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 지상선경 건설의 주벽 절대신앙의 화신 마테오 리치 대성사

[도전속인물탐구]

*천지신명이 받드는 마테오 리치 대성사
이마두의 공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천지신명들은 그를 떠받드나니 이마두는 신명계(神明界)의 주벽(主壁)이니라.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여 모든 것을 맡아보고 있나니 너희는 마땅히 공경할지라. 이마두가 24절(節)의 역(曆)을 개정하여 때(時)를 밝히매 백성들이 그 덕(德)을 입어 왔으나 이 뒤로는 분각(分刻)이 나리니 분각은 우리가 쓰리라. 이마두는 보민신(保民神)이니라. (도전 4편 12장)


*마테오 리치 대성사의 큰 공덕
이마두(利瑪竇)는 세계에 많은 공덕을 끼친 사람이라. 현 해원시대에 신명계의 주벽(主壁)이 되나니 이를 아는 자는 마땅히 경홀치 말지어다. 그러나 그 공덕을 은미(隱微) 중에 끼쳤으므로 세계는 이를 알지 못하느니라. 서양 사람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弊)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쳤느니라. (도전 2편 30장 1~12절)


*이마두 대성사를 치하하심
태모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마당에 단을 설치하고 치성 절차와 같이 제수(祭需)를 진설하게 하시니라. 이어 계란과 양주(洋酒)를 그 위에 놓게 하시고 쌀밥과 계란을 잘 비벼서 놓으시며 “많이 드시라.” 하고 권하신 다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이마두(利瑪竇)의 선술묘법(仙術妙法)을 칭찬하는 공사이며 후천선경 세계 건설에 역사(役事)함을 치하하는 공사니라.” 하시고 성도들에게 시천주주를 읽게 하시니라. 태모님께서 공사를 마치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이마두를 잘 대접해야 하느니라.” 하시고 “이마두는 서양 명부대왕이니라.” 하시니라. (도전 11편 124장)


*상제님의 일등비서, 리치 신부
서교의 마테오리치 신부는 신명계에서 어떤 분이냐 하면, 리치 신부가 예수 신도지만 공자보다도 우수한 분이고, 부처보다도 나은 분이고, 예수보다 몇 백배 훌륭한 분이다. 역사적인 성자들은 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리치 신부는 죽어서도 인간들을 위해 무슨 방법이 없나 하고 저 별나라까지 쫓아다니면서, 그곳의 문명이기를 받아내려 사람들에게 일러 주었다. 이렇게 참 갖은 노력을 다 했다. 그러고는 하다하다 할 수 없으니까 동서양 신성불보살을 전부 거느리고 상제님께 달려가서 ‘우리 능력으로는 좋은 세상을 열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상제님께서 직접 인간 세상에 임어하셔서 세상 사람을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탄원을 했다. 그래 상제님이 “내가 괴롭기는 하지만 리치 신부를 데리고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대순하다가 오직 너희 동토에 그쳐서 미륵불에 30년 동안 명을 붙여 있다가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천명과 신명을 내려 최제우를 내었으나 수운이 천명을 다하지 못하므로 그 명을 거두고 직접 오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셨다. 상제님은 그렇지 않더라도 오실 분이지만, 리치 신부가 그렇게 하소연을 해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이다. 리치 신부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현재 상제님의 1등 비서라고 할 수 있다.
(도기 140년 3월 17일 대구 수성도장 태상종도사님 도훈 말씀 중)


13세기 몽골초원에 위대한 정복자가 나타났다. 분열되어 있던 몽골 부족을 하나로 묶은 그의 이름은 테무친, 즉 위대한 칸 칭기즈칸이었다. 강력한 초원 전사들의 말발굽 아래 동서양의 모든 나라가 영향권에 들어가 그 판도가 과거 환국桓國의 그것과 유사해졌다. 그랬던 대몽골제국은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에 이르러서는 대칸의 직할령과 여러 칸국으로 나뉘어 느슨하게 연합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주역의 건괘 효사에서 딴 ‘원元’으로 고치고 고려를 복속시켰다. 마지막으로 중원 남방에 명맥을 유지하는 남송을 압박했다. 휘몰아쳐오는 원나라 군대 앞에 마지막 충신 문천상의 정기가正氣歌를 뒤로 한 채 남송은 힘없이 멸망하였다(1276년).

