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절이 돌아갈 곳을 안 한 사람, 사마소司馬昭

[도전속인물탐구]

치열했던 초한대전에서 승리한 유방劉邦은 한漢나라를 건국한다. 이후 한나라는 여태후의 치세를 겪다 유방의 4남인 유항이 문제文帝로 즉위한다. 문제는 아들 경제景帝와 함께 유교적인 통치철학 정립, 경제를 안정시키는 등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루어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를 바탕으로 7세 한 무제武帝 유철은 대외 확장을 꾀한다. BCE 108년 우여곡절 끝에 번조선의 우거왕을 죽이고 위만정권을 무너뜨리지만(이때 소위 한사군 설치라는 역사왜곡이 일어난다), 이어 참람하게도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였다. 이때 창의기병한 동명왕 고두막한高豆莫汗에 의해 참패한 뒤 한나라는 국운이 급격히 쇠락해져 갔다. 이어 외척인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新을 건국하나, 급진적인 개혁정치의 실패로 경제의 후손인 광무제 유수에 의해 다시 한나라가 세워진다. 이를 역사에서는 후한後漢이라고 한다. 후한은 4대 화제和帝 이후 어린 황제들이 잇달아 즉위하면서 외척과 황제를 둘러싼 환관들의 권력 다툼이 극심해 졌다. 지배층들의 권력다툼으로 민생은 파탄에 이르고 급기야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태평교의 장각이 184년에 누런 두건을 쓰고 기의起義를 하니, 이것이 후한 멸망의 신호탄인 황건기의黃巾起義(황건적의 난)이다. 후한 광무제가 한나라를 중흥한지 160여년만의 일이다. 이미 후한 왕실은 민생을 돌볼 여력도 의지도 없이 그 위상이 무너졌고 황건적 진압을 구실로 거병한 제후들의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니, 이른바 중국의 삼국시대三國時代가 도래하게 되었다.


영웅쟁패의 삼국지三國志


중원 대륙은 주기적으로 난세와 치세가 교차했다. 이를 천하대세는 나누어진 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된다(천하대세天下大勢, 필구필분分久必合)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천하 대란이 일어나자 세상은 바야흐로 난세의 시기,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대였다. 중원은 사실상의 통일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치세治世는 나라의 질서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기간으로 왕도가 행해지는 시대라면, 난세亂世는 국가가 분열되어 여러 집단들이 무력을 바탕으로 패권을 추구해 민생을 돌보지 않고, 무한 착취하여, 국가 통치 질서가 성립되기 이전의 상태나 기존 통치 질서가 붕괴된 후의 혼란 상태를 말한다.

치세에서 난세로 전환은 국가라는 통치체제가 그 성립 근거가 되는 백성들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과 질서유지에 실패하고, 생산을 초과하는 수탈로 일반 백성들의 삶의 안정 보장을 못해주는 때다. 이때는 여러 군벌집단들이 등장해 서로 항쟁하면서 세상은 더욱 혼란해지고 일반 민중의 삶은 더욱더 도탄에 빠져 최소한의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는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인물, 즉 민생을 안정시키는 사람이 천하를 얻게 되는 법이다.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동탁의 중앙정부 장악에 반발해 일어난 원소 등의 산동 반군들로 당시 중국은 3개 세력권으로 재편되었다. 황제와 조정을 납치해 관중으로 들어간 동탁董卓, 허베이 반군의 맹주 원소袁紹, 황하 이남의 여러 군소 군벌 집단 연합체가 추대한 원술袁術이다. 이후 동탁이 왕윤과 여포의 손에 죽자 관중은 곧 혼란에 빠졌다. 이에 헌제가 관동으로 탈출하고 원소와 원술은 서로 견제하기 위해 원술은 북방의 공손찬公孫瓚을, 원소는 연주목兗州牧 유대劉岱와 그 뒤를 이은 조조曹操를 후원했다. 원소-조조 연합은 원소가 공손찬을 멸하고 조조가 원술을 제거하면서 최종 승자가 되었고, 중원을 제패할 실력자는 원소袁紹와 조조曹操 두 사람만이 남게 되니, 양자 간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북방의 4개 주를 차지한 원소가 조조보다 훨씬 강대했으나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면서 상황은 일거에 역전되고 양자 간 중원 패권을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니 이른바 관도대전官渡大戰이다. 치열했던 관도대전에서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조조가 승리를 거두면서 천하의 혼란은 이제 그 막을 내리는가 싶더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삼국의 정립과 귀결


