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역사의 진실(1)

[종도사님 말씀]
道紀 145년 9월 13일(일), 『환단고기』 북 콘서트, 강화문예회관
[말씀요약] 결론은 역사 전쟁, 문화 주권 전쟁, 역사관 전쟁입니다. 우리가 우리 역사의 근원을 반드시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 역사를 잃으면 현재 삶의 진정한 주체, 주인이 될 수 없고 미래 새 역사의 비전을 당당하게 제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말살한 올가미 세 글자는 바로 삼조선입니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열고 천하를 다스리실 때, 국가 통치 경영 방식이 삼한이었습니다. 이 삼한은 단군조 중기 때 혁명이 일어나 삼조선 체제, 즉 진한은 진조선, 그리고 한반도는 말조선, 요서는 번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강단사학,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패권주의와 식민사학이 주장한 삼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입니다. 우리 역사의 본래 맥은 환국-배달-조선, 그리고 해모수의 북부여로 가는 것인데, 단군조선이 신화로 부정되니까 환국, 배달은 자동으로 사라져버리고 단군조선(신화),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본래 있지도 않던 중국의 한사군이 한반도 내 평양 주변에 있으면서 식민통치를 했다고 왜곡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기자조선과 한사군),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임나일본부)로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4월에는 국회가 발칵 뒤집어진, 동북아 역사재단의 지도책 발간 준비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강단사학자들, 정부를 대변하는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47억이라는 거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중국 역사 지리지 연구소 소장이던 탄치샹(담기양)이 펴낸 역사 지도책의 지도를 베꼈는데, 그 지도에 조조의 위나라가 한반도의 경기도 남부까지 지배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독도 같은 건 지명을 써놓지도 않고, 백제, 신라는 4세기에 있지도 않았으며 임나일본부가 엄연히 실존했다는, 중국과 일본의 침략사관을 대변하는 지도를 그린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시원역사 시대인 환국, 배달, 조선이 완전히 뿌리 뽑혀서 중국화되는, 진정한 한민족 역사의 어둠의 시간, 암흑 시간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이제는 진실로 우리 모두 함께 깨어나 크게 각성을 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한마음으로 뭉치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역사의 암흑 시간대를 맞이하여 『환단고기』 사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환단고기』를 첫 페이지부터 제대로 읽으려면 역사관이 있어야 합니다. 우주 광명 문화 역사관이 바탕이 되어야 우리의 본래 역사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한민족 역사의 성지, 강화도


조금 전 박성수 이사장님의 말씀이 “이 강화도는 작은 한국이다. 강화도의 역사 문화를 모르고 한국을 말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참 멋있는 표현이에요.

오늘 이 시간은 우리 모두 함께 천지 역사 문화의 중심축을 굳게 세우고, 동북아를 넘어 인류 창세 역사의 혼백과 원형문화의 푯대정신이 굳건히 살아 있는 마리산 참성단을 다 함께 그려보면서, 무너진 대한민국 역사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제 정면으로 보이는 플래카드에 ‘강화, 한민족 창세 역사 광복의 성지다.’라고 쓰여 있는데, 너무도 멋진데요. 다 함께 한번 큰 박수를 치면서 오늘 말씀의 서두를 시작할까 합니다. <박수> 지구촌을 여기저기 다녀 보았지만, 이곳 강화 주민들의 박수에서 공동체 의식이 가장 크게 터져 나오는 것 같아요.

결론은 역사 전쟁입니다. 문화 주권 전쟁입니다. 역사관 전쟁입니다. 거듭 강조하건대, 역사관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나아가 지구촌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왜 우리 역사의 근원을 반드시 제대로 알아야 하는가?

역사를 잃는 자는 모든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잃으면 현재 삶의 진정한 주체, 주인이 될 수 없고 미래 새 역사의 비전을 당당하게 제기할 수 없습니다. 과거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 나의 삶의 의식을 결정짓고 미래 역사를 여는 모든 삶의 동력원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강화도와 인천은 고대사와 근대사를 아우르는 진정한 역사의 성지聖地입니다. 이곳은 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이 마리산 참성단을 쌓고 우주의 통치자, 우주 정치의 주관자이신 삼신상제님께 직접 천제를 올리신 곳입니다. 그래서 ‘강화도는 한민족 역사의 성지를 넘어 진정한 인류 문화의 성지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서두에서 주장하고 싶습니다. 강화도는 생동하는 제천문화의 추억이 그대로 살아 있는 성지인 것입니다.