이후 원제국은 후계자 선정을 위한 권력 쟁탈전으로 급속하게 쇠약해졌고, 고려인 출신인 주원장에 의해 다시 몽골초원으로 쫓겨났다. 중원에는 명나라(1368년~1644년)가 들어서게 되었다. 명나라는 중원 왕조 최초로 장강 이남인 남경을 토대로 화북 일대까지 통일한 왕조였다. 이후 주원장의 아들 3대 영락제 때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겼고,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와 손자 선덕제 때 명은 국력을 충실하게 쌓아 최전성기를 누렸다. 명나라는 황제독재권이 강화되어 황제를 둘러싼 환관들의 권력횡포가 그 어느 때보다 심했고, 대외관계는 정화의 남방 원정 이후 쇄국정책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암군暗君, 혼군昏君들이 많았고, 특히 명황제 중 통치기간이 제일 길었던 13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1563년 9월 4일~1620년 8월 18일: 만력제를 위해 조선은 만동묘를 짓고 망국의 그날까지 제사지냈다)은 정치에 흥미가 없어 30여 년간 정사를 환관들에게 맡겨 두었다. 오직 재위 기간 중 일어난 조선의 임진왜란에 대해서만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만력제를 가리켜 ‘고려의 천자天子’ 또는 ‘조선의 황제’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만력제 치하인 1582년 중국 남방 포르투갈의 거점지인 마카오에 이립而立(서른)의 나이에 접어든 서양 가톨릭의 한 신부神父가 찾아왔다. 훤칠한 키, 푸른 눈에 큰 종鐘소리와 같은 음성을 지녔고, 신학 철학 법학 천문학 수학 등의 여러 학문을 연마한 고결한 인격을 갖춘 이였다. 동서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장 훌륭한 인물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대성사大聖師였다.

내가 믿는 천주님이 동양의 상제님과 동일한 분이다


서기 1603년 만력 31년 7월 백중이 지난 다음 날, 휘영청 밝은 보름 달빛이 명나라 수도 베이징의 시가지를 교교히 내리비치고 있었다. 50세의 나이에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해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벽안碧眼의 노인은 붓에 먹을 묻혀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다.

오국천주吾國天主는 즉화언상제卽華言上帝니라.
He who is called the Lord of Heaven in my humble country is He who is called Shang-ti(Sovereign on High) in Chinese.
내 나라에서 천주님이라 불리는 분은 중국에서 상제라 불리는 분이시다.


또 한 구절을 썼다.

역관고서歷觀古書하야 이지상제여천주특이이명야而知上帝與天主特異以名也라.
Having leafed through a great number of ancient books, it is quite clear to me that the Shang-ti(Sovereign on High) and the Lord of Heaven are different only in name.
수많은 중국 고전을 검토해 본 결과, 상제님과 하느님 아버지이신 천주님은 이름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주1)


이제야 매듭을 짓는구나. 노인은 눈을 들어 창문 밖 달빛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촛불 아래 서문을 작성하고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썼다. 利瑪竇書. 20여 년 전 이 땅에 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려 한 마테오 리치 대성사였다.

그가 이날 마무리 한 책은 바로 천주실의天主實義(DE Deo Verax Disputatio: 하느님에 관한 참된 논의)이다. 리치 대성사는 동양인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단순히 교리 해설에만 그치지 않고 유불선의 고전을 인용해서 가톨릭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다. 유불선 사상과 가톨릭의 사상을 대비시켜 양자가 서로 배타적인 게 아니고 서로 보완적이라는 의견을 정리한 것으로 처음에는 ‘천학실의天學實義’라고 했다. 이 책의 저본을 수년간 친구들에게 읽혀서 문장을 수정하고 더 완벽한 내용으로 바꾸었으며, 문장 형식도 독자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주는 대화체를 택했다. 플라톤의 대화록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천주교 교리가 변증론적으로 구명되어 있다. 이 책을 완성한 리치 대성사의 나이 어언 오십사 세. 얼굴은 주름살로 가득했고 머리와 수염에는 서리가 내렸다. 그는 중국인으로 죽기로 결심하였다.

