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인도네시아

[세계지역문화탐방]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이며, 지형적 복잡성만큼이나 인종, 언어, 문화도 매우 다채로운 나라이다. ‘다양성 속의 통일’을 기반으로 개방과 통합을 추구하는 인도네시아의 국정 철학은 국가를 상징하는 국장國章(Garuda Pancasila)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해 거대한 잠재력으로 다져나가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오늘을 조명해 본다.


김선주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자연환경
인도네시아는 아시아의 동남부, 인도양과 남태평양 사이에 위치해 있는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로서, 크고 작은 1만 7,508개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끝의 수마트라Sumatra섬, 자바Java섬에서 북동쪽의 할마헤라Halmahera섬까지 약 5,100km에 걸치는 호상弧狀(활등처럼 굽은 모양)의 순다열도Sunda Islands와 그 내부에 위치한 보르네오Borneo섬(칼리만탄Kalimantan), 술라웨시Sulawesi섬(셀레베스Celebes) 등의 큰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해역은 테티스해海 구조대와 환태평양 구조대가 이어지는 곳으로 지반의 변동이 격심했던 지역이다.

현재 이들 제도諸島에 의해 둘러싸인 바다는 수심 50m 이하의 얕은 바다로, 이른바 순다Sunda 해붕海棚(대륙붕大陸棚: 영해의 밖에 있는 비교적 얕은 공해의 해저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 해붕과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의 사풀 해붕은 마카사르Makassar·롬복Lombok 양 해협을 연결하는 월리스선線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순다열도 및 몰루카제도Moluccas에는 현재 화산火山활동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화산의 수가 전국을 통틀어 400개에 달하며, 이 중 활동 중인 화산은 78개이다. 화산은 특히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에 집중되어 있으며 보르네오섬과 술라웨시섬에는 극히 적다. 이 화산들은 자주 발생하는 폭발과 지진으로 인간생활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준다. 화산은 3,000m를 넘는 것이 대부분이며, 자바섬 최고의 스메루Semeru산(3,676m)을 비롯하여 롬복섬의 린자니Rinjani산(3,726m) 등이 대표적이다. 높은 산들 사이에는 많은 고원 및 분지盆地가 이어지며 수마트라섬 서안의 파단 고원, 자바섬의 반둥, 말랑 고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고원에서는 기온이 체감률에 따라 낮아지므로 거주에 유리하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지역의 산지와 해안부근에 있는 정글에는 넓은 저습지대低濕地帶가 분포하며 그 중간을 많은 하천이 곡류한다. 수마트라섬의 무시강Musi Riverㆍ잠비강Jambi River, 보르네오섬의 카푸아스강Kapuas Riverㆍ바리토강Barito River 등은 길이에서 인도네시아의 유수한 하천에 해당한다.

인도네시아의 기후는 여러 섬들이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5°에서 남위 10°사이에 위치하므로 완전한 열대성 기후를 나타내며 동남아시아 계절풍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연중 높은 기온을 나타내 거의 전지역이 평균기온 25∼27℃를 기록하며 적도변의 중앙지대에서는 월별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강수량은 몬순의 영향을 크게 받아 중심부에 해당되는 적도 부근의 연중 강우지역을 제외하면 대체로 건기乾期와 우기雨期의 구별이 뚜렷하다. 주요지역의 연평균강수량은 폰티아나크Pontianak(보르네오섬) 3,175mm, 파당Padang(수마트라섬) 4,172mm, 자카르타Jakarta(자바섬) 1,755mm이며, 소小순다열도Lesser Sunda Islands의 동쪽은 훨씬 더 건조하다.

