고종 광무제를 둘러싼 상황은 참담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1894년 일어난 갑오 동학혁명을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해야 하는 어렵고 고통스런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던 중 일제는 전쟁 중에도 하지 않을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명성황후를 경복궁에 난입하여 살해한 것이다(1895년 을미년에 있었던 일본 정부의 왕비 모살 사건).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유기하였으며, 군주와 세자를 겁박한 상황.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인도, 국왕의 체면과 조선의 국제적 지위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나약한 군주가 고종이었다.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 끝에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해야 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 2월 11일 7시경이었다. 이후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활했다. 이를 두고 각계각층에서는 환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자주 독립의 상징으로 황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열화와 같은 요청이 이어졌다. 이전인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일제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했을 때 일제는 조선 독립이라는 미명으로 청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일본이 조선에서 오로지 독점권을 행사할 의도로 명목뿐인 황제국 선언을 종용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던 고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종용에 일정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 황제보다는 낮은 ‘대군주大君主’란 칭호와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고종은 이제 실추된 국가의 위신을 회복하고 새롭게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작은 나라로 외국의 압제를 받으며 신변의 위협을 받는 게 아니라, 군권을 회복하여 이 난국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 길은 비명에 간 황후를 위로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자주를 선언하고 독립을 분명히 함으로써 모두를 기쁘게 하고 상처가 난 백성들의 마음을 위무하려 했지만, 초기에 국내외 반응은 싸늘했다. 서양 각국에게 대한제국 선포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과연 독립국인가 하며 조롱하였고, 청은 고종의 황제 즉위를 망령되게 스스로를 존대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것보다 더 큰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국내에서는 소중화 의식에 젖은 부유腐儒들의 반대 여론이 드높았다.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조선의 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國格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프랑스를 필두로 제국의 선포를 축하한다는 전문이 답지하면서, 세계 여론은 반대에서 환영의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대한제국은 우선 제국의 위상에 맞게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제국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개혁의 구심체로서 이제 막 황제위에 오른 자신의 지위도 굳건하게 해야 했다. 광무제에게는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왕권을 둘러싼 황실의 위기


환구단에서 천제를 올려 황제로 등극한 대한 광무제, 그는 훗날 일제강점기에 정해진 ‘고종高宗’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원래 그는 왕위 계승권에서는 거리가 멀었으나 어느 순간 갑자기 왕위에 올라 숙명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철종의 승하 1863년 12월 8일 조선 제25대 임금인 철종이 승하하였다. 재위 14년 만인 33세의 나이였다. 혈육은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가 박영효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사가 없었다. 왕위 계승에 비상이 걸렸다. 이때 발 빠르게 움직인 이가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이하응의 부친인 남연군(이구 李球, 1788~1836)은 본래 영조와 사도세자의 후손이 아니라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후손이었다. 그러던 중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이신 李禛, 1755~ 1771)의 양자가 되면서 흥선군의 형제와 그 자손들은 영조의 후손으로 왕위 계승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친조카들은 있었으므로, 흥선군은 효명세자빈인 신정왕후 조씨(神貞皇后 趙氏, 훗날의 조대비)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아들 헌종의 후사가 없었던 조대비는 그런 흥선군의 조건을 수용하였다. 철종 승하 후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은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12세의 나이에 조선 제2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니 그가 고종이다.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특별한 절차 없이 왕위에 올라 전혀 예기치 않게 인생 반전을 경험한 고종은 1852년 임자년(철종 3년) 9월 8일 (음력 7월 25일)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雲峴宮에서 태어났다. 운현궁은 처음에는 구름재 댁으로 불리다가 고종이 즉위하면서 운현궁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아명은 개똥이, 소년기에는 명복命福이라 했다.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이름을 재황載晃으로 다시 황제로 즉위하면서 희㷩(熙)로 개명하였다.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이라고 했다.
즉위 초기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興宣 대원군大院君이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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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나라는 7세의 동치제의 재위시절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모후인 서태후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종의 교육을 책임진 강관講官들은 동치제와 선의의 경쟁 관계를 이끌기도 하였다. 동갑내기였던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고종보다 늦게 1867년 1월 9일 16세로 천황 자리에 올랐다.