며칠 전, 강화도 『환단고기』 콘서트에서는 무엇을 주제로 삼아야 일관되게 우리 역사의 근원을 복원하고 우리 역사의 새로운 비전, 희망의 한 소식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왜 청춘의 시간을 다 바쳐서 우리 역사 광복의 어두움을 걷는 데 봉사를 했는가?’ 하고 자문도 해 보았어요. 평생 동안 나도 모르게 환인천제, 환웅천황, 단군왕검, 치우천황님께 순간순간 기도를 했는데요, 그렇게 청수 떠놓고 기도하는 삶이 있었기에 오늘 이런 자리가 마련되고 우리가 만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살펴볼 것은 단군조선의 삼신문화, 삼신상제님, 제천문화, 제천단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신화가 아니라 너무도 강력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실제 역사입니다. 바로 그 역사 현장 강화도에서, 우리는 2천 년 단군조선 왕조 문화의 살아 있는 증거를 보면서 북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화 북 콘서트의 세 가지 주제


우리 상고역사를 찾아주는 진정한 성지, 강화도는 고려 말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현 국무총리 격)에 오른 고성 이씨 문중의 행촌 이암李嵒(1297년~1364년) 선생이 ‘단군왕검의 2천 년 조선 역사를 복원시킨 『단군세기』’가 나온 성스러운 곳입니다. 이암 선생이 10대 때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읊은 시가 있습니다.

소년 이암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선풍유열참성단仙風猶烈塹城壇, 단군님 세운 참성단에 선풍이 강렬히 휘몰아치는구나. … 숙장촉갈혼구지孰將燭喝昏衢志 그 누가 이 어두운 동방의 거리를 밝게 비출 수 있는가?” 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구아자금천하안求我自今天下安, 내가 이제부터 동방 천하의 평화로움을 구하리라.” 했어요. 소년 이암이 시를 읊으면서 하늘의 삼신상제님과 약속을 한 것입니다.

방금 등단하기 전에 그 한 구절을 떠올리면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과 더불어 나눌 말씀의 주제와 개천절開天節의 소중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열 개 자, 열 천 자, 하늘을 열었다는 개천절의 진정한 의미가 뭐냐?

인류 창세 역사의 고향인 환국桓國을 계승해서 배달의 환웅천황이 동방 땅에 우주 광명의 문화를 처음 개벽한 정신이 개천입니다. 단군왕검은 바로 그 정신을 계승해서 동방 땅에 우주 광명 문화를 뿌리 내리셨습니다. 마리산 참성단이라든지 또는 강화의 주산인 고려산에 있는 백여 기의 고인돌에 이 천지 광명 문화가 숨 쉬고 있습니다.

고인돌은 천신天神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이면서 천문대이면서 무덤의 역할도 했습니다. 고인돌을 보면 시신을 땅에 안치하고, 그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돌로 뚜껑을 덮었습니다. 위 뚜껑은 하늘, 기둥은 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인간이 누워 있는데, 이것은 ‘천일·지일·인일(태일), 하늘과 땅과 인간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천지 부모와 하나가 될 때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인돌에는 ‘인간은 천지와 하나’라는 『천부경』의 깨달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용도로 쓰인 고인돌은 고대 문화의 표지유물입니다. 지금 전 세계에 있는 고인돌 가운데 가장 멋지고 완벽하게 생긴 고인돌이 바로 강화도에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일 것입니다.

오늘 강화도 콘서트의 주제를 크게 셋으로 잡았어요. 첫째, 한민족 역사 광복의 성지에서 ‘우리 역사, 무엇이 잘못됐는가? 이 내용을 한번 함께 가슴에 새겨 보자.’ 하고, 그 역사 왜곡의 주제를 하늘에 대고 여쭤봤어요. “무엇을 전하오리까?” 그러고서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며 몸을 씻는데 ‘우리 역사 왜곡과 조작의 모든 것은 세 글자에 담을 수 있다. 그건 바로 삼조선이다!’ 이것이 떠올랐습니다.

둘째는, 동방 천자의 나라 단군조선의 역대 단군님들의 치적, 그 핵심을 정리하면서 ‘단군조가 동북아 역사를 넘어 지구촌 인류사에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최근 역사학에서 “고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그건 잘못된 말이다. 중국 당태종의 당나라도 그가 처음 만든 나라 이름이 아니라 예전의 그 유명한 요순시대, 요임금의 당나라에서 따온 것이다. 요임금의 당나라를 당태종의 당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고당이라고 하지 않는데, 우리는 조선을 한양 이씨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하니 이것은 옳지 않다.” 하며 고조선을 고대조선, 단군조선이라고 하자는 젊은 학자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 주제는 ‘천상의 문이 다시 열리다.’입니다.

역사 왜곡과 상고사 문화 역사의 주제를 깨치다 보면 근대 역사가 너무도 심각하게 왜곡돼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근대사의 새 역사 선언의 근본 주제를 다시 한 번 각성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한국인의 국조國祖에 대한 의식 수준


자, 본론으로 들어가 먼저 현재 한국인의 국조國祖, 건국의 아버지에 대한 의식을 한번 고발해 볼까 합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가 보면 뭘 느끼느냐? 우리 대한민국은 상고 역사가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낍니다. 소위 말하는 고조선 역사의 실체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구석기, 신석기라고 합니다.