인도네시아의 역사

고대왕국 시대
인도네시아의 역사는 4세기 무렵부터 등장하는 고대 왕조들로부터 출발한다. 300년대의 쿠다이 왕국에 이어 358년에 성립한 타루마너가라 힌두교 왕국이 자바 서부지역을 지배하였고 500년대에는 가릉 왕국이 존재하였다. 이어 689년 인도계 이주인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불교 왕조 스리비자야Sriwijaya 왕국(중국의 문헌에는 실리불서室利佛逝, 삼불제三佛齊라고 기록됨)이 주로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13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는데, 특히 강력한 해상세력을 형성하여 수마트라, 자바서부,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으며 남중국해무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부를 자랑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 자바섬의 중앙에 샤일렌다르라고 불렸던 왕조가 일어나 보로부두르와 같은 불교유적을 남겨놓았다. 이 왕조는 수마트라섬의 스리비자야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9세기 중엽에 이 두 왕통王統이 합병됨으로써 한때 남중국해의 강대한 해상제국이 성립되었다.

1292년에는 힌두교 왕조인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이 현재의 전全 인도네시아 영토와 말레이 반도, 필리핀 남부에 걸친 거대한 해상 제국을 형성했다. 이 왕조는 나중에 포르투갈 영토가 된 동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여 인도계 국가로서는 최후의 번영을 누렸다.

이슬람왕국 시대
한편 아랍인들이 남중국해로 진출해온 것은 꽤 오래된 일로 추정되는데, 10∼11세기 무렵 베트남의 참파 근방으로 유입해온 이슬람교는 13세기에 수마트라섬 북부의 사무두라와 페들라크에 이슬람 왕국을 성립시켰다. 15세기에는 이슬람교가 확산되었는데, 수마트라와 자바, 칼리만탄 해안 지역에 말라카Malacca, 반튼Banten, 마타람Mataram 등 여러 개의 이슬람 왕국이 성립했다. 15세기에 자바로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특히 중부지방에서 기반을 굳혔으며, 마자파히트 왕조는 북부해안 부근의 테마크를 지배하였던 이슬람교 군주에게 멸망하였다. 그 뒤 이슬람교는 서부 자바를 비롯하여 보르네오섬, 셀레베스섬 등 여러 섬으로 전파되어 발리섬을 제외한 동인도제도를 휩쓸었다.

식민통치 시대
근세에 와서는 이슬람교도의 해상세력을 격파한 서유럽인들이 진출해왔다.

포르투갈Portugal은 암본을 차지하고 몰루카제도의 향료 무역권을 독점하였으며, 스페인Spain은 필리핀을 세력권으로 하여 몰루카제도의 향료무역에도 손을 대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식민지정책에 서툴렀기 때문에 네덜란드Netherlands가 이들에게서 동인도의 해상권海上權을 빼앗았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이곳으로 진출해온 영국인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쿤은 자카르타에서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바타비아를 건설하여 자바섬에 네덜란드 세력을 심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마자파하트 왕조의 뒤를 이은 마타람왕국을 잠식해 들어갔다.

1602년 인도네시아에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었으며, 1824년에 이르러서는 인도네시아 전체가 네덜란드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한편 1942년~1945년 사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점령통치 방식은 매우 강력하고 잔혹해서, 점령 기간은 3년 6개월 정도였지만 350년에 이르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보다도 더 가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출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전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는 공화국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채택하였으며, 수카르노Achmed Sukarno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식민지 지배의 부활을 꿈꾸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4년간의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치열한 독립 항쟁이 결실을 맺어 1949년 12월 인도네시아는 주권국가임을 승인하는 헤이그 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인도네시아 연방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연방공화국은 자바인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네덜란드가 만든 각지의 괴뢰국가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으므로, 연방의 일원이었던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괴뢰국가를 편입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로 1950년 8월 연방을 해산하고 현재의 인도네시아 전지역을 아우르는 중앙집권국가인 인도네시아 공화국Republic of Indonesia을 재출범시키고 국제연합(UN)에도 가입하였다.

의회민주주의와 교도민주주의
1950년 인도네시아는 헌법개정을 통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의회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국가건설에 착수하였으나, 정당간 대립의 심화와 중앙과 지방간의 갈등,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과 국군을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의 정치적 대결로 인해 정치는 혼란을 거듭하였다. 한편, 미소냉전체제하에서 독립을 달성한 인도네시아는 동서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중립의 외교노선을 견지하였으며, 1955년 4월에는 수카르노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자바 서부의 도시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를 개최하였다.