섭정은 맡은 흥선 대원군은 구악을 일소하면서 개혁정치를 펼쳤다(호포법, 삼군부 부활, 서원 철폐 등). 그 목적은 왕권 강화였다. 경복궁 중건도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개항을 요구하는 서양의 요구에는 단호히 대처하는 방식으로 응해 두 번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1866년 프랑스와 병인양요, 1871년 신미년 미국과의 신미양요).

그러던 1869년 1월 31일(1868년 음력 12월 19일)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왕정복고를 한 일본의 사절단이 동래에 도착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국서 중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꾸고,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했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 음력 2월 쓰시마번對馬島이 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 공관’이라고 바꾸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되었고,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었으며 자기들끼리 내전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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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친정 22세 되던 해 흥선 대원군의 독재에 반발한 면암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받아들여 대원군은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그 이전인 1866년 1살 많은 여흥驪興 민씨閔氏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바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의 어머니 부대부인府大夫人과 할머니와 부인과 며느리(순종 융희제의 비인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1872~1904)까지 모두 여흥 민씨 집안이었다. 여흥 민씨는 태종비인 원경왕후와 숙종비인 인현왕후를 배출한 가격家格이 매우 높은 집안이었다. 여기에 정치적 감각과 센스, 결단력을 지닌 황후를 배경으로 한 처족인 여흥 민씨는 고종 친정 시기에 급성장하여 상당한 위치를 점하였다. 이들은 고종의 기반 세력 역할을 하였다.

고종은 조용한 성격과 침착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결정을 빨리 내리지도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쉽게 노출시키지도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앞서 피력하기보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담아 듣는 스타일이었다. 중신회의 때에도 전체 의견을 통합하고 융화하면서 정책노선을 결정하였다. 이런 스타일은 국가가 평화로울 때는 원만한 국정 수행을 하기에 훌륭한 리더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전환의 시기, 격동의 시기였다. 제국주의의 거센 침략의 파고 앞에는 지나친 신중함보다는 명쾌한 판단력과 결단력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반면에 명성황후는 활달한 성격에 똑 부러진 성격이었다. 성향이 다른 두 인물이 부부로서 공적인 자리에 섰을 때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을 리드한다고 생각하며 좌지우지한다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고종의 입장에서 황후는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최고의 정치적 보필자이고 보완자이자 동반자인 관계였다.

군주권 수호 고종은 군주권을 수호하는 것이 곧 국권을 지키는 일이요, 궁극적으로는 민권도 강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주권과 국권 수호를 위해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을 동원하고 활용하였다.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을 계기로 개항을 한 이후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세를 등에 업은 정치세력들을 상황에 따라 달리 활용해보려 한 것도 군주권 수호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고, 그의 옆에는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성향이 다른 정치세력과 처족인 민씨 세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군주권을 수호하고 자신의 집권 기반을 또다시 구축하는 일을 되풀이하였다.

이런 고종의 군주권 수호에 대한 집착은 정치적 적대 관계로 돌아선 아버지 대원군과 조카 이준용 등과의 갈등, 조선 지배권을 노리는 청과 일본의 위협, 국내 정치 세력의 반정권적 음모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다양한 인물을 단기간에 걸쳐 폭넓게 교차 임용한 것은 서로 다른 정치성향을 갖는 인물들을 역이용하는 인사정책이었다. 이는 정국을 불안하게 하는 단점이 되기도 하였지만, 여러 정치세력들로부터 충성을 유도하는 통치전략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것이 충족되지 못한 현실 상황의 와중에서 임금보다는 외세에 더 친밀감을 보인 관료집단이 형성된 점은 고종의 비극을 넘어 망국의 비극을 가져오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양한 정치세력의 충돌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으로 귀결되었으며 그에 따른 진통으로 조선은 조용할 틈이 없었다.