지금 어린이, 중학생 또는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전 세계 역사교과서 한국사 상고사 분야를 보면, 원시시대에 사용했다는 돌로 만든 도구 몇 개 갖다 놓고, 그러고서 역사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단군을 살짝 언급하면서 신화라고 부정하고 있어요.

최근에 강화도에서 아주 재미있는 전시회가 있었어요. 우리나라 각 종교단체, 민간단체, 그리고 개인이 모시는 단군왕검의 영정 전시회가 열린 것입니다. 단군왕검은 임금님이니 어진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 수준이 어느 정도냐? 한번 잠깐 볼까요.

자, 전부 나무 이파리로 옷을 입혀 드렸어요. 각 단체나 개인이나 똑같이 저렇게 나무 이파리로 옷을 해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역사의식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반면에 중국은 어떠합니까? 그들이 역사 시조로 받드는 4,700년 전 황제헌원은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 즉 요임금, 순임금, 그리고 고대 3왕조라고 하는 하은주夏殷周. 하나라의 우임금, 상나라의 탕임금, 주나라의 문왕과 그의 아들 무왕, 그 제왕들도 다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있어요.

이건 중국 상해출판사에서 발행한 『역대제왕록』에서 취한 사진인데요. 5,500년 전 태극기 팔괘를 제작하신 태호 복희씨만 해도 그런대로 호피를 두르고 계십니다. 중국인들은 하남성 회양현에 아주 거대한 금동상을 만들어서 그들이 자랑하는 대궁전에 팔괘도와 함께 태호복희씨를 모셔 놓았어요. 또 신농씨도 동북아 성인 제왕의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모셔져 있습니다.

이렇게 4,348년 전에 나라를 세운 단군왕검보다 천 년 이전의 중국 제왕들은 면류관에 곤룡포를 입고 있는데, 우리 한민족 역사의 시조인 단군왕검은 원시인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우주의 조화주 하나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기 위해 제천단을 쌓고 하늘에 제를 올린 분인데, 동북아 역사의 진정한 건국의 아버지인데, 이분을 이렇게 홀대하고 원시시대 야만인 수준으로 비하하고, 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모두가 크게 각성해서 민족의 시조를 새롭게 인식하고, 제대로 품격 있게 받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곡, 말살된 한민족 시원 역사 문화의 주제, 삼조선


뿌리가 송두리째 잘려나간 한민족의 시원 역사 문화의 모든 왜곡, 말살의 주제, 그것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늘과 대화를 하면서 깨달은 세 글자입니다. 우리 문화의 근본 정신은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측면이든 3수, 세 글자예요. 우리 역사 왜곡의 진실도 이 세 글자요, 잃어버린 역사 광복의 주제도 세 글자입니다.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말살한 올가미 세 글자, 그것은 바로 삼조선입니다.

삼조선은 뭐냐? 한번 다 함께 외쳐볼까요.

“하늘에는 삼신三神, 땅에는 삼한三韓, 사람 몸속에는 세 가지 참된 것 삼진三眞이 있다.”

하늘에는 삼신, 땅에는 삼한, 사람 몸속에는 삼진.

이것이 동북아 역사뿐만 아니라 지구촌 인류 창세 역사, 원형문화 정신의 근본 주제입니다. 이 우주에는 조물주 삼신이 계시고, 그리고 땅에는 삼한이 있었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열고 천하를 다스리실 때, 국가 통치 경영 방식이 삼한이었어요. 만주가 진한, 한반도 전체가 마한, 그리고 요서, 산동, 그 아래 절강성, 강소성까지 번한. 이것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북삼한, 대륙삼한이라고 했습니다. 단군조선이 망하고 나서 한강 이남에 세워진 신라, 가야, 백제의 전신이 남삼한, 즉 진한, 변한, 마한인데, 이것이 북삼한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삼한은 단군조 중기 때 혁명이 일어나 삼조선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진한은 진조선, 그리고 한반도는 말조선, 요서는 번조선이 됐어요.

이것이 삼조선인데 이 삼조선이 어떻게 둔갑을 하느냐? 우리나라의 강단사학,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패권주의와 식민사학이 주장한 삼조선은 뭐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입니다.

단군조선은 있긴 있었는데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신화다, 이렇게 부정을 해버립니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 왜곡과 시원 역사 말살의 근본 주제가 바로 여기에 있단 말입니다! 왜 단군조선은 신화로 부정당하고 있으며, 국조께서 어의御衣 대신 나뭇잎을 꿰어 만든 옷을 입고 계시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민족 문화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고, 우리 문화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입니다.

단군조선


-단군조선이 신화가 된 이유
그럼 왜 단군조선이 신화가 되었느냐?