1959년 수카르노는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제도가 인도네시아에 적합하지 않음을 호소하고 1950년 헌법을 폐기한 뒤, 대통령인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체제를 수립하고 종신대통령이 되었으며, 4개 정치세력(민족주의, 종교, 공산주의와 인도네시아 군부)의 균형에 기초한 NASAKOM(민족주의nasionalisme, 종교agama, 공산주의komunisme의 첫 글자를 딴 조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한편 교도민주주의체제하의 수카르노는 이리안Irian 해방투쟁,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등을 통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 대외적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인도네시아의 통일을 유지하려 하였다. 1963년 1월 수카르노 대통령은 말레이시아 연방형성을 영국의 신식민주의로 규정하면서 말레이시아 연방에 대한 대결정책을 선언하고 말레이시아와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이어 1964년 말레이시아가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출되자 1965년 유엔UN을 탈퇴하고 중국,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등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1965년 9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수하르토Haji Mohammad Suharto 장군(당시 전략사령관이자 육군소장)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1966년 3월 수카르노 대통령은 수하르토 장군에게 실권을 이양했다.

수하르토 시대
1968년 3월에 수하르토가 제2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여 신新질서 정부(New Order Government)가 출범했다. 수하르토는 경제개발과 정치적 안정을 최우선시 하는 정책에 기조를 두고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 복귀를 추구하였고, 정치적 안정과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정당시스템과 의회제도의 개편을 실시하여 이를 통해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수하르토의 신질서New Order 체제하에서 권력은 수하르토에게 집중되었고 그 결과 인도네시아의 통일은 강화되고 경제발전도 이루었지만, 다양성의 추구는 통제되고 억제되었다. 1997년에 발생한 아시아통화위기를 계기로 수하르토의 개발독재체제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루피아의 폭락과 물가폭등, 실업자 증대로 이어지는 침체와 혼란에 빠졌다. 1998년이 되자 학생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경제재건, 부패척결을 요구하는 거리 시위가 일어났고, 5월에 군부대가 뜨리삭띠Trisaskti 대학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자카르타에서 대규모 폭동이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었다. 이 사태로 인해 총 6선에 걸쳐 32년간 장기 집권했던 수하르토 대통령은 몰락하게 되고 대통령직을 하비비Bacharuddin Jusuf Habibie 부통령에게 이양했다.

민주화 시대
1999년 10월 인도네시아 최고 권력 기구인 국민협의회MPR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와히드Abdurrahman Wahid 대통령과 메가와티Megawati Setiawati Sukarnoputri(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맏딸) 부통령이 당선되었다. 2001년 7월 국민협의회 특별회의에서는 탄핵을 받은 와히드가 물러나고 메가와티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2004년 7월에는 헌정사상 최초로 국민 직접투표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과반수 득표 후보가 없어 상위 1, 2위 후보인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전 정치·안보 조정장관과 메가와티 대통령 간에 결선 투표가 진행되어 유도요노 후보가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04년 10월 유도요노 대통령이 취임하여 통합정부(United Indonesia Government)가 출범했다. 이어 2009년 10월에는 유도요노 대통령이 재선되면서 제2기 인도네시아 통합정부(United Indonesia Government II)가 출범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정국 개황
인도네시아의 국체國體는 공화국, 정체政體는 대통령 중심제이다. 판차실러Pancasilla라 불리는 ‘건국 5원칙’, 즉 신앙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통일 인도네시아, 대의정치, 사회정의 구현 등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1945년 헌법을 제정하였고, 이를 토대로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는 민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정권(32년간 통치) 하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진통을 경험한 나라이다.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로 운영되던 국정은 1998년 수하르토 대통령 퇴진 이후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DPR의 권한을 강화하는 변화를 겪었고, 2004년 7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헌정사상 최초로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대통령·부통령이 선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민협의회MPR가 국가주권기관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수하르토 퇴임 이후 혼란기를 겪던 인도네시아의 정국은 유도요노 대통령 집권하에서 괄목할 만한 민주화를 성취하였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2009년 재임 후 발리민주주의포럼Bali Democracy Forum을 창설하여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발전 경험을 다른 국가들과 공유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각 정당은 본래 판차실러 민주주의에 기초한 우당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1999년 및 2004년 총선을 거쳐 이슬람계 정당과 민족주의 정당으로 크게 양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14년에 실시될 국회의원 선거(4월) 및 대통령 선거(7월)는 향후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발전 및 정착에 주요 고비가 될 전망이다. 이와 더불어 앞으로 풀어가야 할 주요 국가적 도전 과제로는 군도群島 국가로서의 지역간 불균형과 다종족 등으로 인한 통치상의 난점 해소, 심각한 빈부격차, 인프라 시설 미비 등의 문제 외에도 전통과 근대의 혼재,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잔존, 종교적 관용 유지, 테러리즘 잔존 문제 등도 거론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외교정책에 있어서 자유롭고 독자적인 외교(Free and independent diplomacy)를 정책 기조로 한 비동맹 중립노선을 추구하면서 친서방 외교정책을 통한 실리외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ASEAN의 주도 국가로서 지역협의체에서 ASEAN의 중심적 역할을 유지하고 남중국해에서의 갈등 방지를 도모하고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아체, 서부 파푸아 등 일부 분리독립 요구 지역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재확인하고 영토 일체성의 유지를 위한 지지 확보에 힘을 쏟고 있다.