하느님의 군인으로 지상천국 건설을 위해 동방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 년 전인 1552 임자년 10월 8일 이탈리아 동북부 교황령의 소도시인 마체라타Macerata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날은 성녀 브리짓(St. Bridget)의 축제일이고, 태어난 시간은 토성이 지평선에 머물고 천칭궁天秤宮 자리가 한 중간에 와 있었다. 이는 길조로 해석되고 이 아이는 장차 귀인이 될 것이라 했다. 약국을 경영하는 한편 시청에서 시장을 역임하기도 한 조반니 바티스타 리치G. B. Ricci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 아이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였다. 그는 태어날 때 세례를 받고 가정교사인 예수회 회원 벤치베니N. Bencivegni신부에게 영적 훈련을 받아 기도 생활이 몸에 배었다. 가톨릭 문명권에서 자라 자연스레 성직자가 되기를 소망했고, 예수회가 설립한 학교를 다녔다. 여기서 라틴어와 헬라어 등을 연상에 의한 기억법으로 익혔는데, 이는 훗날 중국 선교 때 많은 중국인들이 그의 기억법을 배우기 위해 몰려드는 광경으로 이어졌다.

16세가 되던 1568년 아버지 뜻에 따라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그는 1571년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예수회에 가입하고 정식 신부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엄격한 계율 아래 영적 훈련과 기도생활을 통해 리치 대성사는 하느님의 사랑과 성스러운 소명을 확신했다.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쳐 하느님께 순종하고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종으로 써주시길 간절히 염원한 그는 이듬해 대학으로 돌아가 독일 출신의 클라비우스Ch. Clavius 교수에게 기하학, 천문학, 역학曆學 등을 배웠고, 해시계, 자명종, 지구의 등의 제작법도 전수받았다. 대학 과정을 마친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인종, 국가, 대륙을 넘어 인류를 사랑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최상의 삶은 지적 추구도 하면서 하느님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포교의 삶이었다. 이후 엄격한 선발 과정에서 몇 번 실패를 겪은 후 1576년에 인도에 파견될 선교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1578년 9월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은 뒤에야 당시 포르투갈의 동남아 및 중국 무역의 중심지인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포르투갈인들의 현지인에 대한 박해와 강제 개종, 노예 매매,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고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미 인도에 당도하여 동양 포교의 기초를 닦은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주교는 개종이란 무력이 아닌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우선 현지인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선교 방침을 내렸고 이를 받아들인 리치 대성사는 당시 문명의 중심지인 중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어를 비롯해 정치, 경제, 풍속, 종교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명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여 외국인은 입국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 조경肇慶 지부사知府使 왕반王泮은 리치 대성사가 수학에 능하며 지도와 자명종, 지구의 등을 제작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리치와 루기에리Michael Ruggieri 신부를 초청했다. 드디어 1583년 9월 10일 초청을 받은 리치 대성사와 도반 루기에리 신부는 중국 본토인 조경에 당도하게 되었다.

독행천리에 백절불굴, 일심의 화신


당시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 유럽에서 온 상인을 노략질이나 일삼는 ‘야만인’으로 여기고 서양인을 몹시 경계하였다. 여기에 중국인은 오직 자신들만이 온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오만한 중화주의中華主義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 리치 대성사는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승복을 입고 삭발을 감행했다. 이는 일본에서 승려가 존경을 받는다는 발리냐노 주교의 이야기를 듣고 중국도 그러리라고 속단한 결과였다.

