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가 말하는 식민사관 해체론

[STB하이라이트]

- 식민사관에 의한 근대사의 병폐를 낱낱이 파헤칩니다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잔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두어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쾌락을 다 경험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저에게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이봉창 의사가 거사 직전 백범 김구 선생께 한 말



민족 항일기 어릴 적 상해에서 배웠던 역사 이야기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를 그냥 어깨 너머로 읽어보려고 애쓰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식민사관이 어떻게 주류 사학이 되었나’ 하는 역사적인 해설을 하기 이전에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전에 중앙아시아에 사는 어떤 고려인, 우리 민족 중에 거기 추방당해 있었던 분들을 고려인이라고 그러죠. 우리 동포들입니다. 제가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를 하기 때문에 고려인들하고 조금 유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하는 얘기가, 우리 부모님께 배우기를 단군이 우리 할아버지인줄 알고 있었는데 요새 선교사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같이 들린다는 얘기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단군이 신화로 날아가 버렸으니 단군이 없는 자리에 누가 나타납니까. 아브라함이 나타났죠. 주체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단군상의 목이 어느 날 갑자기 다 달아나 버렸어요. 신화인데 왜 귀신을 여기다 갖다놨냐 이거죠.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유태인이 얼마나 강합니까? 미국에 있는 여야 정치인 전부 이스라엘 유태인에게 굽실거려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여러분이 생각하는 월스트리트가 뭡니까? 유태인들의 월스트리트입니다. 이 정도로 힘을 쓰는데 실상 유태인은 얼마 안 됩니다. 세계 인구로 따지면 0.5% 될까 말까예요. 이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879년에 오스트리아에 있는 유태인 출신 헤롯이라는 사람이 시오니즘이라는 걸 처음 만들었어요. 시오니즘이라는 게 뭐냐? 유태인의 역사를 똑바로 하고 유태인의 나라를 세우자. 말하자면 우리 독립운동 하시는 분들이 “우리의 역사를 똑바로 세우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자” 이것과 똑같은 정신입니다.

지금 우리는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근본이 잘못된 이유는 뭐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은 됐는데 일제가 남겨준 유산인 식민사학에 젖어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지금 식민사학인지 구민사학인지 모르고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발전이 극에 달했습니다. 지금까지 발전한 것은 솔직히 우리의 창조적 기능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 베끼고 남의 것 수입해서 조립하는 이런 거 잘해왔어요. 맞죠? 우리가 애플처럼 창조적으로 만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창조적 능력이 없는 건 왜냐? 우리가 아직도 남에게 의존하고 우리의 것은 못났고 남의 것이 좋아 보이고 남의 것을 배워야 되고. 남의 것이 우리 것보다 우월하다고 늘 생각하는 이 열등감, 이런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식민사학의 병입니다. 지금 일본은 이렇고 중국은 저렇고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근본은 뭐냐? 식민지 근성, 식민지적으로 살아온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야말로 새로운 주류 사학, 주체적인 창조적인 데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모임의 주된 생각이며, 주된 흐름이며, 주된 의미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같이 갑시다. 감사합니다. ◎


독립운동 편찬사업으로 탄압받은 이승만 정권기 이야기



오늘은 그동안 우리 집안에서 목격했던 이야기 중에서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편찬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해방 후에 독립운동가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친 선열들의 추도식을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무명용사들의 추도식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바로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었습니다.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죠. 독립운동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고자 한 것입니다. 둘째는 친일반역자에 대한 의법조치입니다. 법에 의해서 그 사람들을 처단하고 징계하는, 이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이라는 것이죠. <그림 희산 김승학>

그래서 희산 할아버지께서 해방 후에 독립운동사에 착수한 것은 이러한 의지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당시 백암 박은식 선생님과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백암 박은식 선생님과 임정에 함께 있을 때, 한국통사와 한국독립혈서를 쓰면서 약속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독립사라는 할아버지 저서에 그대로 담겨 있는데 그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일찍 조국광복을 위한 운동 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주재하던 때에 백암 박은식 선생이 저술한 〈한국통사〉라는 나라 잃은 눈물의 기록과 〈한국독립지혈서〉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 모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후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고자 굳은 맹약을 하였다.

그로부터 여러 해 그 참담한 투쟁을 통하여 사료가 작성되는 대로 당시 내몽골 포두에 계셨던 조병준 선생께 보관시키고 불행히 왜경에게 체포된 후 팔다리가 부서지는 수십 차례의 악형은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모처에 은신하면서 자료를 수합하였다가 일제 항복 후 이 사료를 40여년간 내 피땀의 결정으로 삼아 귀국하였다.”