행정부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 원수로서, 임기는 5년이며 국민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1968년 6월 경제안정과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목적으로 제1차 개발 내각이 발족한 이후 수하르토 정권 하에서 7차에 걸쳐 개발내각이 구성되었고, 1998년 5월 하비비가 새 과도정부를 구성한 뒤, 1999년 10월 국민협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와히드가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와히드는 국가통합 유지와 경제위기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모든 정파를 포함하는 국민연합 내각을 발족, 취임 직후에는 비교적 정세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방의 분리주의 요구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처리 문제 지연, 정파간 갈등의 표면화 등으로 인해 갈수록 정국이 혼미해지고, 2001년에 들어서면서는 와히드 자신이 조달청 자금 횡령 및 브루나이 국왕의 기부금 유용 혐의 등을 받으면서 국내 정세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결국 와히드는 2001년 7월 23일, 국민협의회MPR의 탄핵에 의해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메가와티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잔여 임기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2004년 7월 5일 인도네시아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유도요노가 메가와티를 물리치고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제1기 인도네시아 단합(United Indonesia) 내각이 출범하였다. 2009년 7월 9일 유도요노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면서 제2기 인도네시아 단합 내각을 출범시켰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2004년 집권 이래 안정적인 정치를 펼치며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 민주주의 발전 등을 이루면서 국민적 신임을 얻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부패 청산과 정치 개혁에 있어서의 가시적 성과가 미흡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재선 당시에 비해 지지율이 하락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입법부
국민대표기관은 국민협의회(MPR : People’s Consultative Assembly)이며, 의회는 국회(DPR: The House of Representatives)와 지역대표협의회(DPD : Regional Representative Council)의 2원적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협의회는 헌법제정, 주요 국가정책 방향 결정, 대통령·부통령 선출 및 해임 등과 관련된 일을 하며 임기는 5년이다. 국회의원 560명과 지역대표협의회의원 132명 등 총 692명으로 구성되어 양자의 총괄기구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국회는 입법권, 예산 결정 및 집행·감독, 행정부 견제 기능을 하며 임기 5년에 총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지역대표협의회는 국회의 기능을 보완하고 지역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해 2004년 10월에 구성된 것으로 ‘상원上院’과 유사한 기관이며, 33개 주에서 각 4명씩 총 132명으로 구성되고 임기는 5년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민주당PD, 골카르당Golkar, 투쟁민주당PDI-P, 복지정의당PKS, 국민수권당PAN, 통일개발당PPP, 그린드라당Gerindra, 국민계몽당PKB, 하누라당Hanura, 나스뎀당Nasdem, 월성당PBB, 정의통일당PKPI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제도는 3심제로서 대법원·고등법원(26개)과 지방법원 및 분원(326개)으로 구성되며 대법원은 하급법원을 지도 감독한다. 그밖에 국방부가 관할하는 군사재판소, 종교부가 관할하는 종교재판소가 별도로 설치되어 각 관할사건을 담당하고 있고, 검찰기관으로는 대검찰청, 고등검찰청, 지방검찰청이 있다. 2003년 12월에는 법률의 합헌성 여부를 심사하는 헌법재판소가 신설되었으며, 국가사법위원회도 설치되어 국회의 승인을 받아 대법관을 임명한다.