지금 역사학계에서 아주 기가 막힌 사건이 전개되고 있어요. 우리 역사의 본래 맥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바로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있는 대로,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한 환국환웅천황의 신시 배달국, 그리고 단군왕검의 조선으로 계승을 한 거예요. 환국-배달-조선, 이렇게 내려가잖아요. 그리고 해모수의 북부여로 가는 것인데, 단군조선이 부정되니까 환국, 배달은 자동으로 사라져버리고 단군조선(신화),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중국의 한사군이 식민통치를 했다는 겁니다. 본래 있지도 않던 한 무제의 식민지 네 개 군현이 한반도 내 평양 주변에 있었다, 그러고 나서 연맹왕국 시대로 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한민족 8백만 명을 무참하게 학살한 일제는 남산에서 조선 문화 각 분야의 책 20여만 권을 불지르고, 독일의 랑케가 주장하는 근대 실증사학을 도입해서, 과학주의의 이론 체계를 가지고 우리 시원 역사를 부정했습니다. 젊은 학생들을 독일로 유학을 보내서, 또는 독일의 학자들을 일본에 초대해서 실증주의를 받아들인 그들은 치밀한 유물 검증을 내세워 우리 역사의 뿌리를 말살했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교과서가 바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입니다. 자, 이제 『삼국유사』에 실린 고조선조 내용을 원본을 통해서 끝 구절까지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 영상)

이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오랫동안 읽어보고, 전체 글의 앞뒤 맥락을 스스로 깨닫다 보면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 왜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신시개천경’이라고 정의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제는 이것을 우리 한민족 시원 역사의 뿌리를 송두리째 말살하는 근거로 삼았지만 이 속에는 환국과 배달과 조선 역사의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 자충수를 두어 그 역사를 부정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치명적인 몇 가지 문제를 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 보면, 첫 구절은 중국 왕침王沈의 『위서魏書』를 인용해서, 당시 2천 년 전(지금으로는 4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고 했어요. 단군왕검이 실제 살아계셨다는 거예요. 실존 인물로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건국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군의 조선은 어디서 왔느냐? 이것을 우리 한국인이 쓴 고기古記를 통해 선언을 하고 있어요.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지구촌 어느 민족도, 어느 나라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인류 시원 역사의 고향,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아들 서자부의 환웅이 왕조 종통의 상징인 세 가지 성물, 천부天符와 인印 셋을 가지고 동방 땅에 오셔서 배달을 세우셨다.’고 했어요. 이게 개천開天입니다.

그 뒤 쭉 전개되다가, ‘환웅은 곰이 사람으로 변한 여자와 결혼을 해서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했는데 여기서부터 역사가 잘못된 거예요.

웅족과 호족을 한 마리 곰과 호랑이로 해석하는 이 문제, 단군왕검의 탄생과 역사의 지속에 대한 게 전부 잘못되었어요. 환국, 배달, 조선 삼성조 국가 개창사가 인물사로 변질이 되고, 이 책을 쓴 일연 스님이 ‘석유환국’ 옆에 환국은 제석帝釋의 나라라고 주석을 붙여 불교신화로 만들고, 또 환웅이 여자가 된 곰과 혼인을 해서 단군을 낳았다고 했으니 이게 신화가 아니냐? 이렇게 부정하는 논리를 제공했어요.

한민족 시원 역사 말살을 지휘한 총 사령탑인 <조선사편수회>의 3인방 가운데 막내 금서룡이 한 글자를 가지고 우리 역사의 근원 모든 걸 다 부정하게 만들었어요. ‘석유환국昔有桓國’ 나라 국國 자를 인因으로 조작을 해서 ‘환인과 그 계승자 환웅과 그리고 단군 이야기는 신화다. 믿을 수 없는 스토리다.’가 된 거예요. ‘석유환인昔有桓因’ 이게 우리 한국사를 총체적으로 말살한 회심 작품입니다.

또 하나는 나라를 건국한 뒤에 수도를 아사달에서 백악산, 그리고 장당경으로 세 번 옮겼다고 했어요. 『환단고기』에서 보면 아사달은 송화강 아사달로 지금의 하얼빈 불함산인데, 『삼국유사』는 그걸 평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단군왕검 한 분이 1,908년을 다스리셨다고 했어요. 바로 이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물론 이것도 믿을 수 없는 신화로 부정되는 빌미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단군조선조의 지속 기간이 1,908년임을 밝혀준 것입니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를 보면, 조선이 전개된 전체 역사는 3 왕조사 2,096년인데, 실제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가지고 존속된 것은 시조 단군왕검에서부터 43세 물리 단군까지(제1, 2 왕조) 1,908년입니다. 제3 왕조인 44세 구물 단군 때부터 188년 동안은 나라 이름이 대부여로 바뀌었어요.