바로 유비劉備가 장강이남 변방에 세력을 구축한 손권孫權과 손을 잡고 적벽에서 조조군을 저지한 것이다(적벽대전赤壁大戰).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유비는 전한 경제景帝의 7남인 중산정왕 유승이 둔 120명 이상의 자식들 중 한 명인 육성정후陸城亭侯 유정劉貞의 후손으로 부친은 유홍이었다. 삼국지의 다른 영웅들과 달리 뚜렷한 기반이 없으나 한고조 유방의 풍모를 지녔고 덕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유비는 절대 충의 관우關羽, 호쾌한 장비張飛, 비단 두른 상남자 금錦 마초馬超, 노익장 황충黃忠, 당판파의 영웅 조운趙雲, 최고의 군사 봉추 방통龐統, 천하제일의 정치가 와룡선생 제갈량諸葛亮 등의 보좌로 적벽대전 이후 촉 지역을 기반으로 촉한蜀漢을 건국하게 된다(221년 장무 원년). 하지만 관우를 죽인 손권에게 보복하기 위해 오吳로 출병하는 과정에서 의형제 장비를 잃게 되었고, 이릉夷陵(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의창현宜昌縣)에서 오의 대장군 육손에게 참패하였다(이릉대전). 이를 계기로 손권孫權은 오왕吳王으로 자립하고 연호를 황무로 정해 진정한 삼국정립이 이루어졌다. 이후 유비는 백제성白帝城에서 제갈공명에게 자식인 유선劉禪을 탁고托孤하며 일세의 효웅梟雄으로서 일생을 마친다(223년). 이때를 전후로 삼국지의 중요한 영웅들이 최후를 맞게 되는데 관우가 죽은 이듬해인 220년 위魏나라를 세운 조조가 죽고, 제갈량도 234년 북벌 과정에서 최후를 맞게 되면서 천하의 향방은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서 귀결되게 된다.

의외의 인물 사마司馬씨 부자


제갈량의 북벌 계획은 한고조 유방의 참모인 장량의 계책과 유사했다. 관중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인데 이를 저지한 인물로 알려진 게 바로 사마의司馬懿(179~251)이다.주2 사마중달司馬仲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마의는 명문세가에서 태어났다. 사마의의 조부는 사마준으로 영천태수를 지냈고, 부친 사마방은 경조윤 낙양령을 지냈는데,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그의 형인 사마랑은 22세에 조조 아래에서 관직에 나아가 신임을 받았다. 사마의에 대해서 당대 사람인 최염은 총량명윤總亮明允, 강단영특剛斷英特이라고 평했다. 총은 지혜를, 양은 성실, 명은 고명, 윤은 공정, 강은 굳건, 단은 결단, 영은 탁월, 특은 독특하다는 뜻이다. 이 평이 바로 조조의 주목을 받게 되어 조조가 여러 번 출사를 종용해 30세에 조조 휘하의 관직에 나갔다. 이후 73세에 죽기까지 40여 년간 조조, 조비, 조예, 조상 등을 보좌한 위나라의 원로였다. 이후 사마의는 그 아들들과 함께 위나라의 실권자인 조상 형제에 대항하여 고평릉의 변주3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이후 사마의 아들인 사마사와 사마소가 조씨 정권을 탈취하여 허수아비로 만들고 서진 제국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중 차남인 사마소司馬昭(211-265)는 자는 자상子上 또는 자상子尙으로 형인 사마사司馬師가 죽은 뒤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폐제廢帝 조모曹髦는 사병 300명을 동원하여 사마소司馬昭를 제거할 계략을 펼치나 이를 눈치 챈 사마소에 의해 계략이 무산되고 폐위되고 만다. 이후 사마소는 위나라 마지막 황제인 원제元帝 조환曹奐을 옹립하면서 사실상 모든 전권을 갖게 된다. 이후 53세 되는 263년에 사마소는 등애鄧艾와 종회鍾會에게 촉한蜀漢 정벌을 명했고, 그해에 촉한을 멸망시켰다. 이는 삼국정립이 붕괴되어 천하 통일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264년 촉한 정벌의 공으로 진왕晉王에 올라 제위 찬탈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265년 사망했다. 그 뒤 사마소의 장자 사마염司馬炎이 진왕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킴으로 해서 60년간에 걸친 삼국시대의 종언을 고하게 했다.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은 자신의 부친인 사마소를 묘호는 진태조晉太祖, 시호는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하였다.