지방자치
인도네시아의 지방자치 제도는 수하르토 실각 이후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 지방정부는 34개 주, 98개 시, 403개 군, 6,415개 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도 자카르타와 족자카르타는 특별행정주, 아체와 파푸아 및 서부 파푸아는 특별자치주이다. 행정구역 계층은 크게 두 단계인데, 1단계인 주Propinsi 아래에 2단계인 군Kabupaten(농촌지역)과 시Kota(도시지역)가 구성되어 있고, 군과 시 아래에는 우리나라의 면 또는 구와 유사한 크차마딴Kecamatan, 그 아래에 마을Desa(또는 Keluarhan)이 존재한다.

외교, 안보, 국방, 통화, 종교 등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지방정부가 권한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는데, 중앙정부의 권한이양 미흡과 지방정부의 준비 부족 등으로 실질적인 지방분권·자치를 이루는 데에는 많은 한계에 봉착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정부간 격차, 부패 등의 문제가 이슈화되어 2004년에 지방자치제도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2005년부터 주지사Governor, 시장Mayor, 군수Regent는 주민들이 직접 선거로 선출하고 있다.

경제


인도네시아의 경제
인도네시아는 농업과 광업에 기초를 둔 개발도상국형의 혼합경제 체제이다. 인구에 기반한 거대 내수시장과 자원·에너지 개발의 활성화, 외국인 투자의 지속 유입 등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풍족한 자원활용은 경제 운영의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인도네시아는 광물자원에 있어서 수출량 기준으로 석탄(1위), 주석(1위), 니켈(3위), 동(6위) 등이 풍부하고, 국토의 69%가 산림(131만㎢)인 세계 2위의 열대산림자원 보유국으로서 동남아 최대의 목재산업국이기도 하다. 또 석유매장량 세계 27위, 석유생산량은 세계 22위의 국가인데 외국인 투자 축소의 영향으로 석유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하락해 2004년부터 석유 순수입국이 되었으며 2008년에는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석유수출국기구)에서 잠정 탈퇴하였다. 한편 천연가스natural gas 자원의 경우에는 매장량이 세계 11위이고 생산량은 세계 10위로서 석유보다는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네덜란드 식민 통치를 받던 시절의 인도네시아는 서유럽 기업에 의한 단일재배경제형單一栽培經濟型:monoculture의 식민지로 기능하여 왔으며, 민족사회 내부에 민족 부르주아를 형성하지 못한 관계로 독립 후에도 기간산업基幹産業 부문은 물론 생산수단의 생산부문이나 소비물자의 생산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1942년 네덜란드 식민지 권력의 붕괴, 일본군정(1942~1945), 독립전쟁(1945~1949), 그리고 수카르노 정부에 의한 네덜란드 기업의 접수활동이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적 대지주제와 전통적 토지소유제도의 2중구조를 타파하려는 국민경제의 형성이 촉진되었으나, 수카르노 정부 시책을 받쳐주는 경제적 기초가 약했을 뿐만 아니라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뒤를 이은 수하르토 정부는 식량자급을 목표로 하는 비마스 계획을 실시하고 식량·의료 등 국민생활의 구체적인 개선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시책을 실시하였고 외자 도입 정책을 시행함으로 인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하였고 1989년 시작된 제5차 5개년계획에서는 농업부문의 식량자급량 확보와 수출진흥, 고용기회 확대를 위한 공업부문의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다. 1997년 6월부터 시작된 루피아화의 가치폭락은 경제에 큰 위기를 몰고왔으나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와 원조공여국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극복할 수 있었다.