이것이 당시 독립운동사를 기록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자, 그런데 해방 후 46년부터 49년까지 독립운동사를 주재해서 독립운동사 복간사업을 하셨는데 결과적으로는 1949년 독립신문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백범 피살 직후 이승만 정권에 의혹을 천명한 사설이 문제가 되어서 백범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날 바로 정간이 되었고, 그후 복간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피난지 부산에서 겨우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1953년 5월입니다. 지금 부산의 초량동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 〈애국동지원호회〉라는 독립운동단체 산하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벌써 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사무실에서 쫓겨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결국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독립운동사가 발간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사 집필에 힘쓰다가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시고 1964년 12월 돌아가셨습니다. 그후 저희 아버님(김대업)께서 그것을 이어서 196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독립사를 간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해방 후 독립운동사가 나타나는 것을 집요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친일세력입니다. 독립운동사가 나타나게 되면 그들의 정체가 낱낱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까닭에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사는 198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계에서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1980년이 되면 독립운동의 지도급에 있던 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는 그분들의 기록이나 생생한 증언자료를 남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국에 지금 현재 우리 독립운동사는 일제가 남긴 재판기록이나 일제자료를 가지고 역으로 독립운동사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는 찾았으나 역사는 찾지 못한 그런 민족입니다. 단재 선생은 일찍이 역사로 망하면 100년을 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해방된 지 67년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식민사관이 여전히 이 땅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라가 앞장서서 식민사관을 강요하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해방 후 친일세력의 득세로 이 땅에서는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드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친일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됐습니다. 여러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은식(朴殷植 1859~1925) 호는 백암(白巖)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1915년 3편 114장으로 구성된『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간행했다.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일반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의 세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는『 한국통사韓國痛史』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 동기를 한국통사로 지적할 만큼 민족적 자쉼과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해 봉안 일화



식민지생활, 독재,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체제이고 억압적 존재입니다. 지금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은, 지난 식민지 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이 아직 식민지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관만 문제가 아니라 해방 후 70년에 가까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근성 가운데 노예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이 뼈아픈 사실을, 나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끼며 자신을 반성해보고 있습니다.

식민지 근성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노예근성이죠. 노예적 근성입니다. 사대주의 국제주의 운운하는 가운데, 해방 후 제 나라는 찾지 못하고 국제적 교류에 따라 국제사회가 시키는 대로 눈치껏 따라가면서 약삭빠르게 출세하고 감투을 찾고 돈을 벌고, 해보자고 하는 이런 생각! 해방되던 그날부터 우리 사회에는 이것이 팽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명칭을 대기도 참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것이 소위 건국준비활동이었고 이것이 소위 나라를 미국 혹은 소련에 의지해 나라를 혹은 내 출세 길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시대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군상 속을 헤매고 다니는 가운데 제가 만난 것이 아나키스트 그룹이었고 그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이라는 조직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이 제일 먼저 생각했던 일은 일제 잔재를 소탕하는 일이었습니다.

일제 잔재의 소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일제의 가장 악질적인 경찰, 이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박살내자. 이것이 그분들이 제 1차로 한 일이었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소탕하지 않고서 내가 어떻게 독립을 찾을 수 있겠느냐. 이것이 그분들의 1차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 동지들이 그 다음에 한 일은 무엇이냐. 선열들을 추모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순국선열들이 일제와 싸우면서 피를 흘렸고 수많은 무명의 용사들이 죽어갔는데 해방된 공간에서 이들을 추모하는 일을 빼놓고서 무슨 일을 할 것이냐. <그림 윤봉길 이봉창 유해 이관>

1945년 12월 20일 전후 태고사, 지금의 조계사에서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며 성재 이시영 선생이며 많은 어른들이 모였었습니다. 광복회의 회장을 하셨던 이강훈 선생이 그 당시에 발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모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어른들의 유해를 봉안하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일본에서 총살 당하고 쓰러진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이분들이 일본 어느 구석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는 지금 이런 세태인데, 우선 이분들을 국내로 모시는 일부터 우리 해봅시다. 만장일치로 결의가 됐습니다.

결국 1946년 6월 15일 부산으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울부짖으면서 삼인의 유해 앞에 경배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3열사를 효창공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민족의 한 형태로 시작되었다. 일제의 강압통치에 저항하여 자유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파괴, 암살 등을 필요조건으로 보고 급진적 폭력주의를 택하여 강한 항일운동의 한 면을 보여주었다.