『삼국유사』는 또 마지막에 기자조선이 있는 것처럼 기록해 놓았습니다. 중국의 고대 왕조 하은주夏殷周 시대의 마지막 나라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말기에 살던 세 사람의 현자 가운데 기자를 동방 조선의 초대 왕으로 임명을 했다는 겁니다. 단군은 다 사라져버리고 조선의 주인이 기자라는 거예요. 이것을 거기에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또 ‘중국의 문서를 보니까 한나라의 식민지 군이 세 개가 있다더라. 그런데 어디에는 또 네 개가 있다더라. 뭐가 진실이냐?’ 이런 의혹을 제기하면서 끝납니다.

환국, 배달, 조선의 뿌리가 신화의 역사로, 인물사가 되어 완전히 잘려나가고 결론은 뭐냐? 일제와 중국이 동방 문화의 원 주인, 그 문화의 아버지인 환국, 배달, 조선 역사의 마무리를 어떻게 했느냐?

‘북쪽은 기자조선과 한사군이 다스렸고, 남쪽은 일본이 3세기 후반에 가야 땅에 설치한 임나일본부가 다스렸다.’ 즉 대한민국은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로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패권주의 역사관, 일본의 침략주의 역사관 이 두 칼날이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단절시킨 것입니다.

-단군조선을 신화로 믿고 있는 한민족
또 고고학을 근거로 해서, 대한민국 강단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느냐? ‘국가 건설의 기준은 청동기다. 대한민국은 청동기 문화가 한 3천 년밖에 안 됐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청동기 문화가 4,500년 전까지도 올라가고, 4,700년 전 황제헌원, 동방의 천자 치우천황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든요. 서양에 가 보면 청동기 문화가 5천 년도 넘게 나와요. 그런데 한국은 기껏 3천 년 전후다, 그 이전에는 역사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겁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역사박물관을 가 보면 고조선실을 초라하게 해 놓고, 돌로 만든 도구 몇 개를 전시해 놓고 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또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우리가 배운 건 뭐예요? 우리 시원역사는 정말로 별 볼일 없는 신화라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이 우리 한민족 역사를 한반도 안에다가 축약시켜 놓은 소한사관,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일본에 가 보면, 근대 대학자로 유명한 쓰다 소우키치가 살던 집을 역사박물관으로 만들어 놓고, 그가 어느 정도로 공부한 근대 사학자냐 하는 걸 알 수 있게 유물을 전시해 놓았어요. 쓰다 소우키치는 “야, 너희 조선인들, 주제 파악을 해라. 너희 한반도 남쪽 백제 땅에는 쉰네 개의 소국(성읍국가)이 있었고, 저 신라 쪽에는 열두 개, 가야에도 열두 개가 있었다.”고,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 <한조>에 있는 내용을 살짝 따다가 일흔여덟 개의 소국이 바글바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실제로 당시 약 백여 개의 작은 국가가 있었어요. 나중에 히미코라는 여왕이 근 30여 개를 통합하고, 그 후 4세기 후반에 백제계에서 부여계에서 건너간 기마민족, 즉 우리 조상들이 야마토 정권으로 통합을 합니다.

그런 역사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그들은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한민족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뿌리를 잘라내야 된다.” 했습니다. 이게 초대 통감으로 왔던 이등박문의 특명이었는데, 조금 전에 살펴 본 한민족 역사 뿌리를 말살한 3인방 가운데 이마니시 류, 쓰다 소우키치의 회심작이 ‘한민족의 고대국가가 실제 성립한 것은 4세기에나 가서 가능했다. 한국의 역사는 1,600년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강단사학에서는 이것도 더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서기 5세기, 6세기에나 와서야 한민족은 진정한 고대의 왕조국가의 체제를 완비했다고 주장을 합니다.


기자조선


그 다음 기자조선은, 기자가 한반도에 와서 조선의 왕이 되어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원래 없는 얘기입니다.

『환단고기』를 보면 25세 솔나 단군 때 ‘기자가 서화라는 곳에 와서 은둔을 했다.’고 했습니다. 자기 조국 은나라가 망하자 문화의 조국인 동방 땅으로 와서 은둔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답사를 해 보면, 기자는 서화 위아래를 돌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난 걸 알 수 있어요. 허허벌판 가운데에 무덤이 있는데 중국 정부나 동네 사람들도 청소를 안 해 줘서 쓰레기가 쌓여 있어요.

고려 때에 와서는 ‘단군보다 기자가 훨씬 더 높은 분이다. 우리 문화의 근원이 되는 분이다.’ 이렇게 되었어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태조로 등극을 하는데. 천자의 나라 명나라 주원장에게 사절을 보내서 “나라 이름을 ‘조선’과 ‘화령’ 가운데 선택을 하여 윤허를 내려주옵소서.” 했어요. 그런데 그 국서에 “옛날 기자 시대에도 이미 조선이란 호칭이 있었사오니 조선으로 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러고는 “천자님의 허락이 이렇게도 빨리 떨어져 특별한 은혜가 아주 사무칩니다.” 이렇게 왕조실록에 기막힌 기록을 남겼습니다.