리치 대성사는 길에 버려진 병자를 간호하는 등 현지인들을 위해 활동하였고, 이름도 중국식으로 지었다. 이마두利瑪竇. ‘마두瑪竇’는 ‘마테오’의 음사이며, 성은 ‘리치’를 본떠 ‘리利’라 하였다. 이는 벼(禾)를 칼(刀)로 추수한다는 의미와 함께(당연히 가을을 상징한다) 동서양 문화를 통합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서방에서 온 현자’라는 뜻의 ‘서태西泰’라는 별호도 얻게 되었다. 이를 합쳐 ‘리서태마두’, 혹은 ‘서태자’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고민에 빠졌다. 즉 인격신 하느님(Deus)을 나타내는 중국어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는 중국인 포교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입교를 희망한 청년이 자신의 집에 조그만 제단을 만들고 벽에 ‘천주天主’라고 써 붙인 것을 보고 무릎을 치며 이를 번역어로 사용하기로 했다. ‘천天’은 천지만물을 주재함을 뜻하고, ‘주主’를 통해서 하느님의 유일신적, 주재신적, 인격신적 개념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때 새로 부임한 신임 총독 유절제劉節齊가 외국인 체류 불허 방침을 내세우면서 이마두 대성사 일행을 마카오로 추방시켰다. 이 때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다.

“마치 높은 산에서 큰 돌을 굴려 올리다가 정상에 도달할 무렵 돌이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은 절망을 느낍니다.”

그런데 원래 리치 대성사를 추방해 서양식으로 지은 성당과 사제관을 차지하려던 유절제가 이런 행위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좋지 않을 거라 판단해 리치 대성사 일행을 소주韶州에 정착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불승이든 도교의 도사든 모두 우상이나 숭배하고 술수나 부리는 어리석은 이들로 인식되고 있음을 깨달은 이마두 대성사는 예수회 선교사가 유학자와 가장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때부터 전형적인 유자儒者 복장을 하게 되었다.

황제를 만나 정식으로 포교활동을 인정받고 싶던 이마두 대성사는 1595년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조선에 파견할 명군을 거느리고 베이징으로 가던 병부시랑兵部侍郞 석성石星을 알게 되었다. 이때 석성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배가 전복되어 친구인 수련수사 바라다스를 잃고, 자신도 실신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이후 석성과도 헤어져 육로로 어렵게 남경南京(Nanjing)에 도착하였으나 끝내 거주를 허락받지 못했다. 다시 남창南昌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탄원을 했다.

“하느님 당신이 저의 계획을 아시는데 이 어려운 사업을 왜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계시해 주었다. “장차 북경과 남경 두 황도에서 너를 도와줄 것이다.”

희망을 안고 도착한 남창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병부시랑 석성의 수행원 가운데 한 의생醫生을 방문한 자리에서 황족인 건안왕建安王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비상한 기억력을 선보이며 우의를 돈독하게 다졌다.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난 즈음, 남경에서 이마두 대성사는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갖춘 사대부들의 예방을 받으며 교유하였다. 이곳에서 서양의 과학과 수학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였으며 1600년에는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또는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1584년)에 누락됐던 조선朝鮮을 추가하고 중국어로 지명을 표기하여 재판을 내었다. 이 지도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같은 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800km의 물줄기를 거슬러 북경北京(Beijing) 길에 올랐다가 환관 마당馬堂에게 억류되기도 하였다. 당시 환관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세금을 포탈, 횡령하였고 거액의 뇌물을 받기도 했다. 이는 집권자 만력제의 무능과 명 왕조의 쇠락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경에 이른 이마두 대성사는 이곳에서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 이지조李之藻(1571~1630: 세례명 레오)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이마두 대성사는 그에게 해시계 등의 제작법을 전해 주었다. 그와 함께 동양의 고전을 서양 언어로 번역하고, 서양의 문명을 동양에 전달하기도 했다. 저술은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20여 권이 넘었으며, 종교, 과학, 수학, 음악(8음계와 피아노의 전신인 클리비코드 연주법), 미술(투시법에 의한 원근법을 적용한 서양화법) 등 전 방위에서 초적극적인 활동으로 동양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서양의 그레고리 역을 번역하였고, 24절기의 날짜를 계절에 맞게 고쳐 ‘시헌력時憲曆’이라고 했다.
(주2)