진정한 승자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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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시대는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대 혼란기였다. 황건기의黃巾起義가 있던 184년부터 사마염의 진晉나라 통일까지 약 100년 동안 당시의 중원 인구는 5천만에서 천만 명으로 급감하였다. 혼란과 격변을 부른 난세의 원인은 후한 왕조 말기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이었다. 환제 이후에는 환관들이 득세하게 되고 이들은 백성들의 안정과 생활은 보살피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백성들을 향한 무한 착취를 일삼았다. 이렇게 권력투쟁에만 몰두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 황건기의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중원은 극도의 혼란 국면으로 치달았고, 세간의 이목은 누가 이 난세를 수습해 통일을 이룰 것인가에 쏠려있었다. 당시의 정세와 여건으로 살펴볼 때, 정치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힘과 기반을 보유했고 둔전제 도입으로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제도 창출의 역량도 갖추었으며, 압도적 다수의 백성과 토지를 소유하고 문화적인 중심지로서의 위상까지 지녔다는 점에서 조조의 위魏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정통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이미 후한 왕조자체가 국가로서 정통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단지 먼 친척뻘인 혈연만으로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는 기존 「삼국지연의」의 근본 전제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황건기의가 일어난 184년부터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을 함락시킨 204년에 유비와 손권이 대세에 따랐다면 천하는 이때 통일 되었을 것이고 백성의 생존을 극단적 위험으로 몰아넣는 천하대란은 금세 종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중원은 삼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먹고 먹히는 싸움이 80년간 지속되었고 각기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싸우는 총력전 태세로 맞서면서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수많은 전선에서 무수히 죽어간 것은 강제 징집된 백성이고 전쟁 물자를 대느라 가혹한 착취와 수탈을 당한 것도 백성들이었다. 장기간 지속되는 전시 동원 체제로 인해 정상적인 가정생활조차도 힘든 난세의 전형 그 자체였다. 결국 천하는 조조, 유비, 손권 그 누구의 후손도 아닌 사마씨의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100년간의 투쟁, 적벽대전 이후 연장된 70년간의 투쟁은 과연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나라의 흥망성쇠는 거의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데, 한나라는 실정을 저질러 스스로 망한 왕조였다. 한나라 중흥은 수백 년간 국록을 먹은 지배계층에게는 의리상 당연한 일이겠지만, 국가로서 기본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나라와 왕조를 되살려 보았자 늘 그 모양이었을 백성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사마씨의 진나라 통일은 국가의 흥망과 인민의 고락이라는 측면에서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환경인 국가안보와 사회질서 유지 측면에서 훌륭한 치적을 쌓음으로써 국가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이를 망각한 서진西晉은 또다시 팔왕의 난(291: 진 황족이 중심이 되었던 내란, 북방민족을 용병으로 이용)을 겪게 되고 이후 중원대륙은 수나라 양견이 중국을 통일(589년)할 때까지 오호십육국시대와 남북조시대의 대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의병건곤義炳乾坤(의를 밝힘은 천지를 덮는), 충의와 재물의 신 관성제군
주4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운장(關雲長)은 병마대권(兵馬大權)을 맡아 성제군(聖帝君)의 열(列)에 서게 되었나니 운장이 오늘과 같이 된 것은 재주와 지략 때문이 아니요 오직 의리 때문이니라.” (도전 4편 15장 1절-2절)