해방 후 한국독립운동사, 묻혀진 이야기



제가 일제 식민사관이라고 쓰지 않고 식민사관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굉장히 저를 즐겁게 했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은 갔지만, 겉으로는 갔지만, 지금 후유증으로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죠. 그런데 지금 또 하나의 신제국주의, 신식민사관이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아까 잠깐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국사 전부 엉터리예요. 이거 정말 만신창이가 돼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때 국사교육을 선택과목으로 했다가 지금 필수로 한다고 그러죠. 그러나 누더기가 된 국사를 그대로 가르치면 하면 뭘 하느냐 이거예요. 고장 난 자동차를 타고 가면 사고 나죠? 수리를 하고 깨끗한 자동차를 타고 가야지 않겠습니까.

지금 고대사 근대사 조선사 고려사, 이거 전부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고치자, 고쳐가지고 타고 나가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강자를 좋아하고 돈 많은 사람을 좋아하고 절대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을 편들지 않습니다. 요즘 독립운동사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서울대학의 경제학자들이 있잖아요. ‘뉴라이트’라고 합니다. 좌냐 우냐. 지금은 그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식민사관에 반대되는 역사관이 뭡니까? 민족사관입니다. 민족사관이 아니면 안 됩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일본은 황국사관이 있었어요. 이것이 우익입니다. 극우파예요. 여러분, 극우파 무섭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칼 들고 온 깡패, 구마모토 깡패들이 동아일보에 숙소를 정해놓고 명성황후를 찔렀고, 지금도 그 칼을 전시하고 있어요. 구마모토에 가보시면 박물관에다가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전시해놓고 있어요. 일본에 가면 검은 차가 방송하고 다녀요. 극우의 자동차입니다.

일본에서 기차를 타면 터널이 많은데 그 터널 다 우리가 팠어요. 파다가 죽은 사람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중국도 당한 적이 있지만 정말 우리 약한 나라 되면 안 됩니다. 패자는 말이 없다. 역사에 등록이 안 되요. 그러기 때문에 민족사관을 하려면 우리가 이겨야 됩니다. 과거와 같은 그런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아까 말씀하신 의사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어떻게 했어요? 총살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 민족의 손에 의해 처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쓰지 않고 뭐 암살했다, 뭐 등등 정말 힘없는 역사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사관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우리가, 한국이 중심이 돼야 해요. 세상에 1년에 250억이나 돈 들여가지고 왜 남의 역사를 연구해 줍니까? 중국 역사를 연구해 주더군요. 우리가 우리 역사를 해야지 왜 남의 역사를 하고 있습니까? 한국이 중심인 민족사관을 정립합시다. 감사합니다. ◎


식민사관 지배구조를 해체하려면



오늘 식민사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식민사관이라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제 나라 역사를 작게 만들고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그래서 우리는 원래부터 형편없는 민족이고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라는 것을 주입시키기 위한 하나의 기본생각이라고 봅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얘기가 여러 번 나왔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 제가 심란합니다. 왜 심란한가 하면 중국에서 동북공정 이야기가 나왔을 때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것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총리공관 삼청각에서 장관들 하고 여럿이 모였습니다. 총리 주재 하에 회의를 했는데 대응할 방법이 있습니까? 여러분, 대응하는 방법은 있잖아요. 우리가 역사연구를 열심히 하고 잘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중요한 학술지에 실어서, 그 사람들의 논리가 허구고 이론적으로 틀리고 실제적으로도 틀리다고 바꿔주면 됩니다. 그 방법밖에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연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교수 출신은 저밖에 없었거든요.

아, 그래서 돈을 300억인가 들여가지고 고구려재단인가 하는 연구재단을 만들어줬더니, 그후 다시 좀더 증자를 한 거 같은데, 설마 그 자리에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취직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야말로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다 들어와 있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더니, 뽑아 쓸 사람, 책임자 한 사람을 잘못 앉혔어요. 나중에 보니 전부 다 그런 부류들만 자리에 앉혀 놨어요.

여러분, 역사 기록을 잘 남겨놔야 고위 공직자들이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을 합니다. 이승만 정권 십수년 동안 독립운동 위해서 애썼다고 훈장받은 사람이 몇분이나 될까요? 딱 두명밖에 없습니다. 한분은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고, 한분은 여기 계시는 이종찬 원장님의 종조부, 이시영 부통령님입니다. 해방 후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을 추서하고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죠.

그리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국회도 없었고 거기서 법도 만들었습니다. 그때 국가기록보존소라는 것을 제가 국가기록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연락을 해서 거기에 이관된 문서목록을 좀 가져오라고 그랬더니, 이관된 문서가 딱 두 건밖에 없더라구요. 한 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현판이고 또 한 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직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나라입니까.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한테 불리한 기록은 남기지 않는 거죠. 우리가 이런 것들을 다 고쳐나가야 합니다.

36년이라는 세월 잠깐이지만 그후에도 60년 세월이 지나고 거의 100년의 세월에 거쳐 이런 식민사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역사강연이 아니라 어찌 보면 운동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 운동에 동참해주시는 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