하지만 평생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 못한 이마두 대성사는 마침내 격무를 이기지 못하고 1610년 5월 3일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병상에 눕게 되었다. 중국에 온지 27년 되던 해였다. 긴 여행과 이질적인 풍토로 인해 중병을 많이 앓았고, 포교 사업은 생각만큼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난항을 겪었으며, 숱한 죽음의 위험을 겪었다. 추방되고 억류되고 심지어 도적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친형제와 같이 사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들었다.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아 식사를 거르게 되고 과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궁의 어의도 조선의 인삼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5월 11일 오후 6시 지상에서의 천국 건설을 이루지 못한 이마두 대성사는 결국 상제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 향년 58세. 숨을 거둘 때 사람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聖人, 眞是聖人)”이라고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19일, 만력제는 북경성 밖 책란柵欄에 이마두 대성사의 묘지를 하사하였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서양인을 위해 묘지를 하사한 사건으로 비문에는 ‘야소회사리공지묘耶蘇會士利公之墓’라고 적혀 있다. 베이징 부윤 황길사黃吉士는 이마두 대성사의 묘실에 ‘모의입언慕義立言’(의를 숭모하고 저술로써 말씀을 세움)이란 편액을 증여했다.

이마두 대성사는 생전에 유럽의 다양한 자연과학적 지식과 서양 문물 전반을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중국인의 삶과 문명에 기여를 하였고, 동시에 스스로 중국 전통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동서양간의 호혜적이고 우호적인 문화교류의 모델을 확립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동서 문명 사이에 다리를 놓은 ‘최초의 세계인’이자 동양에 개화의 문을 열어 준 선구자로 칭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 죽어서도 상제님 나라를 건설하리라!
(주3)


정열적인 포교활동을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이마두 대성사! 하지만 대성사의 꿈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후에 천국 건설을 위해 심혈이 경주되는 빨간 정성을 기울인 모습과 천주이신 상제님의 지상 강세 배경에 관련된 놀라운 비의를 우리는 상제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대성사의 위대한 사후 행적을 도전道典 말씀을 통해 들여다보자.

동양 문화의 위대성을 살아서 경험한 대성사는 동양 문명신을 지상천국 건설에 동참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 동양의 문명신 가운데 상제님께서 밝혀주신 이가 있으니 바로 진묵대사震默大師이다(본지 2015년 7월호 참조). 이마두 대성사와 진묵대사가 신명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17세기 중반은 서양에서 상업주의 및 자본주의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시기였다. 이는 과학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고, 기계를 바탕으로 한 산업혁명이 촉발되었다. 산업혁명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굉장히 짧은 시간에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동안의 역사 과정을 통해 보거나, 이성적으로 보아도 납득이 되지 않은 일대 사건이었다.
(주4)
누군가가 미리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체계적으로 추진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 바로 이마두 대성사를 비롯한 동양의 문명신, 도통신들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 이는 상제님께서 그 숨은 공덕을 밝혀주시기 전에는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일인 것이다. 또한 이전까지 경계를 넘나들지 못했던 동양신, 서양신의 경계를 허물고, 천상 지하 지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도 이마두 대성사였다. 이로써 전 세계는 활발하게 서로 문명이 섞이고 교류하여 이웃 나라와 내 집처럼 상통하고, 물건도 마음대로 교통하게 된 이른바 ‘비빔밥’문명이 되었다. 천국의 문명을 본떠 만들어진 현대 문명은 인간의 노동력을 줄여 삶을 풍요롭게 하고 편리함을 주어 지상천국이 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자연의 신성을 배제하고 물질주의 및 과학만능주의에 젖어버린 인간의 헛된 자만심과 모든 것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 인간의 교만함과 잔인함, 인간성 타락 등은 스스로를 우울과 불안, 공허와 무기력에 빠뜨려 자신도 모르는 죽음의 길로 질주하도록 이끄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지옥행 열차처럼.