기자에게는 매월 초하루 보름날 제사를 지냈어요. 1년이면 스물네 번. 단군왕검에게는 봄가을로 두 번을 모셨어요. 단군왕검을 모시는 사당도 기자의 사당보다 3백 년이나 늦게 만들었습니다. 일찍이 국조 단군왕검을 이렇게 찬밥신세로 모독한 어두운 역사가 고려, 근세조선 왕조 시대 천 년 동안 장장 지속된 것입니다.

그리고 근세조선 왕조의 폐해를 보면 유학의 태두의 경지에 간 율곡, 퇴계 이분들이 상상도 못 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우리 조선족은 옛날부터 야만족인데 무지했는데 기자라는 분이 한반도까지 오셔서 문자를 가르쳐 주어 우리가 문명국이 됐다는 거예요. 지금은 기자조선을 좀 극복해서 역사교과서에서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중국의 공산정권 하의 역사학자들, 대만의 학자들은 기자조선을 주장합니다.

이렇게 조선에 대해 중국, 북한, 그리고 대한민국, 일본이 얘기하는 게 다 달라요. 중국에서 조선은 기자조선, 일본에서는 위만조선, 북한에서는 단군조선이에요. 그런데 대한민국은 단군조선을 신화로 싹 부정해 버리고, 한사군, 즉 중국의 식민지로 한국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겁니다. 이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너무 기가 막힌 얘기예요. 이것이 오늘날 강단사학, 대한민국 정부를 대변하는 관변 사학자들, 소위 아카데미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 시원역사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위만조선


삼조선에서 단군조선(신화), 기자조선, 그 다음이 위만조선인데, 위만조선은 뭐예요? 자, 위만이라는 자가 와서 번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을 내쫓고 수도 왕검성을 탈취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단군 조선조의 정통 계승자라는 것입니다.

원래 위만은 연나라의 장수로 연나라 왕 노관의 심복이었어요. 노관은 항우와 근 10년을 싸우고 중원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과 고향 친구이면서 생년월일이 같아요. 한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워서 연나라 왕으로 임명된 겁니다.

중국은 본래 중원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에서 나라 이름(차이나)을 가져오고, 그 뒤에 천하를 제패한 유방의 한나라가 진정한 중국인들의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해서 한족漢族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한고조 유방이 죽자 그 아내 여태후가 공신들을 전부 숙청을 했어요. 이에 노관은 흉노로 도망을 가버리고 위만은 갈 곳이 없으니까 조선옷을 입고 상투 틀고서 조선의 왼쪽 날개인 번조선의 마지막 왕, 75세 준왕에게 찾아와 거두어 달라고 했어요. 그때 만주에는 이미 단군조를 계승한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게 서력 전 194년입니다.

그 44년 전인 서력 전 238년에 47세 고열가 단군이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오가에게 나라를 공동 경영해라 해서 이후 6년 공화정, 공백 시대가 있었어요. 그때 치고 나온 분이 해모수인데, 그분이 만주 지역에 나라를 열고, 단군조인 대부여를 계승해서 북부여라고 했습니다.

해모수 단군은 임종하기 직전에 준왕에게 “위만을 절대 받아주지 말아라. 네가 패망당한다.”고 만류했어요. 그러나 준왕은 그 말을 안 듣고 위만을 받아들여서는 연나라와의 국경 지역[상하운장]을 지키는 수비대장을 맡겼어요. 해가 바뀌자, 몰래 군사를 기른 위만은 왕검성을 쳐들어와 준왕을 쫓아내 버리고 왕위를 차지했어요. 쫓겨난 준왕은 배를 타고 내려와서 군산 어래산으로 들어와 한씨의 조상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병도 박사가 “위만은 조선족 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으니 조선 사람이다.” 했어요. 강단사학자들이 그 한마디를 추종해서 위만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자다라고 한 겁니다. 이게 위만조선의 실체예요!

그러면 위만이 조선왕조의 왕이 된 게 아니니까 위만정권 정도가 되는 겁니다. 위만정권은 단군조선의 서쪽 구석을 잠시 차지하고 있다가 그 손자인 우거 때에 한 무제에게 망합니다. 한 무제는 위만정권이 흉노의 침략 거점이 될 것이 두려워서 ‘위만정권을 아주 없애버리고 동북아 전체를 통일해야겠다.’ 이런 야망을 가지고 우거정권을 공격했는데, 그 전쟁이 1년이 넘어도 결판이 안 나요. 그래서 내분책을 이용해서 신하들로 하여금 우거를 죽이게 만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네 개의 군을 요서 지역에 설치했다는 겁니다.