아관파천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서양 삼국, 곧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간섭으로 승리의 이권을 내놓게 된다(삼국간섭).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인류역사상 다시없을 천인공노의 야만적인 행위를 한다. 바로 명성황후를 모살한 것이다. 역사상 미증유의 흉악함을 보인 일본의 독니 속에 고종은 절치부심하였다.

1896년 2월 11일(1895년 음력 12월 28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과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자신의 의지로 왕태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아관 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일은 조야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파천 직후부터 환궁 준비를 한 고종은 숨을 고르며 다음 수를 생각하였다. 그곳에서 경운궁慶運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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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경운궁은 러시아 공사관과 가깝고, 서양 각국 공사관들이 둘러싸여 있어 다른 궁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이 경운궁 주변은 개항 이후 서양 열강의 공사관과 거주지, 교회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정동은 가히 19세기 서양문물의 전시장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고종이 내놓은 결정적인 수는 바로 제국 선포와 황제 위에 오르며, 왕권강화를 통해 난국을 돌파하는 일이었다. 고종은 항상 누군가에게 의지해 살았다. 즉위하였을 때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이후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을 받아야 했다.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이후에는 명성황후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동안 결정적인 판단력과 추진력은 고종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이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종 곁에는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진정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고독한 군주의 길에 제대로 들어선 것이다.

13년 대한제국의 한계


대한제국은 국가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지향하여, 외세 의존적이고 외국제도 모방에 그쳤던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선은 통치이념을 창출하는 게 급선무였다. 민중의 의지와 뜻을 담으면서도 앞날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새로운 법규를 마련하는 자리에서 광무제는 “새로운 것에 익숙해져 옛것을 잊어버리고 고치는 것만을 일삼다가 시끄럽게 하는 것은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승정원일기 고종 34년 1897년 9월 25일)라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옛것과 새것을 절충하고 참작하라는 의견을 전달한 것이다. 이른바 ‘구본신참舊本新參’ 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었다. 이는 동도서기東道西器와는 다른 개념이다. 동도서기는 전통을 유지하며 서양기술을 제한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어디까지나 동도를 중심으로 한 논리였다. 이에 반해 구본신참의 개혁 논리는 국가의 부강과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의 정치체제와 기독교 문명까지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강력한 군주권은 동도에 기반을 두지 않고는 실현하기 어려웠고 여기에 광무개혁의 딜레마가 있었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사회 조류는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민의를 수용하고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가 확산되어가면서 민권 의식의 향상과 남녀평등 의식 등 깨어있는 민중의 의식은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위한 발판은 전통에 기반을 두고 전제 군주권을 강화, 수호하는 데 있었다. 광무제는 군주권을 강하게 쥐고 있어야 제국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고 보았기에, 군주의 권위와 권한에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 제국을 통치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고 바로 여기에 대한제국의 한계가 있기도 했다.

광무제는 개혁을 위해서 개혁의 물리적 토대인 원수부와 물적 토대인 궁내부 내장원을 중심으로 개혁을 진행하였다. 황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고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다. 이는 개혁의 물리적 토대가 되었으며, 최고 군령기관인 원수부元帥府를 통해 이루어졌다.