최근 인도네시아 경제는 중산층 증가에 따른 내수와 활발한 해외투자 유입,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최근 3년간 6%대의 고성장을 지속했다. 특히 2012년에는 세계적인 경제불황 속에서도 6.2% 성장하여 G-20국가 중 중국을 제외한 가장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2012년 인도네시아의 명목기준 GDP는 8,949억 달러(세계16위, IMF 기준), 1인당GDP는 3,557달러(세계104위, World Bank 기준)를 기록했다. 2012년도 매킨지McKinsey 보고서는 인도네시아 경제가 주요 도전요인들을 극복할 경우 2030년에 독일과 영국을 초월하여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2013년 들어 인도네시아 경제는 높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환율변동과 보조금 석유 가격인상과 이에 따른 인플레, 국제 원자재 가격(석탄 등) 약세에 따른 수출 부진, 경제성장을 주도하던 외국인 투자의 증가세 둔화 및 소비심리 위축, 생산성 증가를 넘어서는 급격한 임금 인상 등의 요인들로 인해 경제성장이 다소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종교와 문화


종교와 인종
인도네시아인의 대다수는 이슬람교(85.2%)를 신봉하며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 외의 종교는 기독교 8.9%, 천주교 3%, 힌두교 1.8%, 불교 0.8%, 기타 0.3%의 분포를 보인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가 다수일 뿐 세속 국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아랍국가들처럼 전형적인 이슬람 국가는 아니다. 종교 분포상 다수의 세력을 지닌 이슬람 문화가 자연스럽게 사회 생활문화의 저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무슬림과 기독교도들 간의 종교적 충돌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최근 추세는 사회적인 불안과 우려를 야기시키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헌법 29조에서 5개 종교(개신교,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며, 종교가 없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신분증에 반드시 종교가 명시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지만(인도네시아의 대통령 6명이 모두 이슬람교 신봉) 발리 섬에서는 힌두교가, 술라웨시 섬 북부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우위이다. 인도네시아 기독교는 1960년대에 크게 성장하는데, 그 이유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당원들을 교우로 받아들여서 정부와 극우파들의 박해와 학살로부터 보호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인종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부지역은 대부분 말레이족이고, 반면에 동부지역은 멜라네시안섬 출신인 파푸안족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출신지방, 지역별로 각기 종족들이 다르고 언어로 각각 다르다. 예를 들면, 중부자바, 동부자바는 자바인, 서부자바는 순다인, 북부수마트라는 바탁인종이다. 또한 중국, 인도, 아랍후손들의 소수인종도 있다. 이들은 기원전 8세기부터 무역 상인으로 교류하다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다.

문화유산
다양한 인종집단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문화적인 동화작용을 거쳤으며, 그 결과 풍부한 문화양식을 형성하였다. 대승불교의 유적, 힌두교 사원, 금속세공, 장식예술 등은 인도네시아의 문화유산으로 보호, 계승되고있다.

인도네시아의 미술은 인도미술의 한 갈래가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 제국의 경우와 동일하며 역사시대 초기부터 오랫동안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유품은 수마트라섬, 자바섬 동부, 보르네오섬, 셀레베스섬에서 각각 하나씩 발견된 불상(수마트라섬의 것은 석불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청동불상)이다. 모두 4∼5세기 남인도 양식의 작품으로 수마트라섬의 불상을 제외하면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이 가져온 것과 동일한 것이다. 4∼5세기 전후에 인도계 미술은 이들 섬들에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 민족 자신의 미술활동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7∼8세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내구재료인 돌을 이용하는 건축 및 조각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많은 유물을 남겼다. 이것은 자바섬ㆍ수마트라섬에 관한 것으로(특히 자바가 중요하다) 다른 섬들에는 이와 같은 유품이 없다. 이 밖에 인도네시아계 미술이 행하여졌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자바섬은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제국 중 가장 우수한 종교예술을 전개시킨 지역으로, 인도의 불교 및 힌두교 미술의 수용을 필두로 8∼9세기에는 중부 자바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가 도래하였다.