이마두 대성사의 본래 의도는 동양의 정신문명을 바탕으로 과학문명이 조화를 이룬 조화선경을 지상에 여는 것이었는데, 인간의 이기적이고 미숙한 의식은 이 모든 의도를 인류가 진멸지경에 처하게 되는 폐멸閉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때 이마두 대성사는 오직 한 분을 생각하였고,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 불타와 보살들을 설득하여 함께 그 분 앞에 나아갔다. 헤어날 길 없는 멸망의 깊은 수렁에 빠진 인류를 구원해 주실 단 한 분! 천주님 즉 상제님께 눈물로 호소하였다. 이마두 대성사와 여러 신성보살들의 애끓는 정성으로 마침내 참 하느님이신 상제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게 되었다. 지상에 강세하시는 상제님을 모신 분도 바로 이마두 대성사였다.

처음에 상제님께서는 이마두 대성사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바티칸 천개탑에 내려오셔서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인연 있는 개벽의 땅 한반도에 인간으로 강세하셨다. 마침내 열리게 될 지상천국으로 인류가 건너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상제님 지상강세의 배경에는 이마두 대성사의 큰 공덕이 숨어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배경도, 앞으로 열리게 될 후천 선경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된 모든 이면에도 이마두 대성사의 큰 음덕이 있음을 모든 인류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모든 과정의 근본 바탕에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원대한 인류애가 자리하고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제 천주실의 하권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마두 대성사가 우리에게 전한 은혜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보려 한다.

중국 선비는 말합니다. “우리(인간)의 몸은 천주로부터 나왔는데도 오랫동안 천주의 도리에 어두웠습니다. 다행이 선생께서 팔만 리 풍파를 마다하지 않고 먼 곳에까지 와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전수하시고, 중국의 가르침과 다르고 같은 점을 환하게 드러내어 주시며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서 지난날의 잘못을 훤하게 깊이 깨닫게 하였으니 은혜를 입음이 참으로 많습니다. ... 저는 마땅히 집으로 돌아가서 가르침 받은 것을 온습하고 궁구하며 그것을 회념하고 기록함으로써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근원으로 귀의하는 곧은 도리(歸元直道)를 다 듣기를 바랍니다. ... 하느님의 공덕이 넓고 크심을 또한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절대순명의 군대조직으로 구성된 가톨릭 수호단체, 예수회(Societas Jesu)

이마두 대성사는 가톨릭의 ‘예수회(Societas Jesu)’ 소속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예수회에서 설립한 학교를 다녔고, 법학을 공부하던 중 예수회에 가입하여 평생 예수회의 선교사로 그 사명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렇다면 예수회란 어떤 단체인가?

16세기 중반, 유럽의 가톨릭은 루터와 츠빙글리, 칼뱅 등이 주도한 종교개혁으로 천 년 이상 누려온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때 1534년 8월 15일 에스파냐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한때는 출세의 야욕에 불탔다가 수사修士가 된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1491~1556)와 6명의 동료들에 의하여 이 위기를 타개할 단체가 설립되었다.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군인이었던 로욜라는 1521년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프랑스군과 전투 중 중상을 입었다. 병상에서 그는 작센의 루돌프라는 카르투시오 회원이 쓴 〈그리스도 전〉과 자코보 데 보라지네라는 도미니코 회원이 엮은 〈성인 열전〉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새롭게 회심을 하고, 몬트세라트 근처의 작은 도시 만레사의 한 동굴에서 1년 동안 하루 7시간가량 기도와 묵상을 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훗날 신학을 공부하여 동료들과 함께 교황에 대한 순명, 즉 어느 곳이든, 무슨 일이든 즉시 달려가서 행할 수 있는 즉응성卽應性을 중시하고 영혼 구원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예수회라는 수도 단체를 설립하였다.