1899년 6월 22일 원수부를 설치하여 육해군을 친히 총괄한다는 조칙을 내려 황제를 대원수, 황태자를 원수로 삼아 군 일체를 통솔케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군부 개편을 단행하였다. 황성(서울) 방비와 황제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호위대扈衛隊를 창설하여 중앙군은 약 1만여 명 선에서 병력을 유지하였고, 지방은 중앙의 친위대가 조직되는 것과 발맞춰 진위대로 조직되었는데 2개 진위대대와 14개 지방대대로 2만 명 정도가 편제되었다. 이 정도가 당시 대한제국 재정의 한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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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6월에는 통신사를 가장한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황제의 군통수권을 뒷받침하는 인적 기반인 군부대신과 원수부 총장이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이는 황제의 권력이 불안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군대 수로는 경찰 업무 이외에는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개혁의 물적 토대를 공고히 함과 함께 국민 개병제를 통한 상비군 제도를 도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는 여러 상황상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광무제의 개혁에 있어 물적 토대가 된 조직은 궁내부였다. 특히 궁내부 산하 내장원은 내장사內藏司 내장원內藏院으로 개편되어 농상공부에서 주관하던 홍삼紅蔘의 제조 및 광산사업과 탁지부 주관의 둔토屯土 사업을 이관받으며 황실 재정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내장원은 광산채굴 비용과 세금을 감면해주는 방법으로 해당 분야의 산업이 발전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토지를 실측하여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설정하려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토지소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1898년 7월 양전을 담당할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여 토지 조사사업을 우선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런 사업은 전국 모든 토지를 파악해서 국가 소유권 관리체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지세를 합리적으로 징수함과 동시에 외국인의 토지 침탈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산업진흥을 위해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추진하였다. 철도, 광산, 기선 등은 외국의 이권 추구에 시달리는 주요 업종이었다. 이들 자원 개발이 국부에 중요한 원천이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국주의 열강이 우리 내부 깊숙이 들어온 후였다.

이밖에 금융기관 설치, 실업교육 강조, 재판소 정비, 의료사업 확장 등의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더불어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를 명했다. 이는 한성 판윤 이채연(서얼 출신)을 중심으로 해서 미국의 워싱턴 D.C를 모델로 한 방사선 형태로 추진되었으며, 지금의 서울 중심부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경운궁 앞에는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는 광장을 조성하였는데 지금의 서울광장이 그곳이다. 또한 시민공원도 등장하는데, 지금의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1898년에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완벽하게 관리되는 노면전차를 운행하였다.

그렇지만 원천적인 자본이 빈약한 상태에서 단행되는 개혁은 헛구호에 불과해진다. 재정이 넉넉해야 애초에 마음먹었던 개혁을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추진할 수 있었다. 고종 광무제는 개혁을 위한 재원 마련에 앞장서야 했다. 정부 재정기관을 단일화하면 수입도 투명하고 지출도 투명해서 좋을 것을 광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황실의 내장원과 정부의 탁지부를 두어 이원화시켜버린 것이다. 조세를 거두는 기관이 난립하면 명목도 모르는 세금이 생기고, 운영 자체가 베일에 싸이는 폐단이 생겨난다. 고종 광무제는 내장원에 힘을 더 실어 주었다. 그래서 국가의 각종 재원들이 황실비, 즉 광무제의 ‘쌈짓돈’이 되어갔다(이는 훗날 독립전쟁 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내장원은 재원 확대에만 목표를 두어 수많은 세금들이 늘어났고 그 소속과 업무 범위가 난마처럼 얽히게 되었다. 그 이전에 있었던 갑신정변부터 시작해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주장된 재정기관 단일화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민생을 도외시한 개혁이 되어버렸다. 민중은 그들의 권리를 보호받고 민생이 보살펴지기를 원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황제에 대한 충성과 그에 기초한 애국심이 형성되고 국권이 강화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천륜을 끊는 죄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죄는 남의 천륜(天倫)을 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느니라. 최익현(崔益鉉)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해하였으므로 죽어서 죄가 되어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볼지어다. 유부녀를 범하는 것은 천지의 근원을 떼는 것과 같아 워낙 죄가 크므로 내가 간여치 아니하노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9편 103장 1절~3절)


외로운 죽음 대한제국 광무 2년 무술년 2월 2일 병진, 한성부 성저십리 서강방 상수일리 운현궁 별장 아소정我笑亭 정침正寢에서 조선의 노정객이 서거하였다. 그는 맏아들에게 간청을 하였다.