유비, 조조, 손권 등 군웅들이 쟁패했던 삼국지의 최후의 승자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에는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관우關羽는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천지를 덮는 의기義氣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추앙을 받았고 중국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사람들에게서도 숭배를 받아온 인물이며, 사람으로 신의 반열인 성제군聖帝君의 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리라. 특히 관우는 문성文聖 공자와 함께 무성武聖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런 관우에 대한 신앙은 역설적으로 그의 실패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주 공방전을 통해서 본 관우는 지나친 자존감으로 ‘손권과 연대하여 조조에 대항한다’는 촉나라의 기본 방향과 어긋나는 행동을 했고, 이후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대전夷陵大戰을 일으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형주를 잃은 뒤에는 촉한이 중원으로 나갈 통로가 한정되었으므로 제갈량의 북벌에 대한 위나라의 대처가 용이해졌으며, 그 결과 촉한의 북벌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위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이는 천하 통일이라는 뜻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병졸에게 관대하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다는 점을 보면 그의 성격적 결함은 결정적 순간에 고립을 자초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록들을 보면 관우에 대한 용맹함은 칭찬 일색이지만(일례로 위나라에서는 관우와 장비를 만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하여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고 불렀다), 일선 군 사령관으로서 뛰어나다는 평은 거의 없음도 현장에서 작전을 통제하거나 지휘하는 사령관보다는 돌격대장의 임무 수행에 적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주5
하여튼 형주공방전에서 위魏와 오吳 둘 다를 상대하던 관우는 고군분투하던 중 맥성麥城에서 마충에게 잡혀버렸다. 손권은 관우에게 귀순을 권유했으나, “파란 눈의 어린 놈, 붉은 수염의 쥐새끼”라고 욕설을 내뱉으며 아들 관평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후 그의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고, 조조는 제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일세를 풍미했던 명장의 최후가 더할 수 없이 쓸쓸했기에 사람들이 더 그를 애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여러 결점을 뒤덮는 관성제군의 장점이 있었다. 이 점이 인간 관우를 관성제군으로 이끈 게 아닌가 싶다. 바로 천지를 뒤덮는 절대 충의이다. 관우가 살았던 삼국시절은 후한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하극상과 함께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관우는 달랐다.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허베이河北의 원소袁紹 밑으로 도주하면서 그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조조는 장료를 통해 관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여포의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이가 관우였다. 이를 보면 관우는 확실히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의리 있는 인물들과는 깊은 유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의 식솔을 보호하던 관우는 조조에게 자신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게 아니고 한나라 천자에게 항복하는 거고, 두 형수(유비의 감부인과 미부인)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며, 유비의 거처를 파악하면 즉시 찾아가겠다는 3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이에 인재 욕심이 많았던 조조는 다른 조건은 상관없고 마지막 조건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후한 대접으로 그의 마음을 얻고자 이를 허락한다. 이후 조조는 3일마다 작은 연회를, 5일마다 큰 연회를 베푸는 등의 후한 대접과 함께 편장군이라는 작위를 하사받게 해주었다. 그리고 미녀 10여 명을 보내 회유했으나 관우는 10명을 형수들의 시녀로 삼아 버렸다. 이후 여포가 타던 적토마赤兎馬를 하사하자 관우는 함박웃음을 띄며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다른 후한 선물에는 시큰둥했던 그동안의 관우의 모습과 다른 점에 의아한 조조는 그 연유를 물어보자 “이것만 있으면 형님의 행방이 알려지는 대로 하루 만에 달려 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대답하자 조조는 서운해 하면서도 그의 진심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이에 관우는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유비 형님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대장부가 되어 이미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맹세한 사이이니 이를 배반할 수는 없는 일이며, 만약 유비 형님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그때는 저 세상에서 그를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고 말했다. 이에 조조는 “한번 주인을 섬겨 끝내 그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니, 관우는 천하의 의사義士로구나!”며 경탄했다고 한다. 이후 관우는 조조의 은혜를 갚기 위해 원소와의 백마 전투에서 안량을 죽여 공을 세워 한수정후漢壽亭侯가 되었다. 그 뒤 관우는 유비가 원소 진영에 있음을 알게 된 후 허도를 탈출해 유비를 찾아 길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탈출의 여정에서 다섯 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조조의 여섯 장수를 참살했다는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는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놓아주는 이유가 된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오관참육장의 설화는 진수의 「삼국지」 등 사서에는 없고 소설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각색하여 지어낸 허구이다. 219년 촉지방과 한중을 장악한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前將軍에 임명되었다. 촉한 건국의 원훈이며 오호대장의 제1의 장수가 되었으나, 형주 공방전을 벌이다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역대 통치자와 백성들이 오랜 기간 걸쳐 관우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점은 관성제군의 ‘충의忠義’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강조한 의義가 군신 부자 형제의 유교적인 의라면, 백성들이 지향하는 의義는 고달픈 사회에서 힘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결속해서 신뢰 관계를 형성해 살아가는,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신의信義’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백성들의 의에 대한 생각은 상인들에게 절대 필요한 신용을 상징하게 되었고 의로운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자, 그래서 영험이 확실한 신神으로 여기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지금까지도 관성제군을 재신財神으로 여겨 숭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백면서생으로 출세하여 유상팔백주로 생을 마감한 제갈량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갈량(諸葛亮)이 성공치 못한 것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로 인함이니라.”(도전 8편 22장 8절)주7