예수회란 ‘예수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영성수련을 통해 하느님과 인류에 봉사한다는 기치 아래 청빈, 정결, 순명의 세 가지 서원을 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구습을 과감히 폐지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채택했다. ‘하나님의 군대’인 예수회는 비교적 민주적인 구성을 지닌 중세 기원의 다른 교단과는 달리 실제적이고 능률적인 구성을 채택하여 전제 군주제와 비슷한 체제 안에서 예수회원 대다수는 교단 운영에 관해 평생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했다. 총장은 종신제로 그 이름도 ‘장군general’이라 불렀다. 철저한 복종과 엄격한 규율이 조직적인 선교활동의 효과적 실행을 위해 요구되었다. 그러면서 수도자의 외적인 모습보다는 내적이고 영적인 면을 더 중시하여 제복을 채택하지 않았는데 이런 현실적인 태도는 이마두 대성사가 승복을 입었다가 곧 선비의 옷으로 바꾸는 등의 현지 적응주의적인 조치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이 교단의 목적에는 예수회 선교사 자신의 정신적 완성뿐 아니라 타인의 정신적 완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부들이 해외에 나가 전도하고 교육 사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하느님에게 더 큰 영광’을 목표로 한 보편주의의 실천이었다. 그 실천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인문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동양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가톨릭 포교에 이바지했으며, 유럽 각지에 대학을 설립해 갈릴레이나 데카르트를 비롯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근대 문명을 꽃피운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예수회 선교사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과학적 성과를 체득하고 있었는데, 이는 중국 선교에 성공을 거두게 되는 계기 되었다. 즉 당시 예수회 선교사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논리학, 라틴어, 법학 등의 학문적 소양, 거기에 ‘하느님의 군대’라는 전투적이며 종교적인 확신과 영성훈련을 가진 지덕체를 지닌 종합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마두 대성사는 천주님에게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선교를 위하여 어느 나라에서든 살겠습니다.”는 서약을 했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동서 사상을 융합한 이마두 대성사의 저작들
이마두 대성사는 중국에 와서 30여 년간 중국 지성인들의 중심 텍스트인 사서四書의 번역을 비롯하여 종교와 천문, 지리와 수학 등 포교에 필요한 저술을 이십여 권이나 남겼다.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서오경이라는 한문 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사람으로 최초로 공자를 소개하며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사서를 읽고, 비판하기도 하며 동료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통독해 주었고,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건륭제(청淸나라 고종, 1736~1795) 때 수집, 정리된 [사고전서존목총서四庫全書存目總書]에 수록된 이마두 대성사의 저술은 [천주실의(1603)]를 비롯하여 [건곤체의乾坤體義(1605)], [기하원본幾何原本(1607)], [25언(1604)], [기인십편(1608)], [교우론(1595)], [기법記法(1596)] 등이 있다. 이중 [건곤체의]에 관해 [사고전서]에서는 ‘이마두는 중국과 서양의 문자에 모두 통달하여, 책을 지음에 한자와 중국말로 하니 새김이 있어 번잡하지 않다’고 칭찬하고 있고, [기인십편]에 대해서는 ‘그 말이 두루 근원을 찾고 널리 분별되어 있어 자못 경청할 만하다’라고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그의 저작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주실의]는 일차적으로 천주교 교리 문답서 형식을 취하면서 단순한 교리 해설에 그치는 게 아니고 동양 유불선 고전을 인용하면서 가톨릭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동서양 정신세계의 정수를 동시에 관통한 최초의 인문학적 금자탑으로 서양 가톨릭에서 신앙하는 아버지 하느님이 곧 동양의 최고신인 상제님이라는 위대한 진리 선언을 하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 등에게 영향을 주어, 기독교 문화와 유교 문화 신관이 창조적으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훗날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신앙에서 인격신으로 드러나게 된다.

[25언]은 그리스 스토아학파에 속하는 로마시대의 에픽테토스Epictetus(60~120)의 교훈적이고 수양론적인 글[소책자, 엔케리디온Enchiriidion]을 선택하여 번역한 것으로 다른 종교를 배격하지 않고 일반적인 덕에 대해서 논했으므로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중 제 13언을 인용해서 이마두 대성사의 신관을 음미해 보자.