“내가 주상을 보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라며 여러 번 말했지만, 맏아들은 죄를 입을까 두려워 끝내 아뢰지 않았다. 잠시 뒤에 “주상께서 거동하지 않으셨느냐?”라는 말과 함께 길게 한숨을 쉬고 운명하였다. 한 달 전에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그. 죽는 순간까지 아들을 보고 싶어했지만 아들은 끝내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

격동과 파란의 조선 말기, 끝없는 권력욕으로 한때는 권세를 움켜쥐었으며 철권통치로 일관했던, 카리스마 넘치며 국내외에 이름이 알려진 그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었다. 향년 79세. 고종의 아버지로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군중에 의해 추대되었던 그였다.

그의 죽음을 당시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는 한국 근세사에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아들을 위해 집권했고, 섭정을 했으며, 왕비와 민씨 세력들과 수없이 싸웠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잔인하고 배타적인 인물이었습니다만 국가의 정의와 진실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가 일본과 손잡고 왕비를 시해할 때까지는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최근 그의 부인이 별세했는데 그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 같습니다. 미국 공사관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사흘 동안 반기를 게양할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게 했으며 천륜을 해하게 한 것인지 이제 알아보도록 하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가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음력 11월 16일 한성부 종로방 안국동 구름재 현 운현궁에서 남연군과 여흥군 부인 민씨(숙종 비인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노봉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였다.

아버지 남연군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인척인 인연으로 추사 김정희(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남양 홍씨와 남연군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 홍씨는 자매간으로 남연군과 추사는 이종사촌이 되었다)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다. 후일 대원군하면 떠오르는 석파란石坡蘭은 이때 추사에게서 배운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13세에 외가의 먼 일족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대원군의 외6대조 민정중의 동생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5대손 민치구의 딸)와 결혼하였다. 이후 종친부 벼슬을 받으며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고,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정3품: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 등의 직을 지내며 왕실 족보 편찬 관련 일을 하였다. 그래서 세간에서 아는 것처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곤궁한 처지는 아니었다. 다만 시절이 안동김씨 세도가 자행되었기 때문에 왕실 종친으로 몸을 낮출 필요가 있었다. 특히 대원군처럼 야심만만한 인물에게는 언제 어느 때 위협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섭정과 정치개혁 풍수지리에 안목이 있던 이하응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길지라는 말을 듣고서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본래 있던 경기도 연천에서 충청도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기슭으로 이장하면서 때를 넘보고 있었다. 더불어 풍양 조씨 세력 확대를 꾀하던 궁중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와의 막후교섭을 통해 철종 사후를 대비하였다. 이 교섭이 성공한 후 그는 12세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하여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그의 집권에는 조대비를 비롯한 풍양 조씨 집안과 안동 김씨 일문 일부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외부적으로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명분은 경복궁 중건 책임자로서였다).

5척 단신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 매섭고도 날카로운 하관에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위엄을 지닌 그 모습은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다. 남인 성향의 대원군은 권력의 중추에서 소외되었던 4색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인사개혁과 서원 철폐 정리를 통해 양반과 기득권 토호들의 민폐를 해소하였다. 당시 대원군은 “조선에는 세 가지 커다란 폐단이 있으니, 충청도 사대부(노론 세력)와 평안도 기생과 전주 아전(물산이 풍부했던 전라도 지역에서 아전의 토색질은 백성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양반계급에 면제되었던 병역 의무를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부과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여 과세균등의 원칙을 세웠고, 왕실 권위 회복을 위해 경복궁 중건을 마쳤다. 이런 과정을 통해 종친과 양반들의 면세지를 국고로 환수하고, 불법 점유지와 토지대장에서 빠진 땅을 조사하여 국가 수세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재정확충에 힘을 기울였고, 검소한 생활풍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백성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양반들을 향한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여 두 차례의 양요를 극복했다. 이러한 고종 초기 대원군의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며 조선은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1866년 3월 15세가 된 고종은 한 살 위인 명성황후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며느리 명성황후를 간택한 이는 대원군 자신이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 또한 조대비와도 조씨 집안에서 왕비를 간택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대원군은 이 양 집안과의 약속을 파기한 셈이 된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였던가? 고종의 나이 22세가 되면서 고종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여기에 명성황후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이 연합하면서 한 명의 유학자를 통해 대원군 하야의 상소가 올라왔다.