소설 「삼국지연의」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의 등장만으로도 신비로움과 함께 천하의 정세가 바뀌게 하였고 분량 면에서도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존재. 27세의 젊은 나이에 일세의 효웅인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로 등용했고,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를 만들며, 역사에 이름을 드러낸 이후, 54세로 우장위안五丈原 진중에서 떨어지는 별과 함께 죽은 만고의 충신. 호풍환우하는 신과 같은 천재적인 전략가요 책략과 지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며, 8척(후한시대 당시의 척도 기준으로 184cm)의 키와 백옥 같은 피부에 흰 학창의와 백우선을 가진 모습이 신선의 풍모를 지녔다는 그 사람, 바로 촉한의 권신權臣 제갈량諸葛亮이다.

제갈량은 181년 음력 7월 23일 당시 서주에 속하던 낭야국 양도현, 현재 산둥성 기남현 부근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다. 아버지 제갈규는 후한 말 태산군의 승丞을 지냈다. 이후 그의 일가는 “사방 1척의 땅, 한 사람의 백성조차 한漢의 것은 아니로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건안 24년 주注부분)”라는 말로 표현되는 난세를 당해서 그나마 평온한 형주 양양(현 후베이성湖北省 양번시襄樊市)로 이주하였다. 이곳 융중에서 정착하여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이름난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 시기에 지었다는 양보음梁父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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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그 결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賢人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제갈량은 책을 한 번 대충 훑어볼 뿐 세세한 것은 탐색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관중官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했다. 이미 이때부터 한 황실 부흥의 원대한 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뒤 207년 유비의 삼고초려 때 당시 지식인들의 공론인 천하 삼분계획을 올린 뒤 군사중랑장으로 임명되어 행정行政과 병참兵站을 담당하여 행정부문에서는 수완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뒤 이어지는 여러 군사적인 업적들은 삼국지연의에서만 보일 뿐 실제 정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즉 그의 첫 데뷔전으로 알려진 박망파 승리는 유비劉備가 직접 한 것이고,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조조군의 화살을 소진시키거나 제사를 지내 동남풍을 부는 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가공이며 적벽대전 승리의 주역은 오吳의 주유周瑜였다. 또한 당시 유비 진영의 2인자인 관우關羽가 형주 공방전에서 위魏와 오吳 양쪽에서 협공을 당해 죽음을 당할 때도 아무런 방책을 내놓지 않아 일부러 관우의 죽음을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샀으며, 219년에 있었던 한중공방전 역시 유비를 수행한 참모는 법정法正, 황권黃權이었고 이 시기 제갈량은 성도에서 병참과 보급을 담당했다. 이후 벌어진 남만정벌은 그 근거가 희박하고, 여러 차례 있었던 북벌은 그 성과가 미미하였다. 특히 1차 북벌 때에는 숱한 고생을 겪으며 세상 물정에 통달한 유비가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마속馬謖을 중용하지 말라고 했지만, 제갈량은 이를 무시하고 그를 중용했다. 결과는 가정街亭을 빼앗기면서 위魏의 장합張郃에게 철저히 격파 당했고,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베는(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 뼈아픈 패배를 겪는다. 이후 이루어진 북벌에서도 뚜렷한 승리나 성과는 없이 쓸쓸히 우장위안五丈原에서 병사하고 만다. 제갈량은 후세에 알려진 것처럼 뛰어난 군략가라기보다는 내정과 정치 분야에서 뛰어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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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비 사후 승상丞相, 녹상서사錄尙書史, 익주목益州牧 및 사례교위司隸校尉를 겸하며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14년 동안 촉한의 재상으로써 실권을 행사하였던 권신이었다. 그럼에도 유언에서 밝히듯 제갈량은 뽕나무 800그루, 메마른 땅 15경을 가족을 위해서 따로 배려하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漢나라 부흥에 전념하지는 못했다. 삼국 중 최약체인 촉나라의 명운이 제갈량 자신의 명운과 같았음을 알았다면 가족을 위한 배려보다는 좀 더 전념하여 한漢 부흥에 매진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234년 5차 북벌 중 우장위안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제갈량의 충의로움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그가 북벌에 앞서 올린 출사표는 이를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평하는 명문장으로 충신의 매운 얼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은사인 수경선생 사마 휘가 “와룡, 그는 주인은 잘 만났지만 때를 잘못 만났구나. 안타까운 일이로다”라고 제갈량의 출사의 앞길을 예고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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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비범한 지략을 지녔고 법치주의, 인재등용의 모습, 제도 개선과 농업 생산 증진 등 행정 분야에서는 뛰어난 업적을 보였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변치 않은 충의는 그가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는 바, 이에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사후 촉한의 유선劉禪은 그에게 훗날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같은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1
. 삼국시절三國時節이 수지지어사마소誰知止於司馬昭리오(삼국시절이 사마소에서 대세가 그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요). 사마소司馬昭는 삼국시절의 어지러운 정국을 평정한 인물로 사마의司馬懿의 차남이다. 사마소 도수는 상제님의 난법 도운을 끝맺고 상제님의 도로써 천하를 통일하는 지도자 출세 도수이다.