“인仁의 대단(大端:큰 단서)은 상제上帝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에 있다. 상제님은 만물을 낳은 근원이며 만물을 주재하는 본래의 근원이다(이 부분은 에픽테토스 원문에는 없는 구절을 삽입했는데, 그렇게 함으로 해서 하느님다운 정의를 내렸다.) 어진 사람은 상제님의 실재함을 믿으며 또한 상제님은 지극히 선하여 조금의 잘못도 없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명령한 바를 한 번 들으면, 억지로 하고자 기다리지 않는다.”

[기인 십편]에서 기인畸人이란 중국인의 눈에 비친 이마두 자신을 말한다. 이 말은 장자 제 6장에서 따온 것으로 인간성에 대한 관찰을 담고 있다. [천주실의]의 연장선에서 성경과 기독교 성인의 저술, 그리스 철인들의 사상, 이솝 우화의 내용 등을 인용하여 논하고 있다.

[교우론]은 이마두 대성사가 쓴 최초의 한문 저술로 난창에서 황족인 건안왕과 나눈 진실한 우정을 통해 성립되었다. 최초의 저술이기에 그 말씨에 미숙함이 있다고 한다. 그 중 53번째 문구에는 ‘상제께서 사람에게 두 눈과 두 귀, 두 손과 두 발을 준 것은 두 친구가 서로 돕도록 하고자 함이니 그래야 비로소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우友라는 글자는 옛날에 쌍双이라 했으니 이는 곧 양손이다. 있어야만 되고 없어서는 안 된다. 또한 붕朋이라는 글자는 옛날에 우羽라 했으니 이는 곧 두 개의 날개로, 새는 이를 갖추어야 비로소 날 수 있다. 옛 현자가 친구를 보는 것이 어찌 이러하지 않았겠는가?)’라고 서술돼 있다.

마지막으로 [기법記法]은 기억술에 관한 저술이다. 이 저술은 이마두 대성사 자신이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인데다 학창 시절 연마한 연상법에 의한 기억술을 응용하는 한편, 로마시대의 학자인 플리니우스Plinius의 저서 [박물지], 작자 미상의 수사학 관련 서적인 [헬레니우스], 그리고 퀸틸리우스의 웅변술에 관한 책 등에서 힌트를 얻어 지었다. 이마두 대성사는 ‘기억 체계의 장소’를 이렇게 설명한다. 머릿속에 자기가 실제로 가 보았거나 아니면 가상적인 방을 그린 다음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물건이나 인물, 문자 등을 여기에 저장해 두었다가 자유롭게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서 사상을 융합하고 이를 번역 전파한 이마두 대성사는 동서 문화 교류사에 있어 위대한 거인이었다. 어떤 문화를 다른 문화로 번역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문화에 ‘적응’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 2003)
『증산도의 진리』 (안경전, 상생출판, 2015)
『천국문명을 건설하는 마테오 리치』 (양우석, 상생출판, 2008)
『천주실의』 (마테오 리치, 송영배역, 서울대 출판부, 1999)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조너선 D 스펜스, 주원준 역, 이산, 1999)
『마테오리치: 동서문명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히라카와 스케히로, 노영희 역, 동아시아, 2002)




주1.
여기에 실은 『천주실의』 본문과 번역 등은 『증산도의 진리』 책을 참고하였다. 훗날 조선에서는 이 『천주실의』책을 들여와 독자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다. 이는 선교사에 의하지 않은 매우 독자적인 흐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의 지식층에 의한 도입이었기 때문에 교리 해석에 있어서도 매우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결국 이 책의 저술은 우리나라 천주교 도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주2.
시헌력時憲曆: 시헌時憲은 이마두 대성사의 호이다. 시헌력은 청에서는 순치 2년 1644년부터, 조선은 효종 4년 1653년부터 시행되었다.

주3.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 뜻 있는 자는 한 번 뜻을 세우면 평생을 한결같이 일관하여 필경에는 성취한다는 말. 이 부분은 도전 2편 30장 말씀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주4.
산업혁명 이전 세계 문명의 중심은 동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주겸지朱謙之 저),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로버트 B. 마르크스Robert B. Marks 저)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