왕검성은 창려현에 있고, 낙랑군 수성현은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 옆에 있어요. 그 바로 위에 왕검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강단사학자들이 평양에다 갖다놓은 거예요. 땅 뜨는 재주를 부려서 지도를 조작해서 위만의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고, 한 무제가 위만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주변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말입니다.

중국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자기 특수 부대에게 “낙랑, 임둔, 진번, 현도 이 사군을 통과해서 평양을 공격하라.”고 특명을 내린 구절이 있어요.

평양 주변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 한나라의 식민지 네 개 군현이 있었다는 것은 사건 조작입니다. 『환단고기』를 보면 고구려 10세 산상 열제 때 낙랑과 현도를 점령해서 그곳을 완전히 평정했다 하는 기록이 나와 있어요. 이것으로 보면 낙랑, 현도는 요서 지역에 잠시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낙랑, 임둔, 진번, 현도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던 것이 아닌데 평양에서 낙랑 유물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 유물을 근거로 중국의 식민지 군현이 평양 주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분하지 못해서 그러는 겁니다. 그 유명한 고구려 대무신왕의 열째아들 호동왕자가 사랑하는 여인이 낙랑국의 공주였어요. 낙랑국의 시조가 최숭인데, 최숭은 왕검성 창려현 쪽 낙랑산에 살던 재벌입니다. 번조선이 망하기 직전 그 재산을 다 팔고서 마한(말조선), 평양 쪽에 와서 나라를 연 것입니다.

낙랑국의 마지막 왕 최리의 딸 낙랑공주가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연애를 하면서 호동왕자를 위해 적의 침략을 알리는 북을 찢어가지고 낙랑국이 멸망을 당했잖아요.

낙랑군과 낙랑국은 전혀 다릅니다. 낙랑군 수성현은 만리장성 쪽에 있었고, 평양 쪽에 있던 것은 낙랑국이에요. 그런데 지금 강단사학자들이 우겨서 낙랑군 식민지 군현은 평양 부근에 있다가 313년에 패망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논리에 대해, 인하대 남창희 교수가 뭐라고 얘기하나면, ‘유물이 나오는 것만 가지고 낙랑군이라고 할 수 있느냐? 만일 그렇다면 저 오사카 주변에서 백제의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데, 거기를 백제의 식민지라고 해야 될 것 아니냐? 왜 그런 주장은 못 하냐? 최숭이 재산을 팔아서 옮겨올 때 돈 많은 사람들, 한나라 상인들이 함께 내려와 평양 주변 낙랑국에 살았고, 또 당시 평양이 국제 무역항 역할을 했으니 한나라의 유물이 나오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합니다. 남 교수의 주장에 박수를 한번 쳐 주세요. (박수)

환국, 배달, 조선을 계승한 게 해모수의 북부여가 아니라 위만조선이다! 아, 연나라 유장 위만이 단군조선의 왼쪽 날개인 번조선의 마지막 75세 준왕을 내쫓고 나라를 잠시 뺏었는데, 그게 정통 계승자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손자 때에 한 무제가 위만정권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세운 한사군이 그 역사를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천인이 공노할, 한민족 9천 년 역사 조상들이 분노할 잘못된 역사관인가 말입니다.

이 역사 왜곡의 전반에 대해 1963년에 중국의 주은래 전前 총리가 북한 조선과학원 사절단 한 20명을 만나 이런 얘기를 했어요.

“사실 우리 중국이 대국주의 역사관, 쇼비니즘(국수주의)에 의해 중국 중심의 역사관으로 역사 서술한 건 잘못된 거다.”

그리고 또 “그런 대국주의 사관으로 동방 한국의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지후箕子之后다.’라고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건 아주 명백한 역사왜곡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역사의 암흑시대를 맞이한 한민족


지난 4월에 국회가 발칵 뒤집어진, 동북아 역사재단의 지도책 발간 준비 사건이 있었어요. 중국의 푸단(복단)대학 역사학과 주임교수를 지냈고, 중국 역사 지리지 연구소 소장이던 탄치샹(담기양)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사람이 평생 공부한 것을 역사 지도책으로 냈어요. 그런데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그 지도를 베낀 것입니다. 47억이라는 거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말이에요.

지도를 베껴서 어떻게 정리를 해 놓았느냐? 그 지도를 보면 조조의 위나라가 한반도의 경기도 남부까지 지배를 했다고 되어 있어요.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입니다. 또 독도 같은 건 지명을 써놓지도 않고, 백제, 신라는 4세기에 있지도 않았으며 임나일본부가 엄연히 실존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은 북한이 붕괴할 경우 ‘한강까지 본래 중국의 땅이다.’ 해서 북한 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위만조선, 한사군 문제가 이미 그 근거를 제공했잖아요. 만약 UN의 역사 재판소에 소송을 한다 해도 우리가 그들을 이겨낼 수가 있느냐 이겁니다.