최익현의 반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순조 33년 1833년 음력 12월 5일~고종 43년 정미 1907년 1월 1일)은 경주 사람으로 대대로 포천에서 살았다. 초명은 기남奇男, 자는 찬겸贊謙, 아호는 면암勉庵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배웠고, 1855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정인홍, 윤휴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결사반대하여 좌절시킬 정도로 노론 화서학파 위정척사파의 중심이었고 대한제국 선포도 반대한 인물이었다. (훗날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의병장으로 체포된 뒤 유배지인 대마도에서 단식투쟁으로 사망했다고는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유배지에서 조선 왕실에 대한 충의를 지키기 위해 6끼를 굶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단식으로 사망한 것은 아니다. 세간에 와전된 소리일 뿐이다. 도전 5편 139장 11절 참조)

최익현은 강직하기로 소문난 학자로 성리학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원리주의자였기에 대원군의 장기간 섭정에 분노하였다. 1873 계유년 10월 25일 동부승지로 임명한 최익현의 사직상소가 올라왔다. 말이 사직상소지 대원군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략) 게다가 한정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며,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고, 관리들의 기강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스럽다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 하고 있습니다. (후략) 승정원일기 고종 10년 10월 25일”

이는 대원군의 국정 전반에 대한 비판이었다. 경복궁 중건에 드는 원납전 등의 여러 세금 문제를 지적했고, 서원철폐를 통해 성리학적 질서를 어지럽힌 점과 청나라 돈을 수입해 경제 질서를 훼손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또한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고종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대원군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듣고 싶어했던 말을 서슴없이 한 것이다. 이 상소문을 읽은 고종은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키면서 의견에 찬동한다는 태도를 공포하였다. 친정에 대한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최익현의)정직한 말에 만일 다른 의견을 내는 이는 소인이라는 말로 비답을 내려 주었다(승정원일기 고종 10년 10월 26일자 참조).
최익현의 상소문은 일대 파란을 불러왔다. 고종의 친정에 반대하거나 대원군을 보좌하는 사람들은 부정직한 소인이라고 판정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대원군의 하야 대원군 쪽에서는 최익현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흉악한 사람’이라 공격하며 문을 닫고 일처리를 사양했다. 마음 약하고 효성스러운 고종이 제 발로 찾아와 잘못을 빌고 계속해서 섭정해달라고 간청하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대원군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문안인사도 하지 않았고 굳건한 태도를 보인 고종 앞에서 대원군은 하야하고 말았다. 1874년 고종 11년 봄, 흥선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양주의 직곡 산장으로 낙향하였고, 고종은 23세에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실각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하여 1876년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원 위치로 돌아가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처족인 여흥 민씨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국정은 문란해졌다. 매천 황현에 의하면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순종)가 태어나자 원자가 잘 되길 빈다며 전국 각지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소요되는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왕실 전용 창고인 내수사 소유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정부기구인 호조나 선혜청의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다고 한다. 10년간 대원군이 비축한 재물을 1년 만에 탕진하였다고 하고 매관매직도 기승을 부렸다고 전한다. 이와 함께 대책 없이 진행되었던 개항정책(개항을 하긴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에 대한 방향성과 이를 추진할 세력이 빈약한 상태였다. 차라리 시일을 두고 개화를 추진할 세력을 양성한 뒤 진행했으면 더 나은 결과를 낳았을지 모른다. 단지 대원군의 정책을 뒤집어 행하는 홧김 정책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은 조선 유림들을 다시 대원군 지지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대원군의 재집권 1882년 6월 9일 일어난 임오군란이 폭동으로 화하며 사태가 심각해지자 고종은 이의 수습을 위한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기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대원군은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군란을 피해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공식으로 선포하였다. 재집권에 성공한 대원군은 고종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을 전면 백지화하면서 부자 사이는 파국으로 나아갔다. 대원군은 고종을 아들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하는 듯했고, 생사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명성황후를 망자亡者 취급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태도를 보인 점은 고종으로 하여금 대원군과 부자지간의 약한 고리마저 끊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민씨 세력과 내통한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대원군은 재집권 33일 만에 청의 실권자인 이홍장 일파에게 납치되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청나라의 톈진天津 보정부保定府(텐진 시 변두리에 위치한 관청으로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150km 지점의 외진 지역에 있었다)로 압송되어 갔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어떤 정치 세력도 보정부에 연금된 대원군의 귀국을 위해 청과 특별한 교섭을 벌이지는 않았다. 청은 대원군과 고종과의 정치적 긴장과 알력 관계를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불리한 사건이 생기기만 하면 대원군 환국이라는 카드로 고종을 협박하였다.