주2
. 제갈량과 사마의의 진정한 대결은 228년 1차 북벌이 아니라, 3년 후에 있었던 4차 북벌인 231년이다. 가정街亭을 잃는 싸움에서 마속馬謖을 패배시킨 이는 위魏의 대장 장합張郃이었다. 이때는 조위의 명제가 직접 장안까지 나와 지휘를 했다. 이후 231년 봄,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 조위의 대도독인 조진이 중병을 얻은 때라 긴급하게 동쪽 완성에서 서쪽 전선으로 투입하게 된 것이다. 이때 제갈량 50세, 사마의 52세였다.

주3
. 고평릉高平陵의 변變은 249년 삼국 시대 위나라의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있던 조상과 그 일당을 처형한 사건으로 이후 사마의는 조방에 의해 승상에 봉해지고 구석의 예우가 내려지면서 사마의는 병권을 완전히 장악해 이로써 조씨 정권이 멸망하고 사마씨 정권이 세워진다.

주4
. 진수의 정사인 「삼국지」에는 관우의 탄생에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전장군장목후는 촉나라 후주 유선이 내린 시호로 장은 반란에 맞서 싸워 망설이지 않았다는 뜻, 목穆은 의리를 지키고 덕을 널리 폈다는 뜻이다> <사전비기祀田碑記> <관공연보關公年譜> <관제지關帝志>등 기록과 민간에서 내려오는 설들을 통해보면, 후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 경자 162년 음력 6월 24일에 하동군 해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지역은 산시성陝西省과 산시성山西省을 가르는 협곡을 끼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황하가 풍릉도에서 비스듬히 동쪽으로 방향을 튼 지역으로 오늘날 산시성山西省 운성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이 지역 중 해주解州는 광대한 소금 연못이 있던 곳으로 군웅 쟁탈의 표적이 되었던 지방이다.

관우의 할아버지는 관심關審이며 자는 문지問之, 호는 반석磐石으로 주역과 춘추 등의 책을 자식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157년 후한 환제 영수 2년 정유년에 68세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친은 관의關毅로 자는 도원道遠으로 관우는 성장하여 호씨胡氏와 혼인하였고, 178년 영제 광화 원년 무오년 음력 5월 13일에 그의 첫 아들 관평關平을 얻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양자로 기록되어 있다. 관우의 키는 키가 9척(약 2m), 삼각 수염은 2자(약 46cm)로 그 모습이 아름다워 미염공美髥公이라 불렸다. 얼굴은 그을린 대추와 같은 색(重棗)에,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으로 당당한 풍모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무기로 언급되는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당시 없던 무기로 언월도는 북방 민족의 무기였다. 기록에는 그저 큰 칼을 사용했다고 전해 후세에 알려진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는 노숙과 회담 시에 있었던 고사에서 유래해 「삼국지연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주5
. 「위서 서황전」에는 219년 서황이 형주로 가서 번성樊城을 포위한 관우의 군대를 격퇴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우금전〉을 보면 번성 공략에서 우금을 이기긴 하지만 당시 큰 장맛비가 내려 한수가 범람하고 평지에 물이 차올랐기 때문으로, 이에 대해 조비가 우금을 위로하여 말하길 "번성에서에 패배는 스스로 군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서 패한 게 아니라 갑자기 큰비가 내려 이에 한수가 범람하고 사납게 들이닥친 것일 뿐 싸움을 잘못해서 패한 것은 아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화용도 고사로 유명한 적벽대전에서도 조조가 퇴각로로 사용한 화용도는 적벽대전이 발발하기 전 조비가 길을 닦아 놓았고, 이때 조조의 주력인 청주병은 거의 피해를 받지 않고 양양으로 도망쳤고, 화용도에서 조조를 추격하던 관우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혼자 뛰어든 악진에게 패해 추격을 멈췄다고 「삼국지」 위서 악진전에서 전하고 있다.