인도 굽타계의 우아하고 가지런한 양식을 기조로 하여 보로부두르Borobudur(불교) 및 칸디 롤로전그란(힌두교)과 같은 동양미술사상의 우수한 걸작을 창조하였다. 그 후 정치의 중심이 동부 자바로 이동한 후부터는 인도와의 교섭이 줄어듦에 따라 미술도 점차로 쇠퇴하고 대신자바의 민족적 요소가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자바의 미술사美術史는 전형적인 쇠퇴의 과정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오랜 유품으로는 팔렘방 부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석불 외에 스리비자야 초기에 속하는 돌 및 청동의 불교존상佛敎尊像이 여러 개 있는데, 중부 자바의 미술과 양식상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주목된다. 동부 자바에서 발견된 찬디 유적, 힌두교 및 불교의 존상 및 숭배물 등이 있다.

약 5천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그린 동굴벽화가 인도네시아 남부 술라웨시Sulawesi와 이리안자야Irian jaya 등에서 발견되었다. 또, 기원전 10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천연색 그림을 남부 수마트라Sumatra 등의 대규모 고분 내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인도네시아 회화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특히 양초와 염색을 이용한 인도네시아 특유의 바틱batik 기법은 일종의 회화 장르이다. 초기 자바인 문학에서는 바틱을 만드는 사람들을 화가로 명명했다. 현재는 중부 지역의 욕야카르타Yogyakarta와 발리Bali가 바틱으로 유명하다.

발리풍 회화의 기법은 꽉 찬 공간을 활용하여 힌두 설도입하는 한편, 전통적인 힌두 설화, 전설 그리고 일상생활상을 화폭에 담고 있다. ‘와양Wayang’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그림자 인형극(Wayang kulit, Wayang golek)이다. 와양은 인도네시아에 전래되는 민속 내용을 소재로 하여, 다랑dalang이라는 변사가 가죽, 나무, 바틱으로 만든 꼭두각시 인형을 무대 뒤에서 조종, 표현하는 전통 연극이다. 주로 자바에서 매우 인기가 높으며 최근에는 민주화 추세에 힘입어 현 사회 상황을 은유적으로 풍자한 인형극이 자주 공연되고 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


인도네시아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남북한의 상주공관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과는 1973년 9월에, 북한과는 1964년 4월에 국교관계가 성립되었다. 1949년 12월 한국은 인도네시아를 승인하였고 1966년 8월에 영사 관계를 수립했다. 같은 해 12월에 주駐자카르타 총영사관을 개설하였고, 1973년 9월에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981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데 이어 이듬해 10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자원개발을 비롯한 양국의 협력관계가 확대되었다. 이후 양국 정상은 상호 방문 및 국제회의에서의 꾸준한 교류를 바탕으로 협력 증진을 확대하여 왔다. 최근에는 2012년 3월 인도네시아 유도요노 대통령의 국빈방한(서울 핵안보정상회의), 2012년 11월 이명박·유도요노 대통령의 정상회담(발리 민주주의포럼)이 있었고, 2013년 10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하는 등 정상외교를 통해 양국간의 유대관계가 강화, 발전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을 자국 경제발전의 모델로 인식하여 양국의 경제협력 증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6년 12월 한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한 인도네시아는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Asia Europe Meeting)등과 국제기구에서 한국에 협조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우호관계국이며 비동맹 회원국으로서의 북한 입장을 의식해 대남북한 균형 기조를 유지한다는 원칙을 표명하고는 있으나 실질적 협력관계는 미미한 상황이다.

양국의 최근 경제 협력 교류로는 제4차 한·인도네시아 민관합동 경제협력실무 T/F 개최(2012.6월, 자카르타), 제6차 에너지 포럼 개최(2012.4월, 발리), 자카르타 세계일류상품전 개최(2012.6.26~28, 자카르타), 제7차 한·인도네시아 산림포럼 개최(2013. 7월, 자카르타)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인도네시아의 제7위 교역국이고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제8위 교역국인데, 양국간 교역규모는 2004년 100억달러를 돌파하였고, 2012년에는 2011년 대비 5.5%감소한 296.3억달러를 기록(대對인도네시아 수출은 139.5억달러, 수입은 156.8억달러로 17억달러 적자)했다. 한국에게 인도네시아는 ASEAN 국가 중 두번째로 큰 교역 파트너이다.