1885년 민씨 정권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袁世凱 등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 대원군은 4년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대원군은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다가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큰 아들 이재면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갑오동학혁명이 있기 전 녹두장군 전명숙은 한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다. 1893년 2월 전명숙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명숙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명숙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역사의 대지진인 갑오동학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6월 21일 청나라와 일전을 준비하던 일본은 혼성여단 2개 대대로 경복궁을 강제 점령하였다. 조선 측 궁성수비대 약 600여 명은 격전을 벌이다가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흩어졌다. 일본군은 경회루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조선 내정에 한 발을 깊이 들여놓기 시작하였다. 이어 6월 23일 남양 풍도에서 해전을 시작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고 대원군을 비롯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이 대원군을 추대한 까닭은 경복궁 침입 후 각국의 좋지 않은 여론과 조선 국민의 반일 감정을 의식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에게 인망이 높은 대원군과 손을 잡아 일본의 침략 행위를 희석하고 반일감정을 무마해나가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갑오개혁 와중에 있었던 대원군의 3차 집권이었다. 일본이 자기를 이용하려는 계책 못지않게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집권하게 된 것이다. 이때 고종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대원군을 눈물로 맞이하고 사죄하였다.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두 번째로 아버지의 정치적 경험과 역량에 압도당하는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였고, 이날 이후 두 사람의 적대적 관계는 굳어지게 되었다. 대원군은 유순한 성격의 이재면이나 고종과는 달리 괄괄하고 한 번의 꾸지람에도 기죽지 않고 적극적인 손자 이준용의 성격과 태도에 기대를 걸게 되었고, 이후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정변을 계속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조카 이준용과 정적 관계가 된 고종은 자신을 위협하고 정권 전복을 시도하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망명 중이었던 일본에 자객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의 계략 1894년 10월 중순 이후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공직 사퇴를 종용하였을 뿐 아니라, 1895년 4월 29일 대원군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발표하여 실질적인 연금 상태로 몰아갔다. 이 의절에 의하면 겉으로는 대원군을 높이는 듯 ‘대문에 총순, 순검으로 입직케 한다’, ‘대소 신민이 칙명 외에는 감히 사적으로 알현치 못한다’, ‘출입할 시에는 궁내부에 먼저 알려 궁내부관원으로 배종케 하고 입직하는 총순, 총검도 경위케 한다’ 등을 규정함으로써 외부 인사 접촉을 사실상 차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손자 이준용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95년 을미 청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던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던 조선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이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질 비난을 면하기 위해 대원군과 친일적인 성향은 있었지만, 국모 시해에 동원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훈련대를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거절하였다. 이미 지난 갑오년 때에도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꼴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은 한밤중에 마포 공덕리에 있던 별장을 습격하여 새벽 3시 반쯤 강제로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가게 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 정부에 의해 명성황후가 옥호루에서 암살당한 뒤 대원군은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아들 고종의 황제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한 채 1898년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아들을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서거하였다.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으며,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원군에 대한 평가 대원군에 대해서 친한파親韓派였던 헐버트(H.B Hulbert)에 의하면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아무리 그를 미워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항상 그를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한편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을 통해 개항과 개방을 막고 서구의 문물과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였다는 비판이 있으며, 그의 개혁은 역사를 역행한 측면이 있다는 평도 있다. 매천 황현은 그의 월권행위와 독재를 지적 비판하였다. 또한 본의는 아니었을지라도 명성황후의 암살을 사주, 협력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민족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박은식, 《한국통사》(김승일 역, 범우사. 1997) 193쪽). 또한 “대원군은 그 지위가 군주와 같아 대권이 손안에 들고 모든 관료가 그 지휘를 따르며 만백성이 그 위세를 우러르고, 명령하면 행하고 금하면 그쳐 후세의 이윤伊尹, 주공周公이 될 수도 있었다”고 하였으며, “대원군이 섭정함에 주위 사정과 제반 조건이 중흥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학식의 부족함이 애석하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사실상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대립하던 시대는 조선의 역사상 대전환기에 속하는 중요한 시기였으나 두 사람의 권력투쟁과 대립이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 빠뜨린 것은 사실이었다. 대원군은 임오군란 당시 궁궐 습격의 배후인물이며 사실상 군란의 지휘자였고, 청국 유폐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앞잡이가 되기도 하였고, 명성황후 모살에서도 비록 강요였다고 하지만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해야 했다. 국가의 공적 이익보다는 자신의 권력욕과 사적 원한이 더 컸기에 일어난 파행적인 행동은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 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께서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 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白岳山, 흔히 북악산이라고 하지만 이는 오류)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
- 고종 실록 광무 1년 고종 34년 10월 13일 조