주6
. 이 부분은 김경한님의 저서를 근본으로 해서 요약 정리하였음.

주7
. 공명이 출세할 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뽕나무 800주를 둔 일을 말한다. 공명이 출사표에서 밝힌 원래 뜻은 최소한의 재물을 뜻하였으나 상제님께서는 이 일화를 들어 인류구원의 차원에서 일을 하는 큰 일꾼은 그 이상의 자기희생을 감내해야 함을 역설하고 계신다.

주8
. 양보음은 원래 공명의 고향인 산둥성 지역에서 부르던 만가輓歌이다. 양보란 춘추시대 제나라의 태산 기슭에 있던 작은 산으로 진시황제가 즉위 28년에 태산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양보로 자리로 옮겨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양보산 기슭의 평원은 제나라 수도 임치 주민들의 공동 묘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장지로 가는 길에 부르는 노래를 양보의 노래라고 했다. 이 노래는 하극상이 만연하던 춘추 시대 제나라의 대 정치가 안영(晏子)이 이러한 풍조를 한탄하며 제나라의 경공조차 속을 썩이던 호걸 세 사람을 꼼짝 못하게 했다는 일화를 담고 있다.

양보음梁父吟
보출제동문步出齊東門 요망탕음리遙望湯陰里
제 나라 임치성 동문 밖으로 걸어 나서면 탕음리가 저만치 보인다.
리중유삼분里中有三墳 루루정상사累累正相似
마을에는 무덤이 세 개가 있으니 모두가 닮은 모습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다.
문시수가총 問是誰家塚 전개고야자田開古冶子
지나가던 사람이 누구의 무덤이냐고 묻자 전개강, 고야자 공손첩의 무덤이로다.
력능배남산力能排南山 문능절지기文能絶地紀
힘은 남산을 등에 업을 수 있었고 지략은 능히 지기를 끊어 놓을 만했는데,
일조중음모一朝中陰謀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하루 아침에 음모에 빠져 복숭아 두 개가 세 명의 선비를 죽였다.
수능위차자誰能爲此者 상국제안자相國齊晏子
누가 능히 그들을 이렇게 죽일 수 있었는가? 제 나라의 상국 안자晏子이었더라!

주9
.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평한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료 제도를 간략히 하여 시의 적절하게 제어했고, 진실로 열린 마음으로 공정한 도리를 펼쳤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일에 정통했으며 사물의 근본적인 이치를 알아 , 명분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는 말)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촉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형벌과 포상이 명료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을 아는 빼어난 인재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는 임기응변하는 장수로서 책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주10
. 즉 부패할 대로 부패한 후한은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했고 천하는 혼전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때문에 한 황실의 권위를 재건한다는 기치에 매력을 느끼는 인재는 아무도 없었고, 이미 생맥生脈이 떨어진 후한황실에 얽매이지 않고 누가 천하를 거머쥐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시대의 흐름을 제갈량을 몰랐는지 아니면 일부러 외면했는지는 모르겠다. 허나 이런 흐름을 간파한 이가 조조와 사마의였고, 이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 2003)
『역주 환단고기』 (안경전, 상생출판, 2012)
『삼국지 장군 34선』 (와타나베 요시히로, 서책, 2014)
『평설 인물 삼국지』 (김경한, 북오션, 2014)
『자기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자오위핑^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변경』 (렁청진^김태성 역, 더난출판, 2003)
『삼국지 쉽게 읽기』 (도키아키코 엮음^시오자와 히로히토 감수^ 김지은 옮김, 에디터, 2012)
『평역 삼국지』 (나관중 지음^이문열 옮김, 민음사, 2002)
『영웅의 역사 4- 삼국지의 영웅 제갈공명 편』 (타츠마 요시스케 저^이재정 역, 솔, 2000)
『영웅의 역사 6- 대륙의 명장 관우, 사마중달 편』 (타츠마 요시스케 저^오자키 호츠키 저^윤소영 역, 솔,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