대한민국의 강단사학자들, 정부를 대변하는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국고 수십억을 써가면서 중국 역사학자의 침략사관을 대변하는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한민족 역사는 환국, 배달,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삼국시대 초기 역사 시대 4백 년, 5백 년이 다 사라졌습니다. 진정한 역사의 암흑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중국에서 5,500년 전 인류 창세역사 시대 원형문화인 우하량, 총묘단이 나온 홍산문화 유적지에 박물관을 완공해 놓고서, 한국의 고대사를 완전히 중국화하는 마지막 동북공정을 시작했어요. 대한민국의 시원역사 시대인 환국, 배달, 조선이 완전히 뿌리 뽑혀서 중국화되는, 진정한 한민족 역사의 어둠의 시간, 암흑 시간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이제는 진실로 우리 모두 함께 깨어나야 합니다. 한민족 모두 크게 각성을 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한마음으로 뭉치기를 소망합니다.

『환단고기』의 중요성


한민족 역사의 원형과 근원, 시원 문화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당하는 결정적인 운명의 시간, 역사의 암흑 시간대를 맞이하여 『환단고기』 사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신라 때 안함로의 「삼성기」 상, 고려 말 원동중의 「삼성기」 하. 원동중이라는 분은 우리 연구소에서도 조사를 한 바 있는데, 태종 이방원의 스승인 원천석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그런 주장을 펴는 학자도 있어요.

그리고 이 강화도에서 단군조 2천 년 왕조사 틀을 바로 세우신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복애거사 범장의 『북부여기』, 그 다음 이암 선생의 현손인 일십당 이맥 선생이 조선 중종 때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관으로 비밀스럽게 내려오는 모든 문헌을 총정리하고, 또 일찍이 충청도 괴산에 귀양을 가서 거기서 수집하고 들었던 우리의 시원역사를 정리한 『태백일사』까지, 다섯 분이 쓴 다섯 권, 일반적인 권수 개념으로 보면 전체 열두 권 분량이 되는데요, 이것을 하나로 묶은 책입니다.

『태백일사』에는 한민족 문화를 넘어 인류 창세 역사와 문화의 원형을 전해주는 「삼신오제본기」, 「환국본기」, 배달 「신시본기」, 단군조의 「삼한관경본기」, 그 다음 인류 문화의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등을 소개한 「소도경전본훈」, 그리고 「고구려국본기」, 발해, 즉 「대진국본기」, 그리고 「고려국본기」 등이 들어 있습니다.

고성 이씨의 불멸의 업적, 그 중심에는 소전거사素佺居士라는 분이 있습니다. 소전거사는 우리 역사 문화의 근원을 복원하는 비책들을 한민족 역사 문화의 체계를 세운 3인방, 즉 행촌 이암과 『북부여기』를 쓴 복애거사 범장, 『진역유기』를 쓴 이명에게 전수했습니다. 이 세 분이 소전거사를 모시고 “우리 역사를 광복하자!” 하고 천지에 맹세를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조선왕조가 패망당한 다음 해, 호남의 3대 문호의 한 사람인 고성 이씨 가문의 해학 이기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감수하고, 그 애제자 운초 계연수가 다섯 책을 묶어서 『환단고기』, 즉 ‘천지광명의 옛 역사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발행한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과 인류가 창세 역사 원형문화 시대에 천지 우주광명을 체험하면서 이렇게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이게 『환단고기』의 내용이거든요.

『환단고기』를 첫 페이지부터 제대로 읽으려면 역사관이 있어야 합니다. 우주 광명 문화 역사관이 바탕이 되어야 우리의 본래 역사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중심에는 고성 이씨 문중에서 한민족 역사 문화를 되찾은 대부라 할 수 있는 고려 말 행촌 이암 선생이 계십니다. 그분의 할아버지 이존비 선생이 고려 충렬왕에게 뭐라고 진언을 했느냐 하면, “우리나라는 환단, 환국, 배달, 조선, 북부여, 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했습니다. 우리 고려도 시조 왕건께서 칭제건원을 했습니다.” 칭제건원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황제라고 호칭을 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사대주의가 국시로 정해졌는데도 군신 상하가 이걸 수치로 여기질 않습니다. 어찌 이게 후세에 조롱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했습니다.

이런 할아버지의 가르침, 즉 환단, 천지 광명 문화 의식이 대대로 전수되면서 10세 때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가 옛 조선 땅을 내려다보면서 “누가 이 동방의 어두운 땅에 새로운 횃불을 붙일 수 있느냐. 내가 이제부터 동방의 평화를 구하리라.” 하는 시를 읊으며 하늘땅과 더불어 서약을 했던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