주1.
본고에서는 대한제국 성립 이전에는 전통적인 호칭인 고종高宗을, 이후에는 광무제光武帝라는 호칭을 나누어 사용하였다. 고종은 일제강점기에 정해진 묘호이기에 그 정확성에 의심을 품고 있다. 흔히 망국의 왕의 묘호에는 이후 집권자들의 시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 때 황제에 대한 호칭을 보더라도 전통적인 태조太祖, 신종神宗, 성조聖祖과 같은 묘호보다는 홍무제洪武帝, 만력제萬曆帝, 강희제康熙帝 등 연호를 담아 호칭하는 경우가 많아 이에 따른다.

주2.
아들은 왕인데 아버지가 왕이 아닌 경우 그 아버지에 대해서 조선은 대원군大院君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대표적으로 선조의 부친인 덕흥 대원군, 철종의 부친인 전계 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부친인 흥선 대원군이 있다. 이들 중 살아서 대원군의 위에 오른 이는 흥선대원군뿐이다.

주3.
이른바 서남西南 전쟁이다. 1873년 정한征韓 논쟁에서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고향 가고시마鹿兒島로 낙향한다. 당시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무력 기반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군사력이었는데, 정한 논쟁은 사쓰마 번 출신의 사이고와 조슈 번 출신의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사이에 일어난 의견 충돌이었다. 이때 사이고의 죽마고우인 오쿠보大久保 도시미치利通가 예상외로 조슈 번 출신의 기도를 지지했다. 이후 사이고가 낙향하면서 이를 추종한 장교와 하사들이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사사건건 불만을 품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촉발되었다. 이 내전으로 말미암아 기존 사무라이들의 특권이 폐지되고, 전 국민 징병제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서양식의 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주4.
경운궁은 지금의 덕수궁이다. 덕수궁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상왕과 왕의 체제에서 왕이 상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보통명사였다. 경사스러운 운이 모인다는 의미의 경운궁으로 궁 호칭을 변경해야 할 것이다.

주5.
이는 당시 군사대국으로 치닫고 있던 일본의 군사력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전후로 군비 증액에 나서 정부 예산의 30%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함으로써 1905년 육군만 100만, 해군은 4만 5천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