양국간에는 문화교류도 활발해서 정부 차원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2007년 9월에 발효된 한·인도네시아 문화협정으로 문화교류 활성화 기반이 구축되어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계속 증대되고 있으며, 중앙 및 지방 TV가 K-POP과 한국드라마를 지속적으로 방영 중이다. 2011년 7월에는 자카르타에 한국문화원을 개설하고 문화원 내의 세종학당에 한국어 강좌를 마련하여 현지인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보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수카르노Sukarno가 1963년 선언한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의 발단은 1961년 5월‘ 말라야 연방’(말레이시아의 옛 이름)수상에 의한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북보르네오의 사바, 사라왁으로 구성되는 말레이시아 연방 구상 발표에 있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구영국식민지의 통합에 의한 말레이시아 결성을 신식민주의 및 제국주의 세력인 영국의 음모라고 비난, 보르네오 북부지역인 사바와 사라왁이 식민지화되기 이전에는 인도네시아의 영토였음을 강조하며 말레이시아 연방에 대한 대결정책을 선언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가 사바와 사라왁 그리고 말레이 반도에 군부대를 침투시키자, 영국이 말레이시아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편 미국과 IMF로부터의 경제원조가 중단되자, 급격한 물가상승과 식량부족으로 인도네시아의 국내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 사건은 1965년 9.30 사태(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를 군부가 진압한 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수하르토Suharto가 말레이시아와의 화해정책을 추진하여 1966년 8월 국교정상화를 실현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러한 양국간의 화해 협력은 이듬해인 1967년 ASEAN 창설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인의 특성과 관습
인도네시아인의 국민성은 열대성 기후와 풍요로운 식생활 자원, 광활한 영토 등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온순하고 여유가 있는 편이다. 대체적으로 인도네시아인은 대국 기질을 갖고 있으며 가부를 명확히 표시하지 않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말하여 결과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슬람 사회의 경우 여성의 사회 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나, 인도네시아는 비교적 개방된 이슬람 사회로서 여성의 사회 참여가 보장되어 있고 경제발전에 따라 사회진출이 더욱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회 관습에 있어서 인도네시아인들은 악수나 물건을 주고 받을 때 오른손 또는 두 손을 모두 사용하며, 왼손 사용은 불경한 것으로 여긴다. 지방의 경우 노인 및 어린이들은 통상 낮 시간(오후 2시~4시)에 휴식을 취하며, 땀을 흘리는 일이 많으므로 기상 시와 취침 전에는 반드시 목욕을 한다. 머리는 영혼을 담은 곳이라고 생각하여 어린아이라도 머리를 만지지 않으며, 술에 취한 사람을 매우 싫어하는 관습도 갖고 있다. 또한 고성으로 질책 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소리 지르는 사람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관습도 있다.

지역별로 특성을 살펴보면, 대통령을 비롯해 사회지도층 인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자바인은 전체인구의 약 60%로서 상대를 존중하면서 감정 없는 표현과 사려 깊은 판단을 하는 성향이 있어 서로 다투는 일이 드물며, 모든 문제를 서로 협의하고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반면, 수마트라인은 다소 직선적이고 거칠어 보이나 사귈수록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특징인데, 군부, 법조계, 종교계, 학계에 주로 진출해 있고 과격한 인사가 많으며 한국인과 비슷하게 매운 음식을 선호한다. 또한 파푸아인은 사회지도층이 적으며 경제적 기반도 취약하나 강인한 체력을 인정받아 체육선수로 선발되는 경우가 많다.

인도네시아는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위(2억 5,116만)의 인구 대국이며, 300여 종족이 사용하는 언어도 600여 종에 이르고 종족별로 상이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인도네시아 표준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sia)는 인도네시아 국민의 사